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함기용 "보스턴마라톤 걸어서 1위" 워킹챔프?

이동윤기자 2011. 8. 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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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한국인 최초로 세계 마라톤을 제패한 사람은? 손기정. 일장기를 달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세계 정상에 선 마라토너는? 서윤복. 광복 2년 후인 1947년 제51회 보스턴마라톤에서 세계기록으로 우승했다. 한국 마라톤이 가장 오랫동안 보유했던 기록은? 1950년 4월19일 열린 보스턴마라톤에서 한국선수 3명이 나란히 1~3위로 골인했다. 한 국가가 국제 마라톤대회에서 금, 은, 동메달을 싹쓸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 기록은 2007년 케냐 선수들이 베를린마라톤대회 1~3위를 차지하기까지 57년간 유일한 기록으로 군림해 왔다.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그때의 영웅들이다. 서울 양정중 6학년(요즘의 고3)으로 3명 중 가장 막내였던 함기용은 당시 보스턴마라톤이 풀코스 3번째 출전. 약관의 나이여서 앞길이 창창했던 함기용은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터진 6·25전쟁 때문에 마라톤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뜻을 펴보지 못하고 운동을 접어야 했다.

선수로는 더 이상 활약하지 못했지만 기업은행 지점장, 1989년부터는 대한육상경기연맹 전무이사, 부회장을 맡아 황영조, 이봉주와 같은 세계적인 마라토너를 육성한 스포츠 행정가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해온 함기용(81)씨를 지난 22일 문화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팔순을 넘긴 지금도 옥외광고 회사 사장으로 일하는 탓인지 미색 콤비 재킷에 검은색 와이셔츠 차림이 범상치 않다.

강원 춘성군(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에서 300석 농사를 짓는 부농의 5남 중 막내로 태어난 함기용은 소학교 졸업 후 광복 되던 해인 1945년 춘천사범(6년제)에 입학했다. 당시 춘천에는 춘천사범, 춘천농업, 춘천중 3개교가 활발하게 학교대항 체육대회를 벌이고 있던 때라 입학생 전원은 건강 테스트를 겸해 1500m 달리기를 했다. 운동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그는 여기서 1등 했다. 체육선생은 함기용을 선수로 스카우트해 육상부를 창단하려 했지만 그는 "먼지 먹고 달리는 운동보다는 나중에 선생이 되기 위해 음악실에서 피아노 공부에 열심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교 대항전 단축마라톤에 나가 3위를 하기도 했다.

그랬던 함기용이 마라토너가 된 사유는? "인생은 참 알 수 없어. 춘천사범 3년 때 신탁통치 반대 데모를 했지. 당시는 좌익이 유행이라 나도 그쪽이었는데 학교에서 덜컥 무기정학을 맞고 말았어. 장래 걱정을 하다 당시 '오렌지 빤스'라는 별명의 육상부로 유명한 양정중으로 전학할 꾀를 냈지. 서울에 가서 양정 육상부 주장을 만나 내가 달리기에 소질이 있는데 등록금은 다 내겠으니 스카우트해 달라고 부탁했어. 양정 장거리 선수들과 겨뤄 봤는데 나보다 못 뛰어. 그러자 주장이 당시 훈육부장이자 육상부장인 김성수 선생에게 데려 가더라고. 김 선생이 다음 날 서울운동장에서 직접 1500m와 5000m를 테스트했는데 양정 선수들을 다 이겨서 결국 3학년 2학기부터 전학하게 됐어. 물론 무기정학 맞았다는 말은 안 했지."

육상계에서는 손기정 선생이 직접 스카우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손 선생님을 미화하느라 내가 그렇게 말해 왔지. 무기정학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하는데 지하에 계신 손 선생님이 화낼지 몰라. 그 이야기는 안 쓸 수 없나?"

