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지른 절벽 위 드넓은 평원, 정겨운 돌담 안엔 '게으른 평화'
제주 대평리가 좋다는 이가 부쩍 많았다. 거기 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그만 눌러앉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서귀포 지역의 몇 군데를 돌아다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죠. 안덕계곡을 넘어 마을이 눈에 들어오는데, 보자마자 편안한 것이 '여기다' 싶더라고요. 맑은 바다에 뒤로는 작지만 군산도 있고, 따뜻하고 포근했어요."
지난 5월 대평리에 게스트하우스 '티벳 풍경'을 열고 이곳에 둥지를 튼 이영화씨의 말이다. 티베트 여행 중 만난 박상철·이영화씨 부부는 티베트에 눌러앉아 카페를 운영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티베트사태 때 쫓겨났다. 이후 중국 윈난성을 떠돌다 결국 한국에 들어왔고, 경북 영양의 산속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 또다시 다른 살 곳을 찾다 지난해 11월 대평 땅을 처음 밟았다.

층층 병풍처럼 늘어선 박수기정. 저 위에 오르면 널따란 초원이 펼쳐진다. 밀물 때라 파란 물이 가득 들어차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 올레길 8코스가 끝나고 9코스가 시작되는 곳. 중문에서 가깝지만 중문처럼 시끌벅적 소란하지 않고, 가끔 낚시꾼과 올레꾼들이 드나드는 조용한 마을. 따뜻하고 포근한 대평리에서 가을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대평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병풍처럼 펼쳐진 주상절리대 절벽, '박수기정'이다. 마을 서쪽 '당케'라고 부르는 포구 해안에 서 있는데, 마을 어느 곳에서 봐도 그림 같은 절벽이 내다보인다. 절벽 아래엔 해식 동굴 두 개가 뚫려 있고, 그 안에 맑은 샘이 흐른다. 이 물을 바가지로 떠 마신다는 뜻으로 '박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정'은 절벽의 제주말.
박수기정이 의외의 즐거움을 주는 것은 절벽 위를 밟고 올라섰을 때다. 절벽 위로 거짓말처럼 드넓은 초원이 나타난다. 원나라 치하에 있던 고려 때는 이곳에서 말을 키웠다고 한다. 말들은 대평포구에서 배로 원나라에 보내졌다. 이 때문에 박수기정에서 대평포구까지 이르는 길을 '몰질(말길)'이라고 불렀다.

해질녘 대평포구. 갯바위에 낚시꾼들이 보인다. 멀리 정답게 서 있는 형제 섬과 그 너머 가파도가 아스라하다.
마을 뒤로는 자그마한 군산오름이 솟아있어 가벼운 등산을 하기에 좋다. 정상에 오르면 한라산과 제주 서부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봉우리에는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과 흉년이 든다고 해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한 '쌍선 망월형'이라는 명당이 있다. 이른 아침 군산에 올라 해돋이를 보고, 대평리에서 시간을 보내다 대평포구에서 해넘이를 보는 것도 좋겠다.
마을로 들어오면 넓게 펼쳐진 푸른 마늘밭이 인상적이다. 대평(大坪)은 이처럼 낮고 평평한 지대가 넓게 바다로 뻗어나가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대평의 다른 이름은 '난드르'. 제주말로 '너른 들'이란 뜻이다. 마을에 용왕과 관련한 전설이 있어 '용왕난드르'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동해 용왕이 마을에 학식이 뛰어난 선생에게 아들을 보냈는데, 3년간의 글공부를 마친 용왕의 아들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군산을 만들어주고 떠났다는 것. 서당 근처에 창고내라는 냇물이 밤낮없이 흘러 물소리가 시끄러워 공부에 방해가 됐는데, 군산이 생긴 후 이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대문이 없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구경거리가 널려 있다. 물병·호박 등 다양한 모양으로 귀엽게 꾸민 문패들, 담장에 색색의 타일 벽화, 조형물들…. 비슷하게 꾸며진 지방 소도시의 여느 마을들처럼 공공미술의 흔적이다. 2009년 마을미술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많은 여행객들이 사진기를 들이대기 바쁘다.
무엇보다 이 작고 소박한 포구 마을이 입소문을 탄 데는 몇몇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들 덕이 크다. 대부분 제주 특유의 정겨운 돌담과 낮은 지붕의 가옥을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다.

