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DX 성공신화' 90년대 CDMA 개발 길 텄다

■ 또 다른 신화가 시작된다 2020 IT코리아Ⅰ. 통신서비스 부문 - 1부-TDX에서 유무선통합까지3.TDX는 CDMA국산화의 동력
당시 TDX 개발을 결정하면서 우리에겐 몇 가지 고민이 더 있었다. 예산확보는 당시 오명 체신부차관의 의지로 240억원을 확보한 상태. 하지만 기술은 사실상 황무지와도 같았고, 연구원들도 모두 민간기업에 흩어져 있었다.
당시만해도 TDX는 통신선진국 몇 나라에 의존했던 터여서, 한해에 보통 5000억원 이상의 장비를 들여와야 했다. 당연히 업체간 경쟁도 치열했다. 우리 정부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국산화 계획을 확정짓고, 그 해 도입할 TDX 공급업체를 선정하면서 기술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통해 선정된 업체는 에릭슨.
"회사를 결정하기 전에 상대 회사에 대해 모두 조사를 하는데, 이 때는 물건 팔려고 하는 회사들은 자료를 모두 보여주게 됩니다. 에릭슨 장비를 도입하기로 일단 결정을 하고, 연구원들을 시켜 샅샅이 배워오도록 했어요. 마지막날 협상 때 기술측면에서 필요한 리스트를 주며 달라고 했지요. 에릭슨 회장이 1시간 가량 고민하더니 결국 사인하더군요. 이를 통해 에릭슨의 전자교환기 기술이 상당부분 들어올 수 있었고, TDX 국산화가 탄력을 받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명 건국대 총장은 디지털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TDX 공급권을 둘러싼 국제적 경쟁관계를 최대한 활용, 국산화를 촉진시켰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특히 기술도입 뿐만 아니라, 경쟁관계에 있던 재벌회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연구원들을 ETRI에 모아놓고 뜻을 이뤄낸 것은 우리나라 R & D역사상 보기 드문 사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뤄낸 TDX 개발성공은 `돈을 벌 수 있는 R & D의 개념'을 과학자들에게 확실하게 심어줬다.
2010년 3월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의 이동통신 가입자는 모두 4898만명을 기록, 통계청이 추산한 올해 인구 4887만5000명을 넘어섰다. 1인 1휴대폰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동통신 가입자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늘어나 이제 1인 2휴대폰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나라는 초고속인터넷 보급률 1위를 달성한 데 이어 휴대폰 제조, 이동통신 서비스 분야에서도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사는 통신 강국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동통신 분야 우리가 이처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90년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을 국산화할 수 있었던 것이 주효했다. CDMA 기술을 자체 개발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이동전화 서비스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었다. 또, 삼성, LG 등 대기업은 국내에서 터득한 휴대폰 제조 기술을 통해 해외에 수출할 수 있었다. 이제 휴대폰 수출은 국내 효자 산업이 됐다.
우리나라가 CDMA 기술 개발에 나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1980년대 TDX개발 성공을 지목한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TDX 개발에 성공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CDMA 기술 개발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통신 기술은 내놓을만한게 없었다. 하지만 TDX를 국산화함으로써 통신 기술을 자립화할 수 있었으며 통신 서비스의 대중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CDMA 기술 개발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TDX는 1990년대의 CDMA와 2000년대의 와이브로(Wibro) 등 뒤이은 대형 통신 국책사업의 시발점이 됐으며 지금의 IT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첫 단추였다.
돌이켜 보면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만해도 `IT 강국 코리아'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한국이 TDX교환기를 개발한다고 할 때 세계 전문가들을 코웃음을 쳤다. 선진국들도 감히 엄두를 못내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 정부는 청색전화와 백색전화 제도를 도입했다. 청색과 백색은 전화기의 색상이 아니라 전화 가입 원부의 용지의 색을 의미한다. 청색전화는 기존의 백색전화와 달리 타인에게 양도와 증여가 금지된 새로운 전화였다.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만성적인 전화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전화를 신청해도 몇 년씩 기다리는 일이 예사로 발생했다. 1972년말 1만3000건이었던 전화 적체는 1973년 4만7000건, 1976년 14만4000건, 1978년 41만건, 1979년 60만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전화 적체가 심각하다보니 전화 개통을 둘러싼 각종 비리도 만연했다.
