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jury Time-'히스토리 FC' #2 : 첼시 FC(上)

(베스트 일레븐)

2011-2012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 FC에게 돌아갔다. 첼시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강호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짜릿한 승리를 거두며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빅 이어'를 들어 올렸다. 1905년 창단해 2012년까지 무려 107년 만에 일군 실로 감격스러운 우승이었다. 이에 세계 명문 클럽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히스토리 FC'가 두 번째 주인공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런던에 둥지를 틀고 앉아 한 세기 넘도록 굳건했던 '런던의 푸른 사자' 첼시, 그들이 지난 107년 동안 만들어 온 위대하고도 장엄한 이야기다.

▲ History FC #2-'런던의 푸른 사자', 첼시 FC(上)

-남는 축구장 때문에 생긴 클럽

1904년의 일이었다. 런던에 살던 기업가이자 건축가 거스 미어스는 풀햄에 있던 운동장 하나를 구입했다. 축구장으로 개조해 근처를 연고로 삼던 풀햄 FC에 팔려는 속셈이었다.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을 들여 멋진 축구장을 만들었으나 풀햄이 거절한 게 문제였다. 당시 풀햄은 부동산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지역 내 기업가 헨리 노리스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풀햄을 보다 큰 매머드 구단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그에게 미어스가 내민 축구장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훗날 노리스는 아스날을 인수해 풀햄과의 합병을 시도하는 작업까지 벌였는데, 그렇게 창대한 꿈을 꿨던 그에게 작은 축구장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미어스는 적잖은 투자금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헌데 그는 다른 매수인을 찾는 대신 아예 그 축구장을 기반으로 활동할 새로운 축구 클럽을 창단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이게 바로 첼시라는 축구 클럽의 출발점이다.

이듬해인 1905년 3월 14일. 미어스는 축구팀 창단에 관심을 갖고 있던 지인들과 함께 보다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나섰다. 라이징 선이란 이름의 선술집(지금의 펍)에 모인 그들은 풀햄이나 아스날 혹은 토튼햄 못잖은 런던 연고의 축구 클럽을 만들자는 것에 의견을 모았고, 그날로 첼시라는 클럽의 창단을 공표했다. 풀햄 지역에 둥지를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럽 명을 첼시로 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풀햄이란 이름의 클럽 팀이 이미 존재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할 것은 당시 사람들은 팀 명칭을 놓고 꽤나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첼시 FC를 비롯해 런던 FC, 켄싱턴 FC, 스탬포드 브릿지 FC 등 경기장 인근에 있는 여러 지역의 이름을 후보로 올려놓고 고심을 거듭했으나, 보다 고급스럽고 고유한 느낌의 첼시를 선택해 지금까지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소 즉흥적인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첼시의 이후 행보는 제대로 탄력이 붙었다. 무엇보다 클럽이 창단되기도 전에 홈구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 큰 플러스 요인이 됐다. 이미 홈구장을 보유하고 있어 클럽 창단에 필요한 다른 작업(감독 및 선수 수급 등)에 보다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홈구장이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생긴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발 빠른 행보를 보이던 첼시는 한 달 뒤인 1905년 4월, FA(영국축구협회)에 정식으로 등록한 뒤 곧장 2부 리그에 참가했다. 당초 첼시는 1부 리그 가입을 목표로 했었으나, 이미 런던에 연고를 틀고 있던 다른 클럽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중에서도 풀햄과 토튼햄의 반대가 심했는데,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선배들이 쌍심지를 켜며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2부 리그에서 클럽의 역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2부 리그에서 시작했지만 준비된 클럽 첼시의 행보는 초반부터 꽤 인상적이었다. 창단 후 불과 두 시즌 만인 1907-1908시즌에 1부 리그 승격이란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풀햄과 토튼햄 등 첼시의 1부 리그 가입을 반대했던 클럽들이 머쓱해 지는 순간이었는데, 첼시는 탄탄한 공수의 균형과 짜임새 있는 경기력을 발산하며 단숨에 2부 리그를 평정했다. 첼시가 그런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미어스를 비롯한 클럽 창단 멤버들의 헌신적 투자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첼시의 초대 사령탑이었던 존 테이트 로버트슨이다.

