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방송에서 활짝 핀 짝짓기 프로
채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남성 출연자가 중앙 무대로 걸어 나와 “내 매력은 빚은 만두처럼 예쁜 입술”이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여성 출연자 30명은 스위치를 누를지 말지, 그새 마음을 결정했다. “목소리가 여자처럼 하이톤이라 싫다” “너무 촐랑촐랑할 것 같다” “난 개성 있는 스타일이 좋은데 지극히 평범하게 생겼다”라는 첫인상 때문에 여성 4명이 빨간 불 스위치를 눌렀다.
지난 8월23일, 케이블 채널 tvN의 〈러브 스위치〉 녹화장은 여성 30명과 남성 1명의 미팅 현장이었다. 이날 출연한 남성은 외모 등 첫인상만으로 평가하는 1차 관문에서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쇼호스트라는 직업과 “곱창과 선짓국 같은 음식은 못 먹는다” “결혼하면 아내가 아침 식사는 차려줬으면 좋겠다”와 같은 취향·가치관을 밝히는 2·3차 관문에서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여성 출연자 중 한 사람과 커플이 맺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성 출연자는 키·몸매·말투는 물론 입술 모양까지 평가받는 혹독한 절차를 겪어야 했다.

〈러브 스위치〉처럼 남녀를 대면시켜 쌍을 만들어내는 ‘짝짓기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예능 분야의 오래된 아이템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모른 채 1대1 미팅을 벌이던 〈청춘만세〉(1977~1979, MBC)와 여성 1명과 남성 4명이 출연해 서바이벌 형식으로 진행된 〈청춘데이트〉(1989~1990, MBC)가 그 시초였다면 8년간 장수한 〈사랑의 스튜디오〉(1994~2001, MBC)는 짝짓기 프로그램의 ‘정석(定石)판’이었다. 이후에도 〈남희석 이휘재의 멋진 만남〉(1999~2000, SBS)·〈강호동의 천생연분〉(2002~2003, MBC)·〈산장미팅 장미의 전쟁〉(2002~2003, KBS)·〈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2005~2006, KBS)처럼 다양한 프로그램이 잇따라 방영됐다.
‘은근슬쩍 눈빛 교환’은 한물가다
하지만 최근 공중파 채널에서 짝짓기 프로그램의 인기는 예전과 같지 않다. 연예인 여성과 일반인 남성이 맞선을 보는 〈골드미스가 간다〉(2008~2009, SBS)와 남녀 연예인이 서로의 일반인 친구들을 서로 미팅시켜주는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2008~2009, MBC) 정도가 조금 화제를 모았을 뿐, 최근 5년 이내 짝짓기 프로그램은 ‘대박’ 아이템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선택남녀〉(2006, SBS)나 〈꼬꼬관광 싱글♥싱글〉(2009, KBS)처럼 방송 시작 두세 달을 못 넘기고 폐지되는 경우도 많았다. KBS 예능국 김승연 PD는 “공중파에서 PD들이 짝짓기 프로그램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시청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 아이템은 돌고 도는 사이클이 있는데, 지금 짝짓기 프로그램은 그 시기가 아니라고 모든 PD가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케이블 채널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2007년 〈러브룰렛 연상연하〉(tvN)와 〈아찔한 소개팅〉(Mnet)을 시작으로, 〈러브 인 몰디브〉(XTM)·〈연애반란〉(QTV)·〈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Mnet)·〈러브택시〉(QTV) 등 여러 짝짓기 프로그램이 꾸준히 전파를 탔다. 현재 방영 중인 프로그램도 〈스캔들〉(Mnet)· 〈매일 결혼하는 남자〉(Y-star)·〈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Mnet)·〈러브 스위치〉(tvN)·〈얼짱시대〉(Comedy TV)·〈미스터 리치〉(Y-star)·〈데이트 쇼퍼〉(On Style) 등 10여 편에 이른다. 시청률 1%만 넘겨도 ‘대박’으로 치는 케이블 채널에서, 〈러브 스위치〉 같은 짝짓기 프로그램은 평균 시청률 3.5%를 훌쩍 넘기기도 했다.

