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최전선]작가가 말하는 내 소설 속의 폭력

2010. 7. 1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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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이렇게 끔찍한 것을 쓰느냐"는 것이었다. 사람을 망치로 때려죽이고, 죽인 남편의 성기를 절단하는가 하면 아들이 노모를 죽인다. 성폭력이나 구타 장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자살하는 여인도 수두룩하다. 나는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은 더 악랄하고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런 현실에 비하면 제 소설이 대체 뭐가 끔찍하단 말입니까!"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극적 전달을 위해 왜곡과 압축이 불가피하다. 사회의 부조리, 인간 운명의 처절함을 주로 인물들 간의 갈등으로 형상화한다. 갈등은 싸움이다. 싸움의 극명한 모습은 폭력이며, 폭력의 극단은 죽음이 된다. 소설에서 폭력을 드러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폭력에 노출된 인물들의 극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소설 속 인물이 망치를 휘두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절박함, 아이의 혀를 베어낼 수밖에 없던 운명의 치욕스러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삶의 처참함 같은 것들. 이런 삶의 공포를 유발한 끔찍한 현실의 폭력성 말이다.

나는 그 폭력에 반응하는 사람들, 대항하거나 순응하거나 적응하는 인물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나는 잘살고 있는지' '내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지'를 스스로 묻도록 유도하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어느 단편에서 "사회는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례한 결과가 나오는 곳이 아니"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꿈은 이뤄진다는 말이 허상인 곳, 희망은 늘 헛되게 마련이라는 좌절을 안기는 곳, 강자와 약자(가진 자와 없는 자)로 나뉘고 구분돼 융화되거나 섞이지 않는 곳, 폭력을 숨기는 것으로 폭력을 부추기는 곳, 이것들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되고 갈등은 결국 폭력이 되는 곳 등 이런 곳에서 '버젓이' 살아 있으니 폭력을 만나는 건 필연인 것이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다.

〈김이설〉

태초에 주먹이 있었다. 이빨이 있었다. 손톱과 발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

길고 가느다란 혀가 있었다. 가슴이 있었다. 둥근 엉덩이와 허벅지가 있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자, 검은 이빨로 혀를 물어뜯는 자, 손톱과 발톱으로 엉덩이와 허벅지를 할퀴는 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주먹에서 손가락 두 개를 빼든 자는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그는 두 개의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고, 목을 조르고, 질긴 내장을 가위질한다. 주먹에서 모든 손가락을 빼든 자는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다. 분노와 광기, 슬픔과 치기가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새어나간다. 손바닥을 활짝 펼치는 것은 정직하고 무방비하게 자신을 내보이는 순간이다)

주먹이 움켜쥔 것은 결핍과 공포다.

"그것들을 놓으시라. 손을 펴 따뜻한 손바닥으로 이 뺨을 쓰다듬으시라." 당신은 그렇게 말한다. 그를 회유한다.

"자, 더욱 더 주먹을 움켜쥐시라. 튀어나온 뼈로 하여금 저 말랑말랑하고 허약한 살들을 내리치시라. 으깨지고 피가 터진 얼굴을 보며 한 번 더 치시라. 그것이 바로 네 얼굴이다."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를 비웃는다. 거울 앞에 그를 세워두고 움켜쥔 주먹의 말로가 이런 것임을 똑똑히 보여 준다. 그러기 위해 그는 더욱 더 주먹을 움켜쥐어야만 한다. 더욱 더 세게 거울을 내리쳐야만 한다.

태초에 주먹이 있었다.

그것을 펴시라. 애원하는 당신과 달래는 당신과 부탁하는 당신, 활짝 편 손으로 주먹을 보듬어 안는 당신이 있다. 그리고 그 주먹을 한 번 더 내리치는 내가 있다. 어디 해 보시라, 너보다 더 큰 주먹을 쥐고 기다릴 테니 엄지를 숨기고 남은 것들을 말아 쥐시라. 해가 굼질거리며 땀을 쏟아 낯선 사내의 외투를 벗겼다면 나는 돌 섞인 태풍을 끌어와 사내를 산산조각으로 낼 것이다. 외투 단추와 사내의 눈동자를 구분할 수 없게끔 해 줄 것이다. 그러니 주먹을 쥐시라. 더 힘껏 치시라.

자, 그는 주먹을 쥐었는가 폈는가.

〈안보윤〉

폭력은 운명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반드시 미리 준비돼 있으며, 그러나 벌어지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따금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것은 이따금 폭력에 이른다. 하지만 왜? 거기엔 의미가 없다. 폭력은 의미가 삭제된 거대하고 과잉된 의지다. 그것은 하늘에 펼쳐진 무지개처럼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 운동은 그 끝에 도달할 때까지, 스스로를 태워 재에 이를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 운동 앞에서 모든 것은 평등해진다. 다시 말해 폭력은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한편 폭력은 변화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뭔가를 발생하게 하고, 뭔가를 멈추게 하거나 이동시킨다. 그것은 사건의 최초 발생 시간을 가리킨다. 사건의 최초 발생 장소를 지시한다. 글쓰기는 그 변화를 포착하는, 다시 말해 사건의 절대 순간을 포착해 그것을 누설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당신이 뭔가를 쓴다면 당신은 지금 비밀을 누설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말해져야 할 것은 비밀 이상이다. 글쓰기는 폭로 이상이 돼야 한다. 포착 지점에서 시작해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시작해 그 너머에 있는 유령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목소리에서 시작해 침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시작점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뭔가를 부수며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폭력은 우리가 속한 이 세계를 느슨하게 감싸고 있는 것의 이름이다. 그것은 석유 형태로 멕시코 만을 까맣게 덮고 있고, 폭탄 형태로 건물들을 부수고, 가족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것들 앞에서 내 소설을 적시고 있는 피의 양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그것들에 비해 내 소설은 평화롭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 것들 앞에서 내 소설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이지 그렇다.

〈김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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