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의 UFC 익스프레스] 키 커지는 약이 격투기에 쓰인다고?

(지난 글에서 이어짐)

2.성장호르몬

포털사이트에 성장호르몬을 쳐 보면 '아이들 키 커지게 하고 싶으신가요?' 식의 병원 및 약품 판매 사이트가 잔뜩 뜬다. 소위 '키 크는 주사'가 성장호르몬이 갖고 있는 대표적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성장호르몬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두루 쓰인다. 상당수의 미국 헐리우드 스타들이 성장호르몬을 복용하고 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직업 상 젊어지는 데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을 수 밖 에 없는 그들이 꼽는 최고의 약품 중 하나가 성장호르몬이다. 한 논문에 따르면 61~81세의 퇴역 군인 12명에게 6개월 간 성장호르몬을 투여하자 그들의 신체 나이가 무려 10~20살 젊어졌다는 결과도 있다. 참가자들의 주름이 사라지고, 한 참가자의 부인(무려 15살 연하)은 갑자기 강력해진(?) 남편의 성욕과 정력을 감당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꿈의 약이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영화 '록키'와 '람보'로 유명한 실베스터 스탤론은 지난 2007년 호주에 성장호르몬을 반입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 당시 호주 법정에 서서 반입 이유를 설명하던 스탤론의 말이 걸작이다. "성장호르몬을 복용하면 활력이 생겨 기분도 좋아지고 젊어 보이게 됩니다. 영화 '록키 발보아'를 홍보하기 위해 얼마 동안 버마에 가 있을 건데, 버마에서는 이런 성장호르몬을 과연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성장호르몬은 모든 사람의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데, 20대 이후부터는 10년에 14%씩 분비량이 감소되어 55세까지 나온다. 이 호르몬이 선천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은 왜소증 같은 질환으로 고통을 받는데, 원래 가축이나 죽은 사람의 뇌하수체에서 추출한 성장호르몬이 그들의 치료에 쓰여 엄청난 효과를 보이며 한때 기적의 약이라는 평가까지 받았었다.

하지만 가축에서 추출한 성장호르몬은 사람에게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고, 죽은 사람으로부터 추출한 성장호르몬에는 20년 이상의 잠복기를 거친 후 치명적인 뇌질환인 크로이츠펠트-야콥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바이러스가 숨어 있다는 게 밝혀졌다. 그래서 현재는 유전공학을 이용해 사람의 대장균 속에 든 성장호르몬을 키워 순수하고 안전한 호르몬을 얻어내는 데까지 기술이 발전해 있다. 현재의 성장호르몬 부작용으론 뼈의 기형, 혈당 상승으로 인한 당뇨병 발병 등이 대표적으로 꼽히는데,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물론 장기간이 지난 후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 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다.

성장호르몬은 아이들과 일반 성인들 외에 운동선수들에게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근육량과 근력의 증가, 연골 및 인대 조직의 강화, 신경 조직들의 형성과 손상 세포의 재생, 지방 세포의 분해 등 운동선수들이 바라는 모든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필자와 인터뷰를 했던 전문가(보디빌딩 및 약물에 대한)는 성장호르몬은 스테로이드보다 즉시 근육이 커지는 효과는 덜할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신체의 모든 면을 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오히려 격투기에 더 적합할 수 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성장호르몬의 효과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이들은 최홍만이나 안토니오 실바 같은 거한들이다. 이들은 성장호르몬이 과도히 분비되던 뇌하수체 종양 수술을 받은 후 근육량이 수십 킬로그램이나 감소했다. 실바는 체중이 너무 많이 빠져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다가 적발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60억 분의 1' 효도르의 테이크다운을 모두 버티며 오히려 되치기로 계속 넘어뜨리던 최홍만과 실력으로 따지면 정상급과는 거리가 한참 먼 늙다리 미들급 파이터 미노와 맨의 태클에 넘어지던 최홍만 사이엔 노력이나 운동량 부족 따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성장호르몬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에게 완벽한 패배를 선사하며 유명세를 탄 안토니오 실바가 경기 전 효도르와 마주 선 모습)