공중파에서 케이블로, 주말 오전에서 평일 새벽으로 방영 채널과 시간대가 바뀌면서 짝짓기 프로그램은 예전과 그 양식이 확연히 달라졌다. 게임과 장기자랑 시간을 통해 은근슬쩍 눈빛을 교환하던 남녀 출연자들은 이제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앞에서 상대가 좋은지 싫은지 거침없이 발언한다.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까지 가려내게 되면서, ‘사랑의 작대기’처럼 마지막 순간에야 수줍게 마음을 밝히는 수단으로 쓰이던 긍정적 의미의 스위치(버튼)는 초반부터 비호감형 이성을 퇴출하기 위해 누르는 부정적 도구로 변했다.
또한 출연자들은 자신의 짝을 찾을 때 더 이상 ‘사랑’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키가 몇이나 되시죠?” “월수입은 얼마인가요?” “성형수술 경험이 있나요?” “사는 동네가 어딘가요?”라는 질문을 당당하게 던지고(〈러브 스위치〉) 엄청난 재력을 갖춘 이성에게 구애하는 걸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미스터 리치〉). 출연자들도 자신의 프로필에 월수입과 보유 차량, 보유한 아파트의 평수와 시세까지 밝히며(〈데이트 쇼퍼〉) 짝을 찾는다.
이들은 또 요새 젊은이들이 어떤 이성을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호감형 얼굴에 착한 사람’ 정도가 아니다. ‘외모와 능력이 출중하고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만 밝혀도 양반이다. 출연자들은 ‘팔에 핏줄이 보이는 남자’ ‘쌍꺼풀이 없고 헤어 라인이 예쁜 남자’ ‘외복사근이 있는 남자’ ‘잘록한 허리와 B컵 가슴을 가진 연상의 여자’가 좋고 ‘회색 양말을 신는 남자’ ‘피부를 까맣게 태워 더럽게 보이는 여자’가 싫다며 자신의 이상형을 세세히 밝힌다.
케이블 채널 짝짓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대개 연예계에 데뷔하지 않은 일반인이다. 케이블 방송사에서 인기 연예인을 섭외할 만한 제작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인(公人)이 아닌 일반인들에게서 훨씬 더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발언과 행동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브 스위치〉 황의철 PD는 “처음에는 프로그램 기획 의도대로 출연자들이 자신의 연애관과 가치관을 잘 드러내줄까 우려를 많이 했는데, 진행해보니 오히려 일반인이 연예인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생각을 밝혀주더라”고 말했다.

짝짓기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시청자들도 그런 ‘적나라함’에 재미를 느낀다. 〈러브 스위치〉를 매회 챙겨 본다는 이한나씨(26)는 “보통 여자들이 ‘속물’이라는 욕을 들을까봐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들을 신분이 모두 노출된 여성 출연자들이 대놓고 발언해주는 걸 보면 공감이 많이 되고 짜릿함을 느끼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러브 스위치〉에 출연해 여성 출연자들에게 ‘속물스러운’ 질문을 많이 받은 김석씨(31)도 “요즘 짝짓기 프로그램은 10번 만나 정들어 사귀는 게 아니라 처음 보고 좋으면 만나고 아니면 마는 지금 젊은이들의 연애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공감을 많이 사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성관계 왜곡 조장” vs “현실 반영일 뿐”
물론 그런 재미를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와 〈선택남녀〉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되던 2006년 SBS 라디오 〈뉴스 엔조이〉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남녀 709명 중 43.2%가 “짝짓기 프로그램 시청 시 거부감을 느낀다”라고 답했다. 서울대 언론영상학부 김미라 전임강사는 ‘리얼리티 데이트 프로그램 시청이 데이트와 이성관계에 대한 시청자 인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한국언론학보, 2008)에서 “〈아찔한 소개팅〉 〈러브룰렛 연상연하〉와 같은 리얼리티 데이트 프로그램은 ①남성들은 성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으며 ②데이트는 일종의 게임이고 ③여성은 성적인 대상물이라는 세 가지 태도의 지지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비판했다.
고려대 언론학과 최은경씨도 석사 학위 논문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현실 구성과 비판적 성찰의 이중성〉(2009)에서 “짝짓기 프로그램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기존 지배적 담론을 시청자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한다”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논문은 시청자들의 ‘비판적 성찰의 가능성’도 짚었다. 짜인 서사가 없는 리얼리티 장르의 특성상 프로그램의 결말이 시청자가 갖고 있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판타지를 해체하는 기능도 한다는 것이다. 〈골드미스가 간다〉에서 남녀 출연자들이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다가 결국 대부분은 서로를 선택하지 않고 싸늘하게 돌아서거나, 〈러브 스위치〉에서 긴 경쟁 끝에 커플이 성사된 뒤에도 상대가 연락을 해오지 않아 “흥, 그 사람 원래 별로였다”라고 험담을 하고,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에서 진심인 줄 알았던 남자의 구애가 사실은 상금이나 쇼핑몰 홍보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됐을 때, 시청자들은 잔혹한 짝짓기의 세계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명석씨는 “요즘 짝짓기 프로그램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선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에서나마 그런 현실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현실을 아예 인정조차 하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짝짓기의 세계가 방송 프로그램으로 제작된다는 것 역시 냉혹한 현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현실을 반영한 TV는 이제 더이상 사랑을 싣지 않는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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