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신교가 무엇이고 구교는 또 무엇인고?"

【서울=뉴시스】양태자의 유럽야화 < 21 >
후게노텐 신교와 연관성이 있는 인물들을 조명하면서 빠질 수 없는 또 한 여인이 있는데 카타리나 폰 메디치(1519-1589)다. 카타리나는 13-17세기 사이에 떵떵거렸던 메디치 가문의 우르비노 귀족 집안의 유일한 딸이었다. 프랑스의 하인리히 2세와 결혼하나 그가 죽자 나이 어린 아들을 대신에 정치에 나선 여인이다.
구체적으로 그녀의 가족사를 한 번 들여다 보자. 그 당시에 메디치 가문은 프랑스, 영국 왕실과 혼인 하면서 서로 손잡았는데 그건 메디치 가문 출신인 교황 레오 10세의 장려 때문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낳고 15일 만에 죽었고, 그녀의 아버지도 곧 죽었는데 매독과 결핵에 시달렸지 않았나 싶다. 그들이 죽자 그의 아주 가까운 친척인 교황 레오 10세가 어린 조카의 보호자가 됐으나 그도 1521년에 죽자 다음 교황으로 하드리안6세가 당선됐다. 이 교황도 메티치가(家) 출신에다가 카타리나의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 교황 역시 2년 후에 죽자 클레멘스 7세가 대를 이었다. 그 역시 메디치가 출신이며, 카타리나의 친척이었다. 메디치가는 돈이 많아서 그런지 그 당시 교황청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가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교황 여러 명이 메디치가에서 나왔다.
그 당시 카타리나는 유산을 무척 많이 물려 받은 돈 많은 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친척들이 교황들이었기에 전 유럽의 왕실족들과 귀족들이 그녀와 혼인 맺기 위해서 안달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너무 돈이 많은 집안이기에 우러러 보면서 혼인 하려고 줄을 섰다고나 할까?
많은 귀족들이 카타리나와 결혼하고자 손을 벌렸으나 클레멘스 7세는 거절하고 프랑스 프란츠1세의 둘째 아들 하인리히와 결혼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왕실 측에서 하인리히가 둘째였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그가 왕위 계승권이 있는 첫째였다면 메티치가가 아무리 많은 선물과 지참금을 들고 온다 할지라도 이탈리아의 상인의 딸과 결혼 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 만큼 왕실과 혼인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14살의 동갑인 카타리나와 하인리히의 결혼이1533년 10월에 프랑스에서 거행됐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의 조카를 위해 많은 지참금을 준비해줬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명한 디자이너에게 프랑스에서 입게 될 카타리나의 고급스러운 옷까지 주문해줬으며, 많은 패물까지 챙겨줬다고 한다.
그가 당시 마련해준 패물 중에는 크기가 아주 큰 진주 귀걸이가 있었다. 카타리나는 뒤에 이 귀걸이를 과부가 돼 고향집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며느리 마리아 슈투아르트에게 선물로 줬는데, 그녀가 사형을 당하고 나서 보니 영국의 엘리자벳 여왕(1533-1603)이 그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엘리자벳 여왕이 사촌을 죽이고 나서 비싼 이 목걸이를 횡령(?)했었나 보다.
다시 카타리나의 결혼식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 이태리에서 프랑스로 가는 카타리나의 결혼식 배가 자그마치 40여 척이었다 하는데 이 배에는 결혼식에 참석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물론이요, 13명의 추기경들, 그리고 또한 많은 주교들, 교황청 소속의 귀족들 무리가 탔다. 프랑스 왕정에서는 이 신분 높은 이들을 영접하기 위해 마르세이유에 나무로 된 한 궁전 같은 집을 지었다. 신랑은 물론 200명의 군인과300명의 궁수들, 개인호위병을 데리고 온 프랑스 국왕은 교황과 바같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지어진 집에서 10일간 아주 상세하게 결혼 협상을 논의했다.
