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셰르파 | 역사] 부(富)는 얻었으나 '빙하호 붕괴의 시한폭탄' 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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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1 1950년대의 남체 전경. 2 1988년의 남체 전경. 3 2011년 남체 전경. 5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 남체는 이제 카트만두의 타멜 거리를 연상케 할 만큼 도시화됐다. |
'셰르파'(Sherpa)란 본래 네팔 히말라야 일대 지역에 흩어져 사는 민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들은 16세기부터 티베트 동부 캄 지방에서 이주해 내려와 살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다만 이들에게는 공식적인 문자가 없어서, 이들의 역사는 구전으로 채록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셰르파들은 네팔 중북부에서 동부에 걸쳐 20여 계곡에 흩어져 살았는데, 대부분의 셰르파 관련 연구는 에베레스트가 위치한 쿰부 지역에만 집중돼 다른 지역의 셰르파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실상 쿰부 지역 및 인근에는 6,000명 미만의 소수만 기거하고 있을 뿐이며 네팔 전역에 15만 명이 살고 있다. 티베트, 인도, 영국, 미국 등 세계 곳곳에 적지 않은 수가 퍼져 살고 있다. 미국 뉴욕에만 5,000~1만 명이 살고 있다고도 한다.
현재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셰르파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 네팔은 103개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로, 셰르파는 그중 24번째로 인구가 많으며 네팔 총 인구의 0.68%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비록 쿰부 지역 셰르파들을 위주로 설명하지만, 다른 지역 특히 쿰부 서쪽의 롤왈링 지역이나 동쪽의 마칼루(아룬계곡), 캉첸중가(타플레중) 지역에도 더 많은 셰르파가 살고 있으며 꽤나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티베트 종교 분쟁으로 16세기 남하
에베레스트(8,848m)와 초오유(8,201m)를 잇는 장벽의 남쪽에 위치한 쿰부 지역은 두드강(두드코시)과 보테강(보테코시), 임자강(임자콜라)이 접하는 부채꼴 모양으로 생긴 거대한 계곡이다. 이곳 6,000여 명 주민 중 90% 이상이 셰르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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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1 1964년 루클라공항을 지을 때 셰르파들을 고용해 활주로를 닦고 있다. 2 루클라공항 바닥을 다지고 있는 셰르파니들. 3 1964년 처음 들어선 루클라공항. 당초 힐러리의 계획은 계곡 아래쪽에 공항을 건립하는 것이었는데 골바람이 심하게 불어 루클라로 확정됐다. 당시에는 활주로 거리가 안전 기준을 겨우 맞춘 400m였다. 4 2011년의 루클라공항. 길이가 460m로 늘어났다. 매일같이 수많은 비행기가 카트만두를 왕복한다. 그러나 역시 산간지역이라 날씨를 예측하기 어려워 결항되는 일이 잦다. 또한 2010년에는 미국의 한 TV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항'으로 선정됐는데, 실제 2000년 이후에도 6차례나 비행기 이착륙 사고가 발생했다. |
셰르파들이 쿰부 지역에 어떻게 옮겨 와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온갖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동쪽 마칼루산군과 연결되는 암푸랍차고개(5,845m)를 넘어왔다거나, 서쪽의 롤왈링 지역과 연결되는 타시랍차고개(5,755m)를 넘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가장 신빙성 있는 설은 북쪽 티베트와 연결된 낭파라계곡(5,806m)을 넘어왔다는 설이다. 언제 넘어왔는지 또한 분분하지만 셰르파 여러 집안 계보를 따져본 결과 1500년대 초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도 티베트 동부 캄 지역에서 정치·종교 분쟁으로 소수의 인원이 남하했을 것이고, 그중 일부가 쿰부 지역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셰르파의 '셰르'는 '동쪽'이라는 뜻이고, '파'는 '사람'을 뜻해 이 설에 그럴듯함을 더한다. 