-로버트슨 감독과 푸른 유니폼

로버트슨은 스코틀랜드 축구 대표팀의 수비수 출신이다. 그는 첼시를 맡으며 선수 겸 감독으로 뛰었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로 인해 첼시의 주 유니폼이 지금의 파랑색으로 결정됐다는 점이다. 로버트슨은 처음엔 첼시를 맡는 것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대표팀 출신인 자신이 이제 막 창단한 햇병아리 클럽과 엮이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까닭에서다. 하지만 홈구장부터 모든 것이 준비된 첼시의 경영진은 마지막까지 로버트슨을 설득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로버트슨이 "클럽 유니폼을 파랑색으로 하면 감독직을 수락하겠다"라는 다소 엉뚱한 타협안을 내놨다. 첼시의 경영진은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고, 바로 이것이 첼시가 '로얄 블루'란 별칭을 갖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며 팀 지휘봉을 잡은 로버트슨은 곧장 구단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으며 내로라하는 선수 수급에 들어갔다. 로버트슨은 자신의 선수 시절 명성을 활용해 스타급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했는데,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윌리엄 폴크와 스몰히스 출신의 지미 윈드리지 같은 당대의 공격수들을 영입하며 순식간에 클럽의 덩치를 키웠다. 게다가 '기관포'란 별명을 갖고 있던 스트라이커 조지 힐스던까지 영입하며 첼시를 2부 리그가 좁은 클럽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리고 그가 팀을 지휘했던 1905년 5월부터 1906년 10월까지 첼시는 총 50차례의 경기에서 30승 10무 10패(121골 54실점)란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

폭발적 투자와 그로 인한 성적 상승이란 효과를 누리던 첼시는 1907-1908시즌 1부 리그로의 승격을 확정지었다. 초대 감독이었던 로버트슨의 강단 있는 클럽 운영이 큰 실효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1부 리그의 벽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첼시는 호기롭게 도전장을 던졌으나 풀햄과 토튼햄 등 런던에 연고를 틀고 있던 기존 팀들의 아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런던이 아닌 변방에 위치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비해서도 한참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전전하는 그저 그런 클럽을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첼시는 데이비드 켈더헤드란 감독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1907년 7월부터 1933년 6월까지 20년 넘게 장기집권 했지만 1915년 FA컵에서 준우승을 기록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이후에도 첼시는 레슬리 나이튼와 빌리 비렐에게 지휘봉을 번갈아 맡기며 변화를 도모했으나, 모두 세월만 허송했을 뿐 클럽의 발전을 위한 초석 닦기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첼시가 클럽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52년 7월 첼시는 빌리 비렐이 쥐고 있던 지휘봉을 빼앗아 테드 드레이크에게 넘겼는데,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출신인 그에게 마지막에 가까운 기대를 건 것이다. 비록 그가 같은 런던을 연고로 하고 있는 아스날의 레전드 출신이긴 했지만, 서둘러 빈곤한 클럽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첼시에게 그런 것들을 중요하지 않았다. 삼고초려 끝에 드레이크를 모셔오는 데 성공한 첼시는, 그때를 클럽 제2의 창단에 적기라 생각하고 이름만 뺀 모든 것을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첼시의 클럽 현대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드레이크, 클럽의 초석을 닦다

드레이크 감독은 첼시의 지휘봉을 잡은 뒤 현 상태로는 명문 클럽으로 도약할 수 없다고 판단해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세우는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첼시의 클럽 역사상 첫 번째로 팀 체질을 바꾼 수장으로 꼽히는데, 유소년 클럽을 창단해 팀의 젖줄을 만들었으며 유망주를 제대로 발굴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팀에 접목시켰다. 이는 첼시에 있어 대단히 획기적이자 중요한 변화였다. 그간 선수를 수급할 수 있는 유스팀이 없어 매번 비싼 이적료를 지불하고 선수를 사왔던 그들에게 유소년 클럽의 존재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다. 그는 그저 유스팀을 창단하는 것을 넘어 그곳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도 도입했고, 이는 첼시가 훗날 다른 클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되는 큰 원동력이 됐다.

첼시에서 선구자적 구실을 수행하던 드레이크 감독이 바꾼 것 중 인상적인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클럽의 앰블럼이다. 이전까지 첼시는 퇴역 장교의 모습을 형상화한 앰블럼을 사용했다. 이유는 퇴역 장교들을 보살피던 왕립 요양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퇴역 장교들이 유난히 많은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그들의 모습을 앰블럼에 삽입했던 것이다. 하지만 드레이크 감독은 "클럽의 앰블럼은 오직 축구만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선수들이 그 앰블럼을 봤을 때 사기가 고취되어야 한다"라는 강력한 주장과 함께 교체 작업을 주문했다. 이에 첼시는 'CHELSEA FC'에서 C와 F를 활용해 방패 문양의 앰블럼을 만들어 1952-1953시즌부터 사용했고, 이듬해에는 지금의 앰블럼과 흡사한 푸른 사자가 들어간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는 데 이르렀다. 그야말로 첼시라는 이름만 빼고 클럽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변모시킨 드레이크 감독이었다.