드디어 교황과 프랑스 국왕 사이의 협정이 체결 된 후에야 신부의 행렬이 마르세이유에 있는 교회에 와서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 당시의 그들 사이에 세부적으로 언급된 기록된 협정문서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그때 협상된 것 중 몇 개는 클레멘스 7세가 일찍 죽는 바람에 이행되지도 못했다. 그 중 하나가 카타리나의 지참금이다. 결과적으로는 약속이행과 협상이 무효가 돼 버린 꼴이다 그때부터 프랑스 귀족들의 시선이 카타리나에게 그리 곱지 않아져 카타리나는 프랑스 궁정에서도 고립되면서 자기 자리를 잘 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교계에서 말 타기 실력과 유머 감각을 지닌 성격을 발휘해 점점 프랑스 궁중의 점수를 땄다. 그러던 중 남편의 형이 죽자 그녀의 남편이 하인리히2세로 등극한다.
프랑스 궁정에선 그 당시 카타리나가 임신을 못하고 있자 언젠가 이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으나, 그녀는 드디어 아들 프란츠를 낳고 이후 12년 내내 9명을 낳아 그 중 6명이 살아남았다. 하인리히 2세가 1559년 파리에서 무술 시합 때 많이 다치고 11일 뒤에 죽자 마리아 수투아르트와 결혼한 장자인 아들 프란츠2세(1544/1559- 1560)가 프랑스 왕으로 등극했으나, 15살 먹은 이 어린 왕이 결핵으로 죽게 되자 과부가 된 며느리 마리아 수트아르트를 1561년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려 보냈다. 그 뒤를 이어 칼 9세(1550/1560-1574)가 등극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그녀는 잘 나서지도 않았고, 늘 뒷짐지고 겸손하게 서 있었다. 그러던 여인이 어느 날부터 정치에 나서서 힘을 휘둘렀으니 어느 누구도 그녀의 에너지 넘치는 격렬성을 짐작하지 못했다고 후에 사가들은 밝힌다.
한 번은 그녀의 딸 마가레트가 궁중에서 원하지 않는 남자를 비밀리에 사귀는 것을 알고서는, 스스로 제어를 못할 정도로 침착성을 잃고서 딸에게 달려들어 옷을 갈기갈기 찢고, 머리칼을 쥐어 뜯으며 그녀를 때렸다고 한다. 그 당시 그렇게 형식적이고, 우아하고, 고상한 법도를 찾던 프랑스궁중에서 이런 행동들이 나왔으니 주위의 신분 높은 프랑스 귀족들이 이 좋은(?) 소재를 가지고 부채를 살랑살랑 저으면서 얼마나 많은 입방아를 찧었겠는가? 어쩌면 '이태리 상인의 딸' 이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 카타리나는 구교인 19살 먹은 딸을 신교 후게노텐인 하인리히 폰 나파라와 1572 8월 18일 강제로 결혼시킨다. 이날이 지난 번 언급했었던 '바르톨로메오의 밤'이다. 이렇게 구교와 신교의 갈등을 만들어 수만 명의 피비린내를 뿌렸던 여인 카타리나도 1589년에는 결국 죽는다.
좋은 가문의 딸로 태어나 부모는 일찍 죽었지만 그녀의 든든한 뒷배경을 쳐준 메디치가 출신 교황들 덕택에 그 높은 벽을 뚫고 프랑스 왕정에 도달한 한 여인이 권력 맛을 보면서 음흉하게 변하는 모습의 일부를 엿본다. 지난번에 밝혔듯 그날 결혼식을 빙자해 모인 그 바로톨로메오의 밤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던가를 사학자들은 밝히고 있지 않던가? 한 여인네의 음흉한 마음에서 퍼져 나오는 독기가 무섭기도 하지만 더 깊은 이유를 따져 들어가면 신교와 구교라는 종교 때문이지 않는가? 종교가 뭐길래? 우리가 하느님(하나님) 앞에 서서 "저는 구교 입니다", "저는 신교입니다"라고 고백한다면 하느님(하나님)은 되물을지도 모른다. "얘들아, 신교가 무슨 뜻이고, 구교는 또 무슨 뜻인고?"라고.
비교종교학 박사 ytz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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