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선율] 욕망 품고 췄던 '부지발의 춤'..민속춤과 사교춤의 경계를 허물다
르누아르 '부지발의 춤'과 '도시의 춤'19세기 사회개방 분위기 속 폴카 등 새로운 춤 양식 등장귀족풍 '춤의 매너' 점차 실종시골에선 과감한 '스킨십'…도시무도회는 신체접촉 '절제'르누아르, 춤 소재 많이 그려…'부지발' 그림 속 여인은 애인▶QR코드를 찍으면 명화와 명곡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춤바람 난다는 말이 있다. 불가피하게 남녀 간 신체 접촉을 할 수밖에 없는 춤의 성격상 연애감정의 극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춤에는 엄격한 규율과 신사적 매너가 요청됐다. 상류사회의 사교춤인 볼룸댄스에서는 더욱 그랬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왕립 음악무용아카데미가 설립돼 춤의 동작은 물론 매너까지 일일이 규제했다.
이런 춤의 매너는 19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무너졌다. 1812년 영국에서 사교춤에 왈츠가 채택되고 1840년대 이후에는 폴카, 마주르카 같은 새로운 춤의 양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서민층에서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하는 부류가 생겨나면서 민속춤과 사교춤이 뒤섞인 것도 붕괴를 재촉했다. 매너의 실종은 그 중 심각한 문제였다. 그럭저럭 형식적인 절충은 이뤘지만 개방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건전한 귀족적 기풍'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부지발의 춤'은 그런 19세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도시의 춤'과 대비되는 이 그림은 인상주의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르누아르의 중년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그림을 보면 한 젊은 남녀 커플이 시골의 야외에서 춤을 추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여성이 남성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녀는 마지못해 생면부지 남성의 청에 못 이겨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밀짚모자를 쓴 남자는 능청스럽게도 아가씨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른손으로는 여자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고 왼손은 여자의 손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부여잡고 있다.
'부지발의 춤'에 보이는 매너 실종은 '도시의 춤'과 비교해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정장 차림의 신사는 오른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고 왼손으로는 여자의 손끝을 살짝 붙들고 있다. 둘의 자세는 밀착돼 있지만 서로의 신체 접촉을 극도로 절제하며 매너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부지발의 춤'에 보이는 남녀의 춤 동작은 '도시의 춤'과 방향만 다를 뿐 같은 자세다. 이것은 르누아르가 활동할 당시에 이미 사교춤과 민속춤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다만 '도시의 춤'에서는 남녀 모두 자신의 손을 상대편의 신체에 살며시 얹어놓은 이른바 '매너 손'인 데 비해 '시골의 춤'에서는 야수적 욕망과 그에 대한 거친 반발이 지배하고 있다.
'부지발의 춤'의 실제 무대는 파리 서쪽 근교의 작은 마을인 부지발이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의 서정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을로 인상주의자들의 아지트로 유명했다. 모네, 시슬레, 베르트 모리조는 자주 이곳에 들러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르누아르도 이곳 야외 카페에서 열리는 무도회 장면을 화폭에 담기 위해 두 명의 친구를 대동했다.
춤추는 커플 중 새침데기 처녀 역은 쉬잔 발라동이 맡았는데 그는 18세의 자유분방한 여성으로 몽마르트르 화가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이자 모두의 연인이었다. 그는 숱한 예술가들과 사랑을 나눴는데 화가 툴루즈-로트레크, 퓌비 드 샤반, 작곡가 에리크 사티 등이 그의 연인이었고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르누아르의 애인이었다. 그의 파트너 역은 화가의 절친으로 저널리스트이자 탐험가인 폴 로트가 맡았다.이 그림은 인상주의자의 작품답게 빛의 순간적인 인상을 담아내려는 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무 아래로 쏟아지는 햇빛은 발라동의 피부와 흰색 치마 위에 떨어져 눈부시게 빛나고 있고 팔 위에 떨어진 빛은 치마와 신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두 사람 뒤편의 야외 카페에 앉은 남녀와 나무의 묘사에는 인상파 특유의 거친 붓 터치가 보인다. 그렇지만 예전 작품에 비해 형태가 뚜렷해졌는데 이는 1881년과 1882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라파엘로의 작품을 본 후 형태의 중요성을 새감 절감한 결과였다.
르누아르는 동전 한 닢도 아쉬운 가난뱅이였지만 늘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낙관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는 삶의 환희를 만끽하는 사람들로 충만해 있다. 춤은 그 중에서도 삶의 가장 즐거운 순간의 하나로 그가 즐겨 그린 소재였다. 그의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그런 연유다. 즐거운 주말. 어떤가. 우리도 춤 한번 춰볼까. "셸 위 댄스?"
정석범 < 문화전문기자·미술사학 박사 sukbumj@hankyung.com>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 베버 '무도회의 권유'
18세기 유럽 귀족사회의 무도회 분위기를 느껴보려면 카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의 '무도회의 권유'를 들어보라. 이 곡은 1819년 베버가 부인 카롤리네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 소품으로 후일 베를리오즈가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더 유명해졌다.
곡은 무도회에서 한 신사가 숙녀에게 춤을 추자고 권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숙녀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신사의 공손한 요청에 못 이겨 결국 승낙한다.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다 왈츠 음악에 맞춰 여러 차례 흥겹게 춤을 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신사는 숙녀에게 정중히 감사의 뜻을 전하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로맨틱한 후일담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무덤덤한 피날레다.
관현악 편곡에서 도입부의 느린 선율은 신사가 숙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남성의 목소리는 첼로의 저음, 여성은 클라리넷의 고음으로 표현된다. 중간부에 왈츠가 등장하면서 두 사람이 춤추는 장면이 이어지고 무도회는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이윽고 다시 도입부의 느린 선율이 반복되는데 두 남녀가 인사를 나누며 헤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는 왈츠를 비롯한 새로운 춤들이 무도회에 도입되면서 사교춤의 전통이 변질돼가는 시대상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격식만큼은 살아있던 시대의 거울 같은 곡이다.
이 곡은 춤을 테마로 했지만 춤을 위해 만든 것은 아니며 순수한 감상용으로 만든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두자. 자, 그러면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서 흥겨운 무도회의 분위기에 젖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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