당시 티베트에서 대승불교 내부의 갈등으로 그동안 중심 종파였던 닝마파 신자들이 겔룩파 세력들과의 다툼에 패해 이주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겔룩파는 달라이 라마를 정치적·종교적 지도자이자 최고의 부처로 신봉하는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주류 종파다. 그에 반해 닝마파는 티베트 전통 종교인 뵌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뵌교는 온갖 자연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진 다신교 전통으로, 오늘날 셰르파들 또한 산이나 바위, 물 등에 신의 이름을 붙이고 숭앙하는 것은 그에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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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1991년 설립된 SPCC는 셰르파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며 그동안 방치되어 왔던 산간지방의 쓰레기를 처리하고 관리하는 데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사진은 SPCC 설립 초기 재활용품을 남체로 수거해 헬리콥터로 카트만두로 보내기 위해 정리하고 있는 모습. |
15세기 말부터 겔룩파가 세력을 얻자 많은 닝마파 사원들이 겔룩파로 개종했으며 정치권의 중심이 이동하게 되었다. 결국 닝마파 신자들은 불교신화 속 신성한 땅 '베율'을 찾아 대이주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쿰부 지역의 각 마을 주민들 또한 자기 마을이야말로 '베율'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베율에서는 폭력, 살인, 다툼, 땅을 훼손하는 행위가 금지된다. 이런 도덕률은 그대로 셰르파들의 인성에 자연스럽게 배어나게 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이후에도 네팔 쪽에서 올라오거나 재차 티베트 쪽에서 계속 내려오는 이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혈통은 다르다 해도 쿰부 지역 사람들과 언어와 풍습을 공유하는 한 그들 모두 셰르파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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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네팔 북동부 히말라야 계곡의 셰르파 거주지. 이들 다양한 지역 중에서도 롤왈링, 쿰부, 아룬계곡, 타플레중 등의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이 중에 쿰부 지역 셰르파들이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세계 여러 곳의 고산족들은 대개 고지대와 저지대를 잇는 교역업을 발달시켜 왔다. 쿰부 셰르파들도 마찬가지다. 쿰부 지역은 티베트 고원의 남쪽 끝에 위치하는데, 남쪽으로는 급격히 고도가 낮아지면서 네팔 동부와 인도로 연결된다. 이런 이상적인 지리적 환경 외에, 네팔 정부는 1828년 쿰부 셰르파들에게 일종의 교역 독점권을 줬다. 즉 티베트 상인들이 쿰부 남쪽 경계인 남체(3,440m)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금했고, 쿰부 출신자가 아닌 이는 낭파라를 넘어 교역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광활한 티베트 고원으로 넘어가는 계곡인 낭파라는 빙하 벌판이지만 추위만 잘 다스리면 별다른 기술적인 어려움 없이 넘어갈 수 있다.
20세기 초가 되자 낭파라를 통해 남체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네팔 간의 교역이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는 티베트의 소금과 네팔의 곡류를 물물교환하는 형태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대를 거듭하면서 점차 라사, 시가체 등 티베트 중심 도시와 인도까지를 오가는 국제 교역상 형태를 띠며 활발히 교역 활동에 임했다. 이런 셰르파들의 상업적인 기질은 1950년대에 이르러 가장 활성화되었다. 운송수단인 야크나 도매로 물품을 구입할 목돈이 없는 젊은 셰르파들은 당시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원정대에서 포터일 등을 통해 큰돈을 벌기 원하기도 했다.