정부가 전화청약우선제도, 백색전화와 청색전화 제도 도입 등을 제시했지만 오히려 전화가입권이 투기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등 부작용을 낳았다. 정부의 예상과 달리 백색전화의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한때 전화기 한 대 값이 260만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당시 서울 시내 집값이 230만원 정도였으니 전화 품귀 현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화 적체의 문제는 주요 일간 신문의 단골 기사로 등장했다. 심지어 경제신문은 백색전화의 시중 시세를 정기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양적인 문제뿐 아니라 질도 문제가 됐다. 전화 통화의 폭주에 따른 오접속, 전화기와 선로 시설의 노후로 인한 고장, 통화 도중의 혼선과 통화중의 절단 등 이용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전화 적체 현상을 해소하지 않고는 사회적 경제적 발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더욱이 198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정보기술과 통신기술이 융합한 고도의 정보통신 기술이 곧 도래할 것이란 조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하지만 당시 국내 형편으로는 이에 대한 준비나 대처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전화 적체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교환 시설의 부족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기계식 교환기로는 전화 가입자 회선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계식 교환기 대신 성능과 경제성이 우수한 전자 교환기 도입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2년 2월 경제장관간담회에서 `시분할 전전자교환기를 국내에서 개발할 때까지 전자교환기를 조기 도입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1977년 출범한 한국통신기술연구소(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전신)는 1978년 벨기에의 BTM사로부터 M10CN을, 미국 WEI사의 No.1A의 전자교환기를 도입해 전화 적체 현상을 다소나마 해결했다.
하지만 해외 교환기 도입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문제가 됐다. 앞으로 수천만 회선의 수요가 예상되는 교환기를 수입하려면 막대한 비용을 수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외국 기업들이 기술 이전을 회피해 자체 기술을 축적하기에도 어려웠다. 점차 교환기술의 국내 개발이 시급하다는 인식이 점차 확대됐다.
TDX 개발 계획은 1976년 2월 경제장관간담회에서 결정한 상태. 하지만 실제 예산이 투입된 국책사업으로 확정된 것은 1981년에 가서였다. '1982년부터 5년간 연인원 1300명, 총 240억원의 연구비로 TDX를 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 240억원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몇몇 선진국만 보유한 기술을 우리가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 있겠느냐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당시 기계식 교환기를 공급하던 외국계 기업들의 로비도 대단했다. 하지만 정부의 결단과 연구원들의 의지로 1981년 이 계획이 최종 확정됐다.
초기엔 생산업체들이 당장의 수익을 안겨주는 외국 교환기 조립 생산에 더 힘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체신부와 TDX 사업단이 금성, 삼성, 동양, 대우 등 생산 업체간의 경쟁을 유발시켜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교환기 개발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TDX 개발 가속화로 1984년 생산업체들이 만든 9600회선 용량의 상용 시험 모델이 제작돼 서대전전화국과 유성전화국에서 개통식을 가졌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0번째 전자교환기생산국가가 됐다.
한국형 전전자교환기의 첫 모델인 TDX-1은 1986년 4월 경기 가평 등 4개국에 2만4000회선을 개통하면서 상용화가 이루어졌다. 이 교환기는 농어촌 전화 현대화사업에 적용되면서 전국전화광역자동화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TDX-1 교환기는 이후 TDX-1A, TDX-1B, TDX-10으로 이어지면서 해외 시장에도 수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의 TDX개발로 세계 교환기값이 폭락, IT코리아의 서광이 이 때부터 시작됐음은 물론이다.
TDX 교환기의 수입 대체 효과는 1991년말 8000억원에 이르렀으며 1996년 한해 동안 4500여억원을 수출하기도 했다. 국산 교환기의 개발은 수입 대체 및 수출로 인한 금전적인 효과 이외에도 많은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은 TDX 개발로 급속도로 발전했으며 교환기의 대량공급으로 전화 요금 인하와 전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이같은 인프라는 향후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특히, TDX 개발로 얻어진 우리 자신의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은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기획취재팀
팀장=임윤규 정보미디어부장 yklim@
최경섭차장 kschoi@
강희종기자 mindle@
박지성기자 jspark@
< Copyrights ⓒ 디지털타임스 & d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81년 '전자산업육성방안' 한국 산업지도 바꿨다
- "TDX개발은 치밀한 전략 덕분"
- 원안위, 국내 최초 원전 고리 1호기 해체 승인… 원전 해체 시장 열렸다
- "선생님, 보험 안 돼도 로봇수술로 해주세요"…수술 로봇 수입 1년 새 57% 증가
- 트럼프, 이란과 핵협상 한다면서 무력충돌 가능성도 제기
- 하반기 산업기상도 반도체·디스플레이 `맑음`, 철강·자동차 `흐림`
- `6조 돌파`는 막아라… 5대은행, 대출조이기 총력전
- 여론 업은 李대통령, 대국민 직접 소통으로 국정 장악 가속화
- 27일 하루에만 견본주택 11개 오픈… "7월 전국서 역대급 아파트 분양 쏟아진다"
- 너도나도 상표권… 스테이블 코인시장 선점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