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을 가다] <7> 식민지 한국영화의 산실, 단성사

2010. 3. 15.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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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종로에 세워진 국내 最古극장흥행 귀재 박승필이 전성기 이끌며… 나운규 감독 지원 등 영화 산업 키워내1939년 日人손에… 해방후 이름 찾아…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 개봉하기도

서울 종로 3가 네거리의 영화관, 단성사.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한일 강제병합 3년 전인 1907년 지명근 등 한국인 3명의 발기로 설립됐으니 올해로 103년이 됐다.

그러나 지금 단성사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지상 9층, 지하 3층 건물로 다시 지어 10개 스크린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한 지 5년, 옛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위치와 이름만 그대로다. 예전, 특히 일제강점기 단성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1934년 개축 당시 쓰였던 빨간 벽돌 10여 장뿐이다. 당시 단성사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이 벽돌들은 5층과 7층 상영관 로비의 어두컴컴한 유리 진열장 안에, 그리고 9층 사무실 옆 골방 바닥에 놓여있다. 옛날 신문 잡지에 실린 기사와 광고가 그 시절 단성사를 말해 줄 뿐이다. 한국 현대사가 전쟁과 산업화 등을 겪으며 워낙 격변한 탓에 역사 자료를 제대로 보전하지 못한 것이 영화 분야만의 일은 아니지만, 착잡하다.

현재 단성사 건물에서 영화관으로 가는 통로는 어수선하다. 오른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귀금속 가게를 지나 상영관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 좁은 로비에 서서 천정을 올려다보면 둥근 반구형 벽화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단성사 운영자 박승필(1875?~1932)의 모습과 당시 단성사 건물이 그려져 있다. 박승필, 그는 오늘의 단성사가 있게 만든 주인공이다. 하지만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 천정을 올려다보는 이는 없다. 표지판 하나 없으니 거기 그림이 있는 줄도 대부분 모른다. 상영관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옆 벽화에도 한국 영화를 빛낸 많은 이들 가운데 그의 얼굴이 있지만, 그 또한 다들 그냥 지나친다.

일제강점기, 특히 박승필이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 운영한 1918년부터 1932년까지 단성사는 식민지 조선 영화의 중심이자 초기 한국영화의 산실이었다. 한국 영화의 효시로 꼽히는 '의리적 구토'(1919), 일제강점기 영화의 최대 히트작인 나운규의 '아리랑'(1924), 첫 발성영화 '춘향전'(1935)이 모두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의리적 구토'는 연극을 하다가 필요한 몇몇 장면을 영화 영상으로 처리하는 이른바 '연쇄극'의 첫 작품으로, 박승필이 제작비를 대서 만들었다. 이 영화가 개봉한 1919년 10월 27일은 '영화의 날'로 지정됐다. 나운규의 '아리랑' 이후 1930년대까지 무성영화 황금기의 영화는 전부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일제강점기 흥행의 귀재였던 박승필은 한국영화 초창기의 개척자다. 흥행사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08년 구극(판소리, 창극 등) 전용 극장 광무대 운영을 맡으면서부터다. 단성사도 주로 구극을 하던 곳이었는데, 그가 일본인으로부터 단성사 운영권을 인수한 1918년 개축해 그해 12월 재개관하면서 영화전용관으로 바뀌었다.

광무대와 단성사를 나란히 운영하면서 흥행의 실력자로 떠오른 그는 한국영화 제작과 지원에 나선다. 김도산 감독과 손잡고 '의리적 구토'에 이어 '시우정' '형사의 고심' 등 연쇄극을 잇달아 제작했고, 단성사 안에 촬영부를 설치해 '장화홍련전'(1924)을 만들었다. '장화홍련전'은 제작과 연기를 모두 한국인이 맡은 첫 영화다. 나운규가 1927년 나운규 프로덕션을 만들자 재정적 후원을 한 것도 그였다.

그가 단성사를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 경성고등연예관, 장안사, 연흥사 등 서울의 영화관은 전부 일본인 소유였다. 그는 당시 서울 종로의 황금관과 우미관이 양분하고 있던 조선인 관객을 단성사로 끌어들여 단성사 전성시대를 열었다. 1922년 조선인이 주로 드나드는 또다른 극장으로 조선극장이 문을 열었지만, 단성사의 절대 우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경영난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박승필 사후 7년 만인 1939년 일본인에게 넘어간다. 이름도 '대륙극장'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이듬해에야 본래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른다. 해방 후 단성사는 '역도산'(1965),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등 당대 최고 히트작들의 개봉관으로서 빛나는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 이 극장의 영화는 거의 사라졌다.

단성사와 더불어 1910~20년대 조선인들이 들락거리던 종로의 다른 두 극장, 우미관과 조선극장도 지금은 터만 남았다. 우미관 터는 종로2가 맥도널드 옆 골목, 삼겹살집 앞에 표지석이 서 있다. 옆 건물에 들어선, 하루 숙박비 2만원 받는 여관 '우미관 호텔'만이 이 자리와 이름을 기억할 뿐,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은 표지석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조선극장 터는 탑골공원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길목의 소공원, 인사문화마당의 대나무 숲 앞에 표지석을 박아 놨다.

현재 종로 1~4가에는 단성사를 비롯해 단성사 맞은편 피카디리, 시네코아, 서울극장, 허리우드클래식 등의 영화관이 있다. 낡은 극장 허리우드클래식 말고는 전부 멀티플렉스 극장이다. 우리에게 100년 전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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