18세기 중엽 네팔 왕조가 설립되면서 구르카 병사를 동원해 쿰부 지역까지 네팔 통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라면 19세기 중반 세관원이 남체에 들어와 세금을 걷어 가는 것밖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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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쿰중 힐러리 스쿨에 있는 에드먼드 힐러리의 흉상. 힐러리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쿰부 지역의 교육사업에 힘을 쏟아, 총 30여 곳에 학교를 건립했다. |
히말라야를 찾아오는 외국인과의 만남
외국인이 쿰부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였다. 1949년까지 네팔은 쇄국 정책을 유지하다가 이후 한시적으로 원정대에 한 해 입국을 허가했다. 대규모 프랑스 원정대가 최초로 8,000m급인 안나푸르나(8,091m)를 등정한 1950년, 영미 합동 에베레스트 정찰대의 찰스 휴스턴과 윌리엄 틸먼은 최초로 에베레스트 남쪽 루트를 답사했다. 인도에서부터 걸어 들어간 이들은 칼라파타르(5,545m)에 올라 등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듬해 에릭 십튼 대장이 이끄는 영국 정찰대는 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역시 처음으로 쿰부 아이스폴 지대를 올랐다. 1952년 봄과 가을 두 시즌에 대규모 스위스 원정대가 같은 루트로 정상을 시도했지만 텐징 노르게이가 레이먼드 랑베르와 함께 해발 8,600m까지 진출하고 아쉽게 돌아서야 했다. 결국 초등은 1953년 힐러리와 텐징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후로도 원정대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1955년 마헨드라 왕이 즉위하면서 처음으로 비자를 발급하고 호텔을 짓는 등 외국인에게 우호적인 정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에베레스트 원정이 뒤따랐고, 로체(8,516m), 초오유(8,201m), 아마다블람(6,812m) 등 인근의 산들로 원정대가 증가했다.
고용되는 현지인 수도 크게 늘어났다. 1952년 스위스 원정대는 163명, 1953년 영국 원정대 450명, 그리고 1963년 미국 원정대가 900명을 고용했다. 당시 임금은 밭일에 품팔이로 고용됐을 때보다 일곱 배가량이나 되었다. 물론 원정대에 고용되기란 흔치 않은 기회여서 셰르파들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에 큰 변화를 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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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1 1964년 건립 초기의 쿰중 힐러리 스쿨 전경(중앙 하단부 떨어져 있는 건물). 2 2011년의 쿰중 힐러리 스쿨 전경. 고등학생까지 포함해 280여 명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셰르파들의 교육열은 다른 네팔 민족들에 비해 높은 편으로 이곳 쿰중 학교를 졸업하면 대개 카트만두의 대학 진학을 목표로 시험을 치른다. 쿰부 지역에 고등학교는 이곳이 유일한데 2012년에는 루클라에도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2007년에는 한국산악회에서 컴퓨터를 여러 대 기증해 컴퓨터 교실까지 열고 있다. 다만 인터넷 연결이 한계가 있어 애로사항이 있다고 한다. |
이후 1959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고 이어 1962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 등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네팔 주 정부는 중국의 남하를 두려워해 남체에 군부대를 설립했다. 인도는 외국인들의 입국을 더 까다롭게 만들어서 티베트, 부탄, 시킴 사람들이 네팔로 대거 이주해 왔다. 그중에 부유한 티베트인들이 카트만두에 고급 호텔 등을 건립하면서 이전까지 가난한 이미지만 있었던 티베트계 민족들의 이미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편 1950년대 이후 미국 등 서방세계는 히말라야의 자연을 보호하고 극빈층으로 분류되던 네팔 주민들을 돕기 위해 여러 사업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쿰부 지역의 개발과 보전은 네팔 정부보다는 에베레스트 초등자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 등을 통한 서구인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컸다.
1959년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함께 이어진 중국 외교 정책의 변화는 티베트와의 교역을 중심 사업으로 삼아왔던 쿰부 셰르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전까지는 매년 티베트인들이 야크 행렬에 소금을 싣고 남체로 내려왔었다. 이들이 소금을 팔고 돌아갈 때 빈 야크 등에 새로운 짐을 싣는 것은 남체 셰르파들의 몫이었다. 셰르파들은 쿰부에서 생산된 버터나 네팔 남부에서 올라온 종이, 티베트에서 내려온 소금, 양모, 장신구 등을 사고 팔고, 또 짐을 싣고 떠날 야크떼나 포터들을 수배하는 데에 능통했었다. 티베트 야크를 사고, 야크 교배종 '좁교'를 파는 일은 그중에서도 셰르파들에게 큰 이익이 남는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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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네팔 쿰부 지역 셰르파 마을 위치도 |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국 당국은 이 야크 매매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정부 출장소가 낭파라 북쪽 마을 강가르에 세워져 셰르파들은 좁교를 흥정 때보다 좀 낮은, 정해진 가격에 단체로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쿰부 지역의 목축업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다른 한편 살육의 1959~1960년 사이에 수천 명의 티베트 난민이 낭파라고개를 넘어 네팔로 피신했다. 이들은 특히 많은 야크떼를 몰고 내려와 급작스럽게 쿰부 지역에 야크 먹이 건초가 모자라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야크 가격은 폭락했고 야크는 점점 예전처럼 중요한 가축이라는 이미지가 없어지게 되었다.