대평리 마을 담장의 타일 벽화. 문패도 정답다.
가장 이름난 곳은 영화감독 장선우씨 부부가 운영하는 '물고기 카페'. 이 카페의 정원에 앉으면 파란 마늘밭 너머 대평포구 바다와 박수기정이 훤히 건너다보인다. 해질녘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좋다. 포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초입의 빨간 집, '카페 레드 브라운'도 핸드 드립 커피로 입소문이 나 있다.
카페 근처에서 만난 키튼씨(별명·37)는 "지난해에 우연히 왔다가 좋아서 이제는 제주 올 때마다 대평리에 들른다"며 "올해 들어 펜션과 게스트하우스가 부쩍 많아져 한편으론 나만의 여행지를 빼앗긴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마을 길을 떠돌다 담장 위에 놓인 몽돌의 그림을 따라 갔더니 게스트하우스 '몽돌 하우스'가 나온다. 주인장 이다경씨는 대청소 중이다. 잠시 게스트하우스를 닫고 두 달 일정으로 인도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서울의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던 이씨는 모든 것을 접고 지난해 5월 이곳에 내려와 정착했다. 게스트하우스를 연 것은 올해 6월. 그는 마늘밭과 바다가 내다보이는 마당에 앉아 "바람이 많이 분다는 점을 빼곤 아직까지 단점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걱정이 많았어요. 지난해 한 달 정도 제주로 여행을 왔어요. 그때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기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고민을 하고 있는데 먼저 제주에 정착한 분이 '여기 살면 적어도 지금 가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다'라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바로 살 집을 찾았고, 어떻게 운명처럼 이 집에 들어오게 됐네요. 이곳에서 지내니 종교가 따로 필요없는 것 같아요."

대평리의 '티벳 풍경' 게스트하우스의 한적한 한때. 태국에서 배로 가져왔다는 인력거가 세워져 있다.
게스트하우스 '티벳 풍경'의 여행자들은 종일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영화씨는 말한다. "게으름뱅이 중의 게으름뱅이들만 우리 집에 오나봐요. 올레도 안 걷고 종일 이렇게들 앉아 있어요."
하늘이 붉어졌다. 대평포구에 서서 바다 쪽을 바라보니 물 빠진 검은 여 위로 낚시꾼들의 작은 실루엣이 검다. 그 뒤로 형제섬과 산방산, 멀리 마라도까지 바라보인다. 대평포구는 바닷물이 파랗게 찼을 때보다, 빠져 검은 갯바위들이 들쑥날쑥 드러났을 때가 더 아름답다. 해넘이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빨간 해는 중간에 베개처럼 얇고 길게 깔린 구름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낚시꾼들도 잠시 찌에서 눈을 거두고 해를 바라봤다.
▲ 여행 길잡이
■ 제주공항에서 600번 리무진 버스를 타고 중문관광단지 여미지 식물원 입구에서 내린다. 중문 시내 방향으로 걸어 올라 중문 관광단지 정류장에서 120번 버스를 타고 대평리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혹은 여미지 식물원에서 택시를 타면 5000~6000원 정도.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타면 약 2만원. 내비게이션으로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혹은 대평포구를 검색하면 된다.
■ 대평리는 제주올레 8코스의 종착점이자 9코스의 시작점이다. 8코스는 월평마을아왜낭목~선궷내입구~대포포구~주상절리안내소~베릿내오름 전망대~중문·색달 해변~하얏트 산책로~해병대길~논짓물~하예포구~대평포구(15.2㎞, 4~5시간). 9코스는 대평포구~몰질~박수기정~볼레낭길~월라봉~임금내전망대~자귀나무숲길~안덕계곡~화순금모래해변(7.1㎞, 3~4시간). 월라봉 오르는 길은 쉽지 않다. 힘들이고 싶지 않다면 대평리에서 슬슬 놀다가 박수기정까지만 올라갔다 와도 좋은 산책로다.
■ 대평리 안에는 민박, 게스트하우스, 펜션 등이 많다. 게스트하우스는 대개 커피·토스트·라면·김치 등 간단한 아침식사를 제공한다. 게스트하우스 티벳풍경(070-4234-5836), 몽돌하우스(010-4216-6919), 곰씨비씨(070-8900-8907) 모두 도미토리 1인 2만원, 2인실은 4만~5만원.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대평민박(064-738-0915), 난드르민박(064-738-2321) 등.
■ 마을 안 용왕난드르 향토음식점(064-738-0715)의 마늘강된장 비빔밥, 보말수제비 등이 별미다.
■ 중문 콜택시 (064)738-1700, 안덕개인 콜택시 (064)794-1400
■ 용왕난드르농촌전통테마마을 sora.go2vil.org (064)738-0915
< 서귀포 | 글·사진 이로사 기자 ro@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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