함기용은 이듬해 런던올림픽 대표선발전에서 서윤복, 최윤칠, 홍종오에 이어 4위를 차지해 영국으로 떠났다. 당시 대표 후보는 4명. 전지훈련을 한 후 현지에서 최종 엔트리 3명을 결정하기로 했다. 당시 17세로 컨디션이 최고였던 함기용은 현지 선발전에서 2위를 차지했지만 결국 출전하지는 못했다. "남승용 선생이 코치였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홍종오, 서윤복이 고려대생이었는데 당시 이철승이 좌익 때려잡는 학련(전국학생연맹) 위원장이어서 고려대 파워가 막강했지. 남 선생이 고려대 배경이 무서워서 나를 대표로 선발하지 못한 것 같아. 아! 그때 내가 뛰었으면 메달은 땄는데 말이야. 1위로 골인하는 선수를 보니 나하고 런던 시내에서 자주 연습하던 아르헨티나 선수(델포 카브레라)야. 나이가 서른네살이나 됐는데 함께 연습할 때 항상 내가 이겼었거던. 우승 기록도 2시간 34분 51초밖에 안 돼. 그때 출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워."

함기용은 보스턴마라톤에서 '워킹(Walking) 챔피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제대회 첫 출전이라 의욕이 앞섰지. 10㎞까지 25위, 20㎞에서 7위 그리고 25㎞부터 선두로 나섰어. 신나서 속도를 올렸지. 32㎞ 지점에 오자 손기정 선생이 '세계기록이다'고 외치시더군. 힘 배분을 했어야 하는데 너무 달려 '하트 브레이크 코스'라는 마지막 오르막 구간에서 발이 땅에서 안 떨어지는 거야. 결국 3번이나 뛰다 걷다 했어. 그래도 1등이야. 보스턴타임스에 '워킹 챔피언'이라고 기사가 났어."

귀국 후 1주일 만에 6·25전쟁이 터졌지만 함기용은 보스턴 우승으로 징집을 면했다. "다음 올림픽을 대비해 나를 징집 보류시켰어. 아나운서 임택근씨 등 몇 명이 나와 함께 후방요원인 제2국민역으로 분류됐었지. 사실 그때 입대했어야 하는데. 두 달 교육 받으면 소위계급장을 달아주었는데, 내 성격에 아마 군에 갔으면 별은 달았을 거야. 사실 보스턴에 갔을 때 난 교포 두 분이 유학을 권해 공부하러 미국 갈 생각이었어. 그 때문에 입대하지 않았지."

공부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고려대학교 경상대 상학과에 51학번으로 입학했다. "당시는 최고 직장이 은행이었어. 졸업 후 1955년 산업은행에 들어갔는데 몇 년 지나자 당시 지점이 11개 시도에 하나뿐이라 지점장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고 그만 '정치병'에 걸려 이철승, 오홍석씨 등과 어울리다 민주당 신파로 입당하면서 그만뒀어. 근데 정치가 내 성격과는 맞지 않아. 1957년인가 58년인가, 춘성군 공천을 다 받았다고 했는데 중앙 상임위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거야. 아버지 전답을 벌써 많이 팔아먹었는데 이러다 빈털터리에 사기꾼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정치를 접었지."

놀고 있던 함기용은 5·16혁명 후 최고회의 요원 선발 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된다. "먹고살려고 시험을 봤지. 사무관으로 합격해 재건국민운동본부 국민생활 개선과로 발령 나 예체능 담당을 했어. 그때 내가 재건체조를 만들었는데 아이디어를 내 구령만 붙이던 체조에 음악을 도입했어. 김동진씨 등 당대 최고 음악가를 불러 체조에 음악을 결합했지. 여론도 좋았어. 그러다 해외개발공사로 옮겨 수석 검사역으로 근무했지."

함기용은 대학 2년 후배인 장덕진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 덕분에 1967년 다시 은행원으로 돌아온다. "공무원은 너무 딱딱해서 맞지 않았어. 장덕진씨를 만나 다시 은행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며칠 후 한국은행, 한일은행, 기업은행에 마라톤팀을 창단시켰어. 기업은행 코치로 들어갔다가 4년 만에 팀이 해체되자 은행 근무를 했지. 장덕진씨가 국영기업체 수석 검사역까지 했으니 차장으로 가라고 했는데 다른 행원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과장으로 가겠다고 했어. 지금 생각하니 잘못한 거야. 임원도 될 수 있었는데 지점장으로 끝났지."

