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도, 김어준도 폴더폰 쓴다는데
폴더형 휴대전화는 혁명이었다. 기껏해야 증명사진 크기만 하던 액정이 휴대전화를 '접기' 시작하면서 두세 배로 커졌다. 문자 길이도 늘어났다. 1998년, 삼성전자가 폴더형 휴대전화를 출시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자장면을 시켜도 배달이 온다는 신세기통신 파워디지털 017이 '짜장면 시키신 분' 광고로 주가를 올리던 그때다.
유재석·김어준도 번호 고집
당시 신세기통신에 가입했던 조태원씨(가명·32)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폴더형이다. 두 달 전 중고폰으로 바꿨다. 식별번호 017을 유지하기 위해 2G 휴대전화를 구했다. 매장 대여섯 군데를 가봤지만 종류는 기껏해야 두어 개, 48만원이 들었다. 번호를 010으로 바꾸어야 헐값에 살 수 있었다. 결국 중고 제품을 6만원에 샀다. 때마침 매장에는 형광분홍색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산만 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면박을 주었다.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3일 만에 고장이 났다. 다시 바꾼 기기는 상태가 안 좋아 1만원을 거슬러 받았다. 폴더의 혁명도 낡은 것이 되었다.
첫 휴대전화는 열아홉 살 때였다. 삐삐를 쓰던 그에게 처음으로 여자 친구가 생겼다. 마침 '무제한 커플 요금제'가 있었다. 야간 시간대 커플끼리는 무제한으로 통화할 수 있는 요금제였다. 집까지 여자 친구를 바래다주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집에 오면 휴대전화를 붙잡고 밤새 깨알 같은 수다를 떨었다. 사용량이 많아 통신사에서 자제해달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6년의 연애. 끝을 실감한 건 "상대방이 커플요금제 해지를 요청하셨습니다"라는 통신사의 전화를 받았을 때다. 상담원의 목소리에 잠시 넋을 잃었다. "괜찮으십니까 고객님?" 베테랑 상담원이 몇 초 간격을 두고 그를 위로했다.
017 번호를 왜 유지하느냐는 질문에 조씨는 휴대전화와 얽힌 추억을 끝도 없이 풀어냈다. 첫 전화기는 부모를 졸라 12개월 할부로 간신히 장만했다. 13년의 개인사가 담긴 번호를 끝까지 유지하고 싶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정한 010 통합정책 때문에 강제로 번호를 바꿔야 하는 게 마뜩잖았다.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나서 아직도 017이냐고 묻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소외된 느낌도 받았다. 친한 사람들과 그룹별로 대화하는 '카카오 아지트'를 실시간으로 보지 못해 며칠 뒤에야 인터넷으로 댓글을 달았다. 약속 날짜를 당일에 알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고집스럽다고 한다. 그냥 이대로 지내고 싶은 것뿐인데 말이다.
조씨가 좋아하는 방송인은 유재석이다. '국민 MC' 유재석도 친근한 2G 슬라이드 폰을 쓴다. < 무한도전 > 에서 스마트폰을 쓸 줄 몰라서 암호를 못 풀고 쩔쩔매는 모습이 나왔다. 64화음 서라운드 벨소리의 '가로 본능' 유저 정형돈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2G 폰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됐다. < 나는 꼼수다 > 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도 마찬가지다. 최근 '1997년식 지프에 휴대전화는 모토로라 2G 폰'을 쓴다는 김씨의 낡은 전화기가 화제가 됐다. 왜 바꾸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의 첫마디는 "왜 바꿔야 되는데?"였다. 번호를 쓴 지 10년이 넘었다. 기기는 오래되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쓸 만하단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기기는 고장 날 때까지, 번호는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네이버 카페 '010 통합반대운동본부'에는 휴대전화 번호와 얽힌 개인 사연이 줄을 잇는다. '항암 치료를 받을 때 부모님께서 안쓰럽다고 사주신 것이라 특별하다'라는 절절한 사연, '아직도 몇 년 전 거래처가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온다'라는 금전적 사정, '네 바퀴 자동차 땜에 두 바퀴인 오토바이나 자전거도 없어지는 게 맞느냐'는 50대의 성난 푸념까지 다양하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은 2009년 < 010 번호통합 및 중장기 번호자원 관리방안 연구 > 보고서에서 01X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다. 01X 사용자 중 직업으로는 자영업자의 비율이 28.5%로 가장 높았고 연령대는 30~40대가 62.6%로 가장 많았다. 번호를 유지하기 위해 선호하지 않는 단말기나 더 비싼 단말기를 구입해본 경험도 86.2%나 됐다. 특히 01X 이용자 719명을 대상으로 번호를 유지하려는 이유를 물은 결과, 번호 변경 알리기의 불편함과 번거로움(36.3%), 번호 변경이 싫음(22.8%), 기존 번호 그대로 사용하고 싶음(13.6%), 사업상 지장이 있음(10.4%), 내 번호가 마음에 듦(7.2%), 기존 번호에 익숙(6%) 순서로 답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김하얀씨(27)는 보기 전부를 이유로 들었다. 최근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생겼다. 번호를 유지하려는 사람을 두고 마치 '4G 강국'으로 가는 발전을 저해하는 불순 세력 보듯 하는 게 싫어서다. 이를테면 저항의식이 생긴 셈이다. 지인은 '번호 페티시(집착)'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개인적으로 포기하는 부분도 많다. 디자인이 깔끔한 스마트폰 대신 철 지난 글씨체의 중고 전화기를 찾아 헤맨다.
희귀한 번호에 대한 자부심
아이폰을 쓰는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 가끔 문자가 오지 않을 때도 있다. 장문의 MMS 메시지가 구동되지 않아 뜻밖의 오해가 생겨서 싸울 뻔한 적도 있다. 그 뒤로 중요한 문자를 보낼 땐 문자를 받았냐고 확인 문자를 넣는 습관이 생겼다.
016 식별번호를 쓰는 반이정 미술평론가는 "번호에 대한 구시대적 애착일 수 있지만 번호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다른 기능적 혜택을 상쇄할 정도일지는 몰라도 희귀한 번호를 가진 데 대한 일종의 취향이 작동한다는 의미다.
한 번도 휴대전화를 써본 적 없는 소설가 장정일씨는 요즘도 공중전화를 찾는다. 편의점을 5군데는 돌아야 전화카드를 살 수 있다. 그래봤자 4대 중 3대는 고장이다. '관리 소홀' 때문이다. 공중전화도 1966년 처음 등장할 당시에는 한 시절의 '혁명'이었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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