사가르마타국립공원과 셰르파들의 마찰
힐러리는 1964년 쿰중에 최초의 학교와 루클라에 공항을 짓고 이어 30여 곳에 학교를 설립한다. 공항 설립이 바로 쿰부 지역의 관광을 활성화시킨 것은 아니다. 설립한 해에는 20여 명의 트레커가 이곳을 찾았고, 이듬해 최초로 '상업 트레킹 원정대'가 쿰부 지역을 찾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이 지역의 관광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처음으로 네팔의 관광 수익이 쌀 수출로 인한 외화 소득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971년에 1,400여 명, 1980년에 처음으로 5,000명을 넘어섰다. 1989년에는 8,000명에 육박했다. 오늘날에는 매년 3만 명을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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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1, 2, 3 점점 따뜻해지는 기온으로 빙하가 녹고 강둑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는 것은 당장 산간지대 주민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
힐러리의 모국인 뉴질랜드에서는 전문가들이 파견되어 1976년에는 에베레스트 일대를 '사가르마타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미국식 국립공원 모델의 전통적인 기본 개념은 자연이란 '야생(Wilderness)'으로, 인간의 영향 밖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국립공원의 설립은 현지인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것이었다. 사가르마타국립공원 설립 이전 네팔의 유일한 국립공원이었던 치트완국립공원 역시 현지 주민들이 퇴거당했다. 셰르파들은 국립공원 설립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힐러리를 "배신자"라 부르고 국립공원 설립에 반대했다.
그러나 뉴질랜드에서 온 국립공원 전문가들은 처음 5년 동안 사가르마타국립공원 설립에 관여하면서,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웠던 현지주민 참여방식의 국립공원 시스템을 수립하려 노력했다. 이는 오늘날 사가르마타국립공원이 셰르파들의 자치조직에 가깝게 운영되는 기틀이 되었다. 야크 방목에 대해 어떤 제제도 가하지 않았으며 셰르파 마을단위 자체 목초 관리 시스템인 '나와'제도를 가능한 그대로 살리려 했다. 단 숲 벌목에 관해서는 강한 제재를 가했는데, 이 점 때문에 1980년대 내내 많은 셰르파들이 국립공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죽은 나무를 갖다 쓰는 것조차 허가를 받게 했으니 셰르파들이 가만있지 않았고 폭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국립공원 측은 좀 유예를 두긴 하면서 여전히 셰르파들과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한편 계속해서 원정대 및 트레커들의 수가 늘어 1980년대에는 매년 40여 원정대가 쿰부 지역을 찾았다. 그런데 그동안 수많은 셰르파들이 고소포터로 활약하다가 생명을 잃는 경우가 많아, 당시부터는 돈과 명예를 벌 수 있지만 다소 위험한 고소포터보다는 안전한 트레킹 가이드 등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까지 셰르파들은 네팔 전역에서 외국인 트레커들을 상대로 고소득 직종인 캠프 사다(매니저), 쿡 등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사실상 1980년대 즈음에는 쿰부 셰르파들이야말로 그 어느 히말라야 소수민족보다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 1980년대가 지나면서 쿰부 셰르파들은 더 이상 힘들고 상대적으로 보수가 적은 포터 일은 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아랫마을의 타망, 라이족 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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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히말라야 여러 지역에서도 특히 쿰부 지방은 세계 각국 환경단체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다. 각종 환경문제에 관한 연구가 이 지역을 표본 삼아 진행됐고 그에 따른 캠페인 등도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포터를 관리하는 사다는 중간에 소개비 명목으로 돈을 뗀다. 위에는 일당이 500루피라고 말하고, 실제로 포터에게는 400루피만 주는 식이다. 게다가 포터는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면 사다에게 따로 돈이나 선물을 바쳐야만 한다. 그 외에도 각종 물건 가격을 속여서 보고하는 등 사다는 여러 모로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위치다. 대규모 원정대의 사다는 버는 돈 또한 크게 늘어난다.
