[여우史] 윤인자, 한국 최초 '누드신'..34세 때 상체노출 도전

■ 여배우의 노출은 예술과 상업성의 가장 민감한 경계선에 있다. 2012년 한국영화계는 다양한 소재와 접근법으로 여배우의 노출에 주목했다. 조여정의 '후궁' 윤여정의 '돈의 맛'에서부터 롤리타 콤플렉스를 다룬 김고은의 '은교'까지.
'왜 벗었는가?' '누가 벗었는가?' 의문은 최초부터 역사로 이어진다. '여배우 노출사'(여우史 )는 한국영화에서 잊고 있었던 '노출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다. < 편집자주 > .
[TV리포트 = 장영준 기자] 한국 영화 최초의 누드 연기를 펼친 여배우는 누구일까.
대한민국 최초 '키스 신' '베드 신' '노출 신' 그리고 '글래머스타'까지. 그랜드슬램의 주인공은 배우 윤인자(90)다. 데뷔작 '운명의 손'(1954)에서 여간첩 역을 맡은 윤인자는 방첩장교(故 이향)에게 마지막 사랑의 징표로 입술을 허락한다. 당시로서는 파격 연기였다. '한국 최초 키스신'이다.
윤인자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세월 탓이다. 지난해 5월, 그는 자서전을 출간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윤인자는 대한민국 최초로 노출을 감행한 용감한 여배우다. 에로티시즘의 역사가 종교와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듯, 윤인자 역시 금기에 도전한 한국 최초의 여배우였다.

▶ 최초 '키스 신' '베드 신' '노출 신' '글래머스타' 기록
김한일 감독이 1957년 발표한 영화 '그 여자의 일생'. 이 작품은 윤인자가 최초로 누드 연기를 펼친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 여자의 일생'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기생의 딸로 태어나 친아버지에게까지 구박을 받던 여주인공 금봉(윤인자). 일찍 혼례를 치르기 바라는 부모의 명을 어기고 서울로 상경해 대학에 진학한다. 이 모든 것은 여학교 시절 은사였던 손명규(임운학)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손명규는 어렵사리 돈을 모아 금봉의 학비를 대줬다.
금봉은 어느 날 임학재(최무룡)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학재를 사랑하던 을남(주증녀)의 모함으로 두 사람은 이별을 맞았다. 결국 손명규와 결혼을 한 금봉은 험난한 결혼생활을 한다. 남편 살해범으로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금봉. 외국 유학을 단념한 학재는 금봉을 면회하며 "금봉 씨는 내 마음에 언제까지나 있다"며 위로한다. '그 여자의 일생'은 이처럼 기구한 여인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당시 윤인자는 한국 영화 최초로 파격 누드연기를 펼쳤다. 이 작품에서 알몸을 드러낸 윤인자는 목욕 신을 통해 역사적인 장면을 완성했다. '그 여자의 일생' 출연 당시 나이가 34세. 윤인자는 비록 유리창으로 가려진 모습이었지만, 상체를 완전히 노출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 최초 파격 누드연기...남편, 감독, 조명 셋만 참여
이 장면에 숨겨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은 고인이 된 윤인자의 남편이자 가수였던 고설봉이 노출 신 촬영현장에 함께 있었다. 윤인자의 노출 장면 촬영은 고설봉과의 협의 끝에 가능했다. 노출 신 촬영에는 김한일 감독과 조명 감독, 그리고 남편 3명만이 참관했다. 윤인자는 큰 수건으로 몸을 둘둘 말아 촬영에 임했다. 유리로 실루엣에 비쳐 어른거리는 모습은 마치 전신 노출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시대상에 비춰 음부나 유두가 나올리는 만무했다.
영화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여배우가 알몸을 노출했다고 그 작품이 오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여배우의 노출은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어떤 작품의 제목을 거론했을 때, 작품이 아닌 노출만 기억한다면 그 작품은 실패작이다."
윤인자는 이후 1976년 속리산 수정암에 출가했다. 1987년 환속해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의 노스님 역을 맡아 스크린에 복귀했다. 윤인자의 필모그래피는 1999년 영화 '얼굴'에서 멈춰있다. '여배우 노출사'의 첫머리를 장식한 윤인자. 그는 진짜 여배우의 원조다.
< 사진=영화 '그 여자의 일생' 포스터, '운명의 손' 스틸컷 >
장영준 기자 jjuny54@tvreport.co.kr
Copyright © TV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