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대본에 은퇴란 말은 없다

2010. 3. 2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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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칠순 헌정공연 하는 배우 이호재

47년간 150편 연극 연기…"신이여! 무대서 죽게 하소서"

이호재(70)씨는 현역 연극배우다. 올해 칠순이지만 서울 대학로와 집을 오가는 일정은 1963년 데뷔 이래 47년간 한결같다. 대학로에 나와서 연습하고 무대에 오르고 새벽까지 후배들과 대학로 술집을 지키다 귀가하는 일을 반복한다. "무대에 서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는 게 그의 변명이다.

평소에 그는 말수가 적고 무기력해 보인다. 공연이 없으면 평생 모은 돈으로 10여년 전 서울 명륜동에 마련한 25평짜리 다가구 주택이나 경북 영주 작업실에서 칩거한다. 하지만 공연 날짜가 잡히면 배우 본능이 되살아난다. 마치 평소엔 힘을 아껴뒀다가 먹잇감이 발견되면 힘을 쏟는 노련한 사냥꾼 같다.

"극장은 내 삶의 큰 부분입니다. 나는 무대에 섰을 때 비로소 존재감을 느낍니다."

그런 습관이 칠순인 그를 현역배우로 서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씨는 연극계에서 '대사의 달인'으로 통한다. 아무리 긴 대사도 순식간에 소화한 뒤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시절부터 오랜 벗인 연출가 오태석(70)씨는 "평소 그는 남이 살아가는 반 정도의 힘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대사를 암기하는 속도, 분석에 들이는 집요함, 기민한 움직임을 보면 평시의 게으름은 결코 천성이 아니다. 노력인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연극계의 내로라하는 호주가다. 후배 배우들은 각자 1병씩 소주를 시켜놓고 맥주잔에 자작으로 따라 마시는 '각 1병' 의식을 감내해야 한다. 지독한 말술이지만 결코 취하는 법이 없다. 술집은 또 하나의 연습실이고 무대다.

"술을 마시는 것은 그날 연극 연습의 연장입니다. 연습실에서 1차 연습을 하고 술자리에서는 2차 연습하는 거죠."

이씨는 1963년 남산드라마센터가 운영하던 연극아카데미(현 서울예전) 재학 당시 명동 국립극장에서 존 스타인벡 원작의 연극 <생쥐와 인간>으로 연극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뒤로 동랑레퍼토리극단과 국립극단의 배우 생활을 거친 뒤 극단 산울림, 극단 성좌, 현대극장 등과 작업하며 150편을 헤아리는 무대에 섰다.

비록 백발이 되었지만 열정은 젊은 배우 못지않다. 올해도 지난 1월 연극 <에이미>에 이어 4월9~25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박조열 극작의 <오장군의 발톱>(연출 이성열)에 출연한다. 6월에는 지인들과 후배 연극인들이 칠순 기념으로 헌정한 연극 <그대를 속일지라도>(연출 안경모) 무대에도 선다. 휘문고 후배인 극작가 이만희씨가 대본을 쓰고 전무송, 권병길, 윤소정, 송도순, 정규수씨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다. 김철리, 이성열, 위성신, 양정웅씨 등 기라성 같은 연출가들도 단역을 맡았다. 배우협회 등에서 백성희, 고설봉씨 등 원로 배우들의 칠순 때 헌정 공연을 마련한 적은 있었지만 현역 연극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은 처음이다.

"내가 그런 자격이 있다거나 업적이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헌정 공연에 기꺼이 출연해준 배우들과 동분서주한 극단 컬티즌의 정혜영 실장, 제 팬클럽 '빨간 소주' 회원들이 고마울 뿐이지요."

요즘 관객과 연극의 간극이 점점 멀어지는 까닭을 묻자 "연극하는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연극을 아끼고 좋아하는 무리가 있어요. 뮤지컬 등의 영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우리 연극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분장실 문을 나서면서 언젠가 그가 쓴 기도문이 떠올랐다. "신이여! …나를 기필코 무대에서 죽게 하소서. 나를 끝까지 무대에서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는 무대인이었다는 긍지를 한 줌의 흙이 될 때까지 갖게 하소서."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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