네팔의 흥망성쇄와 쿰부 지역의 발달
1971년에는 최초로 남체에 로지(lodge·숙박업소)가 들어섰다. 사실 말이 로지지, 일반 셰르파 집 문 앞에 '셰르파 호텔'이라는 간판을 내 건 게 전부였고, 마루에 간이침대를 두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정도였다. 1974년에 숙박업을 목적으로 건립한 로지가 들어섰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부터 1990년에 이르기까지 쿰부 지역, 특히 에베레스트와 고쿄 지역을 중심으로 로지 건설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당시 소규모 트레커들이 급격히 증가한 것과 관련이 있다. 1980년대에는 카트만두의 현대식 호텔 영업 방식이 쿰부 지역에도 도입돼, 기존의 셰르파 가옥 구조를 벗어나 규격화된 침대를 제공하는 기숙사식 다층 구조의 로지가 표준이 되었다.
1996년, 네팔 왕조와 공산주의자들인 마오이스트, 그리고 서구식 국회 설립을 외치는 정당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극에 달해 결국 곳곳에서 마오이스트 폭동이 일어나 10년 동안 네팔 전역을 황폐하게 만든 '시민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다가 2006년 왕이 물러나고 공화정이 들어섬으로써, 특히 서부 일대 농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쟁은 종식되고 네팔은 어느 정도 평화를 되찾았다. 이 시민전쟁은 셰르파들이 사는 지역에는 그다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특히 외국인에 대해서도 잦은 사건이 있었던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외국인 관광객이 큰 폭으로 줄면서 관광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셰르파 사회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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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현대식 로지를 운영하는 것은 가장 부유한 셰르파들의 직업이 되었다. |
쿰부 지역에서 관광업으로 가장 큰돈을 버는 것은 바로 로지를 운영하는 것이다. 숙박료 자체는 무척 싼 편으로, 1980년대 말에 최대 30루피(당시 미화 약 1달러)를 넘지 않았으며 현재도 200루피(약 2.5달러) 전후다. 다만 쿰부 지역에는 따로 식당이 없어 대부분의 이용객이 로지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데 식비가 꽤 비싸다. 1980년대 말 한 끼에 대략 60루피(약 2달러)였으며 요즘은 300~600루피(4~7달러) 정도다. 음식을 사 먹지 않을 경우 방값을 상당히 비싸게 받기도 한다. 현재 포터 하루 일당이 1,000루피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한 금액이다. 다만 현지인들에게는 식비를 거의 반값을 받는다.
외국인들이 쿰부 지역을 찾은 1950년대이래,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쿰부 셰르파들이 관광과 관련해 얻는 소득은 포터나 고소포터 등으로 얻는 '일당'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변해 쿰부 셰르파는 고소득이면서 덜 힘들고 안전한 직업을 찾기 시작해 이들은 트레킹 가이드, 숙박업, 여행사 등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다.
포터와 야크 몰이꾼은 아랫마을의 힘센 라이족이 넘겨받았고, 등반 가이드(예전의 고소포터)는 쿰부에서도 좀 떨어져 관광업의 영향이 적어 '낙후'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포르체마을 사람들이 주로 맡았다. 이도 1990년대 이후에는 쿰부 서쪽 롤왈링 지역 출신의 셰르파들이 맡게 되었고, 2000년대 이후로는 동쪽의 마칼루, 캉첸중가 지역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오늘날 쿰부 지역의 셰르파들은 90% 이상의 가구가 관광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점차 큰 부를 쌓기 시작한 쿰부 지역으로 외부 유입 인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셰르파 가정의 밭일, 나무짐, 소치기 등이나 로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돈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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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1 한편으로는 허름해 보이면서도 첨단 장비를 이용한 시설들이 들어선다. 남체, 타메마을은 수력발전을 이용해 전력을 쓰지만 그 이상의 마을들에서는 집집마다 설치된 태양열발전기로 축전시켜 전력을 공급한다. 2 강한 태양 복사열은 물을 끓이는 데에도 사용된다. |
쿰부 마을들 간에도 빈부 격차가 커졌다. 사다를 많이 배출한 남체와 쿰중은 크게 성장한 반면, 관광객이 찾지 않는 마을은 예전 수준을 유지했다. 이런 차이는 마을 사람들의 복장이나 음식에서 쉽게 드러났다.
