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280) 피임약

올해는 먹는 피임약 탄생 반세기가 되는 해다. 미국에서 처음 개발된 경구 피임약 에노비드가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것은 1968년이었다. 스웨덴 국제개발처의 지원 덕분이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피임약 덕분에 현대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까지 2억명의 여성이 피임약을 복용했고, 지금도 매일 7000만명이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다.
경구 피임약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함께 이용해서 배란을 억제함으로써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주는 의약품이다. 에스트로겐을 포함한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이용하면 임신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처음 확인된 것은 1930년대였다. 그러나 동물의 몸에서 추출한 천연 에스트로겐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1940년대에는 멕시코의 열대우림에서 자라는 얌에서 추출한 사포닌으로 합성 프로게스테론을 만들었지만 가격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초기의 경구 피임약에 사용됐던 노레티스테론이라는 값싼 합성 프로게스테론(프로게스틴)의 화학적 합성에 처음 성공한 것은 1951년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화학자 칼 제라시였다. 본래 피임약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었던 노레티스테론을 피임약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미국의 생리학자 그레고리 핀커스였다. 미국산아제한연맹을 창립한 산아제한 시민운동가 마가렛 생거의 도움으로 독지가 캐서린 맥코믹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된 핀커스는 산부인과 의사 존 록과 함께 동물 실험을 거쳐 1956년부터 미국, 푸에르토리코, 아이티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임상 시험을 시작했다.
최초의 피임약 에노비드는 1957년 FDA로부터 생리불순과 불임 치료제로 허가받은 의약품이었다. 그러나 핀커스의 노력 덕분에 에노비드가 피임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의료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피임약으로 정식 허가를 받기도 전에 이미 미국에서는 50만 명 이상의 여성이 에노비드를 복용하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생리불순 치료를 위한 처방이었다. 에노비드가 공식적인 피임약으로 허가를 받은 것은 반세기 전인 1960년이었다.
피임약은 최초의 `생활양식 의약품'이다. 대머리, 여드름, 주름, 발기부전 치료제와 마찬가지로 피임약도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약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자라는 의료 자원을 그런 목적에 낭비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지만 환자의 주관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찬성 의견도 있다.
의약품을 이용한 피임에 대한 의학적, 사회적, 종교적 논쟁도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피임약이 장기적으로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란도 있었고, 가정이나 사회생활에 미치게 될 영향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었다. 피임약 복용이 종교적 율법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있었다. 피임약이 양성평등의 꿈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오히려 여성을 더욱 확실하게 종속시키려는 남성들의 음모에서 개발된 것이라는 상반된 주장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임약은 우리나라처럼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던 많은 나라에서 절박하게 필요했던 산아제한에 크게 기여했다. 경구 피임약은 성(性)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바꿔놓았고, 현대 여성의 삶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실제로 경구 피임약이 도입되면서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급격하게 상승한 경우도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변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과거의 인식이 언제나 옳다는 뜻도 아니다. 무작정 변화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운명이다.
이덕환(서강대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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