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키 큰 소나무 부러지다

양진건
사랑이 그렇듯애초 숲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시작된다.일년생 풀이 들어오고, 뒤이어여러해살이 풀들이 일년생 풀들을 뒤덮고, 어느덧키 작은 나무가 들어와 여러해살이 풀들을 밀어내면한동안은 작은 나무가 우거진관목림의 천지.사랑도 온갖 시련을 거치듯그러나 관목의 시간도 오래가지는 못하고키 작은 나무 다음에 눈, 비로 소나무가 자라면서그 거친 세월을 보내다보면세상은 이제 온통 소나무 숲으로 변한다.아라동 제주대학교 안쪽의 소담한 소나무 숲도그렇게 만들어진 것일 텐데오후의 끝 무렵,그대와 몰래 그 숲에 들어설 때마다 마주하던곧고, 굵은 열주(列柱)들이여.하늘로만 향하던 상상력이여.그것을 두고 절정의 우리들 사랑 같다고그대와 나는 손가락 걸며 여러 번 단언했지만그러나 섬을 흔드는 태풍으로그 숲의 소나무마다 생채기를 마구 드러냈을 때문득, 내가 목격한 것은아, 우리들 사랑의 숨은 정체였다.
제주도에서 보내던 겨울이 생각납니다. 서귀포시 예래동 어느 집 이층을 빌렸지요. 아래층에는 한라봉을 재배하던 30대 동갑내기 부부가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고, 마당에는 야자나무가 한 주 서 있었어요. 거기 그런 나무가 서 있는 게 어찌나 비현실적이었는지요. 그렇게 위로 솟구치는 나무는 한반도에서는 좀 보기 힘든 것이니까. 하지만 이윽고 밤이 되어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또 그렇게 마구 흔들리는 나무도 처음 봤습니다. 그 나무는 어떻게 뽑히지 않고 그 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 사랑의 숨은 정체라는 건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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