경제 발달로 화폐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예전엔 품꾼 일당으로 버터나 감자를 줬고 물물교환이 주요 교역 방식이었지만, 이젠 거의 돈으로 값을 치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한 가지 폐해는 심한 인플레이션이다. 1964년 쿰부 지역에서 쌀 1파티(26kg)는 9루피였는데, 1974년 26루피, 1978년 35루피, 1988년 90루피, 그리고 현재 거의 800루피까지 올랐다. 이 가격 상승의 원인은 늘어난 관광객으로 소비량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아랫마을에서 지고 올라와 파는 라이족들이 쿰부 셰르파들은 그만한 가격을 치를 수 있는 재력이 된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즉 쿰부 셰르파들이 관광업의 급격한 발달로 피해를 꼽는다면 다름 아니라 물가 상승이다. 석유, 달걀, 채소, 과일, 각종 과자 등은 관광객들도 구입하는 품목들이기 때문에 쌀보다 훨씬 크게 오른 가격에 매매되고 있다. 그래도 쿰부 셰르파들이 전체적으로 관광업을 통해 직접 벌어들이는 소득에 비하면 작은 불평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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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에베레스트 근처 모레인 지대의 빙하호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이와 같은 빙하호가 히말라야 지대에 큰 폭으로 늘면서 아랫마을 주민들에게 빙하호 홍수로 인한 재난의 위험이 늘고 있다. |
지구온난화와 쿰부 지역의 환경문제
1992년 유엔기후변화협약이 채택된 이래 지구온난화는 전 세계인이 함께 안은 공동의 문제가 되었다. 히말라야 지역은 그런 문제가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지역이다. 쿰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히말라야 및 각지의 고산 지역은 빙하 감소, 침식 등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라는 개념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현지 주민들의 인구 증가나 잘못된 토지 이용 등으로 지적했었다. 1970년대 사가르마타국립공원 설립 당시에도 쿰부 셰르파들을 퇴거시키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는 그런 잘못된 과학적 지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빙하호 홍수'(GLOF)라는 현상이다. 빙하가 녹아 모레인 지대에 홍수가 형성되고 점차 커지다가 어느 순간 수압을 이기지 못하거나 또는 지진 등으로 둑이 터지면서 아랫마을에는 커다란 홍수로 닥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다. 빙하호는 현재 1만5,000여 히말라야 지역 빙하 중에 약 9,000개로 집계된다. 특히 쿰부 지역에는 아일랜드피크 근처에 있는 임자초, 푸모리 아래의 호수, 촐라체 아래의 촐라초 등이 잠재적인 홍수 피해 위험을 가진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1991년에는 네팔 정부 및 사가르마타국립공원, 세계자연보호기금(WWF) 등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셰르파들 중심으로 SPCC(사가르마타 환경오염방지위원회)가 설립됐다. 이들은 국립공원 환경정화와 관련된 각종 사업을 벌이며, 특히 원정대들이 쓰레기를 잘 수거해 가는지를 점검한다. 2002년에는 국립공원 주변을 둘러싸는 버퍼존(Buffer Zone) 제도가 시행됐다. 이 제도의 특징은 세입의 30~50%를 현지 주민들이 운용할 수 있는 자금으로 지원해 준다는 점이다. 특히 쿰부 지역 버퍼존 위원회는 2006년부터 WWF로부터 추가 협찬을 받기 시작해 최근 집중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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