그러나 드레이크 감독은 혹독한 개혁으로 인한 빛을 채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성적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프로의 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 것이다. 드레이크 감독은 팀의 근본적 체질을 바꾸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바람에 정작 팀 성적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머물렀던 약 10년 동안 첼시는 여전히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전전했고, 40%가 채 되지 않았던 승률이 그로 하여금 첼시의 지휘봉을 내려놓게 만든 것이다. 물론 1954-1955시즌에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1부 리그 정상에 오르기도 했지만, 보다 꾸준하고 강력한 팀을 원하던 팬들의 기대에 그는 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훗날 재평가 됐다. 드레이크 감독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은 토미 도허티 감독 시절이 되자 지난 10년 간 다졌던 것들이 본격적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1961년 10월 새롭게 부임한 토미 도허티 감독은 웬만한 빅 클럽보다 더 현대적으로 변해 있는 첼시를 맡은 뒤 그저 성적을 내는 일에만 집중하면 됐다. 전임이었던 드레이크 감독이 애써준 덕분이었다. 그는 부임 직후부터 첼시의 승률을 급격하게 끌어 올리며 힘찬 전진을 선언했다. 그 결과 1964-1965시즌에는 리그 우승은 물론이고 FA컵 우승과 리그컵을 모조리 휩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기도 했다. 물론 애석하게도 그해 첼시는 리그컵 우승 트로피 하나만을 손에 쥔 채 시즌을 마감해야 했지만, 늘 1부 리그 잔류가 현실적 목표였던 그들에게는 실로 엄청난 발전적 변화였다.

-영광의 시간

그 시절 첼시의 가장 큰 변화는 클럽 유스팀에서 배출된 스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첼시는 웬만한 팀 부럽지 않은 호화 스쿼드를 보유하게 됐는데, 그들 대부분은 비싼 이적료를 지불하면서 데려온 선수들이 아닌 드레이크 감독이 건설한 유소년 팀에서 자란 선수들이었다. '절단기'란 별명을 얻을 만큼 정확하고 날카로운 수비력을 과시했던 론 해리스, '특급 윙어'로 유명했던 보비 탬블링, 열혈 풀백으로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지치지 않는 열정을 뽐냈던 켄 셀리토, '엘 텔'이라 불리던 팀의 주장으로서 첼시의 전진을 진두지휘했던 테리 베너블스까지. 이들은 모두 첼시 유소년 팀이 배출한 스타플레이어들로 당시 첼시 팬들의 사랑을 듬뿍 차지했던 레전드급 스타들이다.

이외에도 도허티 감독은 저평가 받은 선수들을 수급해 팀 전력에 크게 플러스 시키는 것에도 꽤 훌륭한 수완을 발휘했다. 조지 그래엄, 에디 맥크레디, 마빈 힌튼 등이 대표적인 선수들인데, 이들은 도허티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고 이는 곧 첼시가 잉글랜드에서 만만치 않은 강호로 급부상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너무 멀리 떨어진 시기 활약하던 이름들이라 당시의 첼시가 얼마나 강한 팀이었는가가 피부에 제대로 와 닿지 않을 수 있겠다. 그래서 당시 잉글랜드의 축구 전문가들이 첼시의 베스트 일레븐을 가리며 '다이아몬드 라인업'이라는 대단히 거창한 별칭을 허락했다는 사족을 붙인다. 이정도면 그때 첼시가 잉글랜드 내에서 얼마나 큰 주목을 받던 팀이었는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됐을 것이다.

유스팀에서 자라난 싱싱한 자원들과 외부에서 영입된 스페셜 리스트, 여기에 도허티 감독의 개성 있고 저돌적인 지도력이 맞아 떨어진 첼시는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 앞서 언급했듯 1964-1965시즌에는 트레블에 근접할 정도로 위엄을 과시했고, 1969-1970시즌에는 FA컵 정상에 오르며 푸란 사자 군단의 위용을 뽐냈다. 뿐만 아니다. 1970-1971시즌 참여한 컵 위너스 컵에서는 당찬 자신감으로 결승까지 진군했고,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명문 레알 마드리드와 격돌한 대회 결승전에서 재경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친 끝에 2-1로 승리를 거두며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클럽 대항전 정상에 서기도 했다. 특히 이 우승은 1954-1955시즌 1부 리그 우승 자격으로 얻은 유러피언컵(1955년 창설, 지금의 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축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앞세워 참여하지 말도록 권고한 FA로 인해 허망하게 날린 뒤 쟁취한 것이라 더욱 값졌다.

이후에도 첼시는 꾸준한 성적을 내며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강호로 군림했다. 비록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으나 꾸준히 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하며 다른 클럽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고, 그 결과 같은 런던에 연고를 틀고 있는 풀햄이나 토튼햄 등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은 충성심 높은 팬도 많이 보유하게 됐다. 1905년 축구장이 남는다는 이유로 창단된 클럽이, 60년이란 세월을 지나는 동안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매머드 클럽으로 성장한 것이다.

(下)편에서 계속...

글=손병하 기자(bluekorea@soccerbest11.co.kr)사진=PA(www.pressassociation.com)/그래픽=유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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