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이주노동자, 여전히 먼지 속 미싱작업

2010. 11. 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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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분신 40주기…다시 전태일을 말하다]

창신동 등으로 이전…'어린 여공' 없어

환풍기 드물고 지하 위치해 환경 열악

"외국인 단속으로 벌금내고 문 닫기도"

'미싱사 0명, 시다 0명 구함.' '객공 00명, 하청 재단사 모집.'서울 종로구 창신동 곳곳엔 봉제공장 사원모집 간판이 보인다. 40년 전 전태일은 버스비 30원을 털어 한 개에 1원 하던 풀빵을 어린 여공들에게 사주고, 자신은 청계천6가 평화시장에서 이곳 창신동을 거쳐 쌍문동까지 걸어갔다.창신2동 주민센터 부근 가정집 지하 1층 문을 조심스레 열자 '공장의 불빛'이 어슴푸레 새나온다. 40년 전처럼 미싱(재봉틀)은 "드르르 드르르" 돌아가고 있다. 내국인 3명, 베트남인 1명, 베트남 출신 결혼 이주여성 1명, 네팔인 1명 등 모두 여섯 명이 일하는 이 공장엔 다락층이 있다. 직원 오아무개(57)씨는 "1970년대에 한 층을 두 층으로 나눠쓰던 것보다는 낫지만 아직도 (작업환경은) 열악하다. 곧 먼지 흡입기, 환풍기가 들어올 예정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어린 시다(미싱사 보조)들이 실밥을 머리에 이고 희뿌연 불빛 아래 일하던 옛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다. 대신 30~40대 여성과 이주 노동자들이 재봉틀 앞에 앉았다. 이주 노동자들은 사진기를 들이대자 손사래를 쳤다. 사장 김아무개(55)씨는 "외국인 노동자 서너 명 데리고 일하다 한꺼번에 단속을 당해 문 닫는 경우도 잦다. 한 사람 당 200만원씩 모두 600만원의 벌금을 내려면 보증금을 빼야 하고, 일손도 없으니 폐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청계천 일대에 의류도소매 시장이 들어선 건 1961년 평화시장이 설립되면서부터다. 그 뒤 신평화·동화시장(1969년), 흥인시장(1976년), 광희시장(1980년), 동평화·청평화시장(1983년)이 들어섰고, 오늘날 청계천은 대형 의류산업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전태일 분신 당시 평화시장에 밀집해 있던 봉제공장들은 1980년대 초부터 급속히 빠져, 지금은 창신동, 숭인동, 이화동, 신당동, 왕십리에 밀집해 있다.10여명 직원이 모두 내국인인 창신동의 한 상가건물 2층 공장은 비교적 작업환경이 깨끗했다. 치마와 바지를 주로 만드는 이 공장 미싱사 김정순(42)씨에게 전태일을 아느냐고 물었다. "전태일이요? 들은 적은 있지만 내용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재단사는 한 달에 월급이 250만원, 주로 객공(판매액을 사장과 나눠갖는 도급 노동자)인 미싱사는 170만~180만원, 시다는 110만~150만원을 받는다. 골목길에는 원단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바삐 오간다. 이곳의 한 슈퍼마켓 주인은 "오토바이가 많아야 동네 경제가 산다"고 말했다.대부분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은 영세 사업장이기 때문에 공식 통계는 없지만, 창신 1·2·3동에만 이런 봉제공장이 3천여곳이라고 업계에선 추정한다. 2층짜리 건물 하나에만 지하까지 3~4곳의 공장이 들어선 경우가 흔하다.한편에선 영세한 봉제산업 발전을 위한 자구 노력도 진행중이다. 업체들이 만든 의류봉제지원센터 차경남(52) 본부장은 "올해 서울시로부터 먼지 흡입기 등 환경개선 사업비로 창신·숭인동 30곳 사업장이 각각 200만원씩을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영세 사업장들도 이제 사업자등록을 하고 몇 곳씩 묶어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손준현 선임기자 dust@hani.co.kr