원래 크루저급에서 활동하다가 근육을 엄청나게 불려 헤비급의 거한들과 경쟁하며 전설의 반열에 오른 복서 이밴더 홀리필드 역시 성장호르몬 복용을 인정한 바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홀리필드가 똑같은 금지약물임에도 불구하고 성장호르몬은 복용했지만 '올림픽까지 참가한 엘리트 체육인의 자존심'으로 스테로이드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오히려 본인에게 스테로이드 복용을 권한 관계자가 '타이슨도 하는 약물'이라 얘기했다는 걸 밝히며 물귀신 작전을 폈다는 점이다. 여하튼 홀리필드가 원래 본인의 체중보다 수십 킬로그램 더 무거운 거한들과 역사에 남을 승부를 쭉 펼칠 수 있었던 데에 성장호르몬도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홀리필드는 본명이 아닌 '이밴 필드'라는 가명을 사용해 성장호르몬과 남성호르몬, 주사기구 등을 주문했다. 물론 처음엔 법정에서 본인이 아니라 부정했지만, 홀리필드의 아바타 같은 느낌의 이름을 가진 이 '수수께끼의 남성'은 홀리필드와 생일 및 주소가 같았고, 그가 기재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자 홀리필드가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덧붙이자면, 홀리필드는 1990년대 중반 마이클 무어러 전, 리딕 보우와의 3차전 등에서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으며 은퇴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많은 전문가들 및 주 체육위원회의 의료진들은 성장호르몬 사용에 의한 부작용이 그 이유일 거라 얘기했지만, 홀리필드가 당연히 그 당시엔 성장호르몬 사용을 인정하지 않았고 검출 방법도 아직 나오지 않았었기에 그저 추측에만 그칠 수 밖 에 없었다.)

문제는 성장호르몬이 현재 운동선수들에게 분명 금지된 약물이긴 하나, 그 검출방법이 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개발되어 2000년대부터 시행되었는데, 그나마도 현재 격투기 선수들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장호르몬은 소변 검사에서는 나오지 않고 혈액 검사로만 잡을 수 있는데, 현재 미국의 모든 주 체육위원회에서는 격투기 선수들에게 소변 검사만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홀리필드의 성장호르몬 복용 사실도 테스트에서 걸린 게 아니라, 금지약물을 판매하던 한 약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판매 장부에 이름이 올라 있었기에 드러났던 것이었다.

(지난 해 세계 격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셰인 카윈의 약물 사건도 온라인으로 약물을 구매했던 기록이 공개되면서 터졌던 것이었다.)

그래서 격투기 뿐 만 아니라 보디빌딩이나 레슬링 등 비슷한 계열의 운동 경험이 있는 북미 팬들은 각종 포럼에서 성장호르몬이 종합격투기 선수들 사이에서 스테로이드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을 거라 얘기한다. 소변 검사로 적발이 가능한 스테로이드도 주기를 맞춰가며 능숙하게 사용하는 현실인데, 스테로이드보다 근본적으로 더 좋은 효과를 갖고 있으며 부작용도 적은데다 현행 테스트에 아예 걸리지도 않는 성장호르몬은 어떨까? 답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하나 덧붙이자면, 운동선수들 사이에서 성장호르몬은 '호르몬의 왕'으로 불리는 동시에 '럭셔리 약물'로도 통한다. 상당히 비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러 병원들의 아이들 성장 관련 광고나 상담 사례 등 만 읽어 봐도 월에 최소 100만 원 이상의 비용이 우습지 않게 들어가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지난 1997년 보디빌딩계의 충격적인 약물 실태에 대해 밝힌 한 익명의 보디빌더의 인터뷰를 보면 약 15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성장호르몬에만 들어가는 돈이 무려 3만 달러-약 3천 3백 만 원-라 얘기했던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상급 선수들일수록, 더 나아가 더 많은 돈이 도는 스포츠일수록 성장호르몬과 가까워질 수 밖 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재 격투계엔 돈이 많은 정상급 선수가 여유 있게 사용하든, 가난한 무명 선수가 인생 역전을 노리고 대출을 받아 사용하든, 성장호르몬 복용을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닌가. 이게 바로 여러 순진한 국내 팬들이 완벽에 가깝다고 믿고 있지만, 현지 의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허점투성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미국 격투계 도핑 적발 시스템의 현 주소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