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연극 '길바닥에 나앉다'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무대 분위기는 괴기하다. 몽환적이다. 등장인물들의 대사 중에는 풍자를 넘어서 알쏭달쏭한 것들이 더러 있다. 어지간한 몰입력 없이는 이 연극의 전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잡기가 그리 쉽지 않다.
기린, 노루, 뚤레 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들은 아스팔트 도로에 참기름을 바르며 아스팔트를 뜯어내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령 같은 존재들. 아스팔트를 뜯어내는 것은 자연을 덮어 질식시키고 있는 문명을 분리시키기 위한 작업이다.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 '길바닥에 나앉다'의 극중 시간은 어느 날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도시 외곽의 한적한 주택가다.
정령들이 나목이 흙을 밟고 뿌리내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스팔트를 뜯어내고 있는 가운데 이곳으로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지나간다. 자신을 공권력이라고 소개하는 경찰, 잃어버린 포장마차를 찾아내라며 다른 일에는 안중에도 없는 여인, 끝없이 남의 물건을 자석이 쇠붙이 끌어들이듯 받아 챙기는 삼세기, 겉으로는 따뜻하지만 감추어진 속이 시커먼 찐빵사내들.
극중 대사를 통해 묵묵부답족이라고 분류된 기린, 비분강개족 뚤레, 호시탐탐족 노루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지나는 인간군상들을 조롱하고 문명을 비판한다. 특히 기린은 몇 차례의 긴 독백같은 대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신랄하게 야유하고 비꼰다.
"노인정은 많으나 어른이 없는 세상이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떨어질 때 절개를 다 가져가 버려 오늘날 절개가 없다고 한다. 을사오적이 합방문서에 서명하고 죽을 때 변절을 다 가져가 버려 오늘날 변절이 없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전설 속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동물과 같은 이름의 기린이 길고 짧게 뿜어내는 대사를 음미하는 것은 이 연극을 보는 재미 중 하나다. 기린과 노루 및 멧돼지를 의미하는 이름 뚤레가 등장하는 것은 까마귀, 여우, 호랑이 등 여덟 종류의 짐승이 참석한 회의를 묘사하며 시대를 풍자했던 안국선의 신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1908년)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만큼 '길바닥에 나앉다'에는 풍자적인 요소가 많다. 터지는 것 보다는 킥킥대는 웃음을 자극한다.
김지훈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병폐에만 시각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극중 찐빵사내1의 대사에서 드러나듯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거대 국가권력의 감시 문제는 어느 한 사회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아스팔트 아래 깔린 채 숨통이 터지지 않고 있는 흙(자연)의 문제는 범세계적 현안이다. 공권력, 세금 등에 대한 기린의 대사는 세계성을 갖는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 야쿠르트 아줌마가 등장해 "나는 작가다"라고 소리치며 전단을 뿌리는 모습을 포함한 몇 개 장면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군데군데 철학적인 내용의 대사도 있다. 또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난 해프닝을 극화한 작품인데다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으로만 이해해야 할 부분도 있다. 우선 장면간의 연결고리는 잊고 각 장면의 대사와 이미지를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연극 '길바닥에 나앉다' = 제작 연희단거리패. 연희단거리패 24주년 기념 창작공연 젊은연출가전 작품. 서울문화재단 창작활성화 선정작.
제작진은 ▲작 김지훈 ▲연출 오동식 ▲무대디자인 김대한 ▲조명디자인 조인곤 ▲음향디자인 이형준
출연진은 염순식(기린)ㆍ허준석(노루)ㆍ한상민(찐빵사내1 등)ㆍ이종민(찐빵사내2 등)ㆍ노심동(뚤레)ㆍ고윤희(나목)ㆍ함수연(야쿠르트아줌마)ㆍ신보희(삼세기 등)
공연은 게릴라극장에서 11월30~12월13일. 월요일 공연 있음. 공연문의 ☎02-763-1268.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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