함기용은 당시로는 만혼인 34세에 결혼했다. 부인(김명자·69)과는 나이 차가 많다. 회고담에 도취된 그는 화려했던 과거를 털어놓는다. "노는 재미에 결혼이 늦었지. 내가 대학 때부터 사교춤을 배웠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어. 창경원 건너 원남카바레가 주무대였는데 그 유명한 박인수도 그곳 터줏대감이었지. 댄서가 그러는데 박인수의 춤은 딱딱해서 나보다 한 수 아래라고 하데. 유한마담들에게 자주 불려 다녔지. 더 늦을 수도 있었는데 결혼한 것은 승진 때문이었지. 7년이나 지점장으로 나갈 수 있는 2급으로 승진시켜 주지 않아 전무이사를 찾아갔어. 그랬더니 '장가도 안 간 사람이 어떻게 지점장을 하나' 해, 그래서 바로 장가갔지."

사모님이 기사 보시면 난리 나는 것 아닙니까? "아 마누라도 다 아는 일인데 뭘."

결혼 덕분에 사당동 지점장이 된 그는 강남, 논현 등 노른자위 지점장도 지냈다. 지점장이 된 이후 배우기 시작한 골프가 영업에 큰 도움이 됐다. 마라토너로서의 유명세 덕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 김진만, 권오태 등 정치인, 극동건설 김용상 회장 등 기업인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큰 도움도 받았다. 소설가 이병주씨도 당시의 멤버였다고 한다. "1주일에 3~4번 골프장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비서실에서 행장이 부른다고 본점에 들어오라는 거야. 행장이 '자네는 근무 중에도 골프장에 산다면서' 하시더군. 그래서 '행장님이 예금 유치하란 말 안 하시면 골프장에 갈 일이 없죠'라고 했지. 뭐 사실 지점장 실적이야 남에게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어. '한국은행 총재상'도 받을 정도였으니까. 은행에서는 1985년 정년퇴직했어."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대구에서 열리는데 한국 마라톤이 최근 침체기 아닌가요? "지영준에게 기대를 했는데 장가갔잖아? 마라톤 선수는 장가가면 끝이야. 이봉주는 결혼하고도 4~5년 더 했는데 그걸 보면 이봉주가 대단한 놈이야. 세계 1등은 연습밖에 없어요. 그리고 연맹에 나 같은 '미친 놈'이 있어야 해. 내가 육상연맹 전무할 때 코치들 모아 놓고 외국의 훈련법을 찾아 번역해 강의도 하고 했지. 태릉선수촌 운영도 달라져야 해. 육상은 종목별 코치 7명만 입촌할 수 있게 해놨어. 총감독이 필요한데. 나 때는 이사 중 가장 박식한 사람을 골라 총감독을 맡겨 입촌시켰지. 김성집 촌장에게 연맹 돈으로 밥은 사 먹일 테니 잠만 재워 달라고 부탁했어."

커피를 드시는데 손을 심하게 떨어 잔을 입에 대기도 힘들다. "수전증은 대물림이야. 선친은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셨는데 수전증이 심했어. 우리 형제 중 반은 아버지를 닮아 손을 떨어. 나도 젊었을 때부터 그래. 하지만 이것만 빼면 아주 건강해 매일 8㎞ 걷고 한 달에 두세 번 골프를 하지."

요즘 하시는 일은? "아산기획이라고 옥외광고 회사인데 양정 2년 선배인 황명수(전 국회의원)씨와 동업했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 운영해. 한창때는 직원을 22명이나 뒀는데 지금은 달랑 7명이야. 광고업은 CEO가 직접 챙겨야 하는데 이제 내가 늙어서…. 살다보니 인생이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타이밍이 중요해. 내 경우 런던올림픽이나 은행원 시절 타이밍을 못 맞춰 더 크게 되지 못했어. 그래도 이 나이까지 남에게 손 안 벌리고 살았고 2남 1녀 중 하나는 유학까지 보냈으니 잘 산 거지."

함기용 선생은 오후 1시에 '화신' 뒤에서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있다고 일어섰다. 서대문에서 종로2가까지 꽤 먼 거리임에도 "운동 삼아 걸어가면 된다"며 발걸음을 뗐다.

인터뷰 = 이동윤 선임기자(체육부) dylee@munhwa.com

<오랜만입니다>보스턴마라톤대회는… 1947년에 서윤복 우승 3년뒤 한국인이 1 ~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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