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뉴프런티어 조선시대 21명의 역관들
조선역관열전 / 이상각 지음 / 서해문집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명작, 추사 김정희의 1844년작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제자에게 보냈던 고졸한 느낌의 겨울풍경 그림이다. 당시 제주 유배중이던 추사는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중국을 드나들며 구한 책, 벼루, 붓, 종이를 지속적으로 제주도로 보내자, 한결같은 제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늘푸른 소나무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9대에 걸쳐 30여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한 세습 역관 가문 출신의 이상적은 역관이자 걸출한 시인이기도 했다. 문재가 중국에까지 알려져 그는 중국 친구들을 통해 민감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고, 골동품, 서화, 금석문에서도 유명했다.
조선시대 '외국어의 달인'인 역관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대외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외국어·외교·무역의 전문가였다. 외국을 드나들며 누구보다 이르게 국가 기밀과 해외 선진 문물을 접하게 되는 직업의 특성상, 국가 현안의 해결사이면서 중개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누렸다. 역관은 조선시대 양반사회에서 중인으로서 양반들의 정쟁 와중에 희생되기도 했고, 돈으로 양반을 사서 신분상승을 꾀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엔 중국, 일본 등지서 접한 앞선 문물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화기 선각자로도 활동했다.
한국역사 속 인물과 사건에 대한 저술활동을 펼쳐온 저자는 이 책에선 조선시대 중인계급의 전문가인 역관을 역사 인물을 통해 조명해본다. 이 책에는 총21명의 역관들이 등장한다. 명나라 사서에 잘못 기록된 조선 왕조의 족보를 바로잡는 '종계변무'란 외교현안을 해결한 홍순언을 비롯, 역관 가문인 밀양 변씨와 인동 장씨 집안 이야기도 흥미롭다. 청나라 역관으로서 인조를 어려움에 빠뜨렸던 정명수, 19세기 중반 오응현-경석-세창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의 역관가문에 얽힌 개화기 일화도 담겨 있다.
조선 최대 역관 가문인 밀양 변씨와 인동 장씨는 혼사를 통해 역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혼맥 인맥을 동원해 금전적 실리를 챙겼다. 정경유착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던 변승업의 맏아들과 장현의 딸이 결혼하는 등, 두 집안은 혼사를 통해 막강한 역관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소설 '허생전'에 등장하는 역관 변승업은 조정내신들로부터 전해들은 통상정보와 권력 이동의 상황을 파악해 장사 수완을 발휘했으며, 엄청난 자금을 뿌려 세간의 시비를 잠재웠고. 돈을 써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인동 장씨 집안의 장현은 조카 장옥정이 장희빈이 되기까지 든든한 배경이 됐던 인물이다. 또한 한학 역관 홍순언이 조선·중국 사이의 해묵은 외교전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으로 젊은날 명나라 사행길에 만났던 한 여인과의 인연 등의 일화가 소개된다.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중인 신분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당대 선비와 교감을 나누던 역관. 통역뿐 아니라 무역 문장 등에서 양반사회의 벽을 넘어 조선의 역사를 움직이고 이끌었던 역관들의 짧은 일대기를 통해 뉴프런티어이자 선각자의 삶을 만날 수 있다.
신세미기자 ssem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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