"우리 곁으로 꼭 돌아오겠다던 전태일 선배의 따뜻함 못잊어"38년째 '봉제노동자의 삶' 이씨'시다는 전체가 어린 소녀이며, 연령은 13~17살 다층이며, 1개월 월급은 3000원입니다. 평균 작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1개월 작업시간은 28일 336시간. 시다들은 시간수당이 없으며, 장시간의 많은 작업량이 정신, 육체의 발육과정에 있어 심한 피해가 됩니다.'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이 1970년 10월6일 노동청장에게 낸 진정서의 한 대목이다. 진정서에 담긴 평화시장 시다의 현실은 곧 이재숙(가명·50·사진)씨의 삶이었다. 그가 시다로 평화시장 생활을 시작한 건 1973년, 갓 초등학교를 마친 13살 때였다. 아침 8시30분부터 밤 10시30분까지 하루 14시간 노동에, 쉬는 날은 한 달에 하루뿐이었다. 그렇게 일하고 이씨가 받은 월급은 4000원. 20살이 될 때까지 몸무게는 40㎏을 맴돌았다."그렇게 일하던 어느날, 저녁 8시밖에 안 됐는데 갑자기 집에 가라니까 얼마나 좋았겠어요." 1975년 12월16일 저녁 청계천 일대 10여개 상가 580여 공장에 전깃불이 나갔다. 청계피복노조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 일을 낸 것이다. 노조가 뭔지 몰랐지만 그저 고마웠다고 한다.이듬해 미싱사 언니를 통해 알게 된 노조 여성모임 '아카시아회'에 참여하면서 이씨는 공장 밖 세상을 알게 됐다. 그러나 노조 활동으로 찍혀서 미싱사가 되지 못했고,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3년간 직장을 여러 차례 옮겨야 했다. 그래도 1977년, 구속된 이소선 어머니의 석방과 빼앗긴 노동교실을 되찾기 위한 농성투쟁에 동참했다 경찰에 체포될 정도로 열성인 그였다.1981년, 신군부 정권에 의해 노조가 강제 해산됐다. 그무렵 이씨는 결핵 판정을 받았다.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쓰며 장기간 노동에 시달린 대가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이씨는 몸이 낫자마자 다시 일을 시작했다. 1986년 결혼을 한 뒤엔 남편과 함께 집에서 미싱을 돌렸지만, 의류업 상황이 계속 나빠지자 2002년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13살 시다 소녀는 아줌마가 된 지금도 미싱 곁을 떠나지 못한다.미싱과 다리미는 40년 전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경기는 그때보다 못했다. 의류산업은 침체했고, 일거리가 없어지자 공장은 점차 외곽으로 밀려났으며, 미싱을 배우겠다는 젊은이는 사라졌다. 이씨는 지금 고용계약서도 없이, 사장까지 4명이 일하는 하청업체에서 오전 9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숙녀복을 만든다. 월급제는 옷 한 벌당 가격을 쳐주는 '객공제'로 바뀐지 오래다. 그렇게 그가 버는 돈은 한 달 평균 200여만원 정도다.38년째 미싱을 돌리지만 그의 마음엔 전태일이 나눠준 따뜻함이 남아 있다. "젊은날 노동교실에 가면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라고 쓴 전태일 선배의 글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라서, 너무 좋았어요." 노동조합은 자부심을, 전태일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그에게 알려줬다. 그는 "<전태일 평전>은 우리 같은 사람보다, 사회의 약자를 생각하고 돌봐야 할 지식인이나 정규직들이 더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글·사진/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한겨레'가 새로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 통하니'를 열었습니다. '나에게 전태일은 ○○○다' 여러분의 생각을 자유롭게 '통하니-묻습니다' 에 올려주세요.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 한겨레신문 구독| 한겨레21 구독]공식 SNS 계정: 트위터 www.twitter.com/hanitweet/ 미투데이 http://me2day.net/hankyorehⓒ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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