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발에 꼭 맞는 토슈즈 만들고 싶다"
해외활동 무용수에 낡은 신발 얻어 해부하며 독학…
현재 발레계 지도자들 대부분 그의 슈즈 신고 최고로 도약 '뿌듯'
사람들은 '발레'라는 단어와 함께 요정의 날개옷 같은 튀튀(tutuㆍ흰색 레이스로 된 종 모양의 치마), 그리고 '토슈즈(Toe shoes)'를 떠올린다.
발레리나가 '토슈즈' 혹은 '푸앵트 슈즈(Pointe shoes)'를 신고 발끝으로 우아하게 회전하는 모습은 발레뿐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환상을 한껏 자극한다. 오죽하면 발레리나가 아닌 여성들조차 토슈즈의 모양을 흉내 낸 일명 '발레리나 슈즈'를 열심히 사서 신고 다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환상에 비해 현실은 초라하다. 발레 인구가 워낙 적고 발레용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국내에서 '진짜 토슈즈'를 만드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한국 발레리나들의 발에 꼭 맞는 '토슈즈'를 만들어 보겠다며 30여년째 신발을 짓고 있는 '국내 유일의 토슈즈 메이커' 이완영(63) 씨를 만나 '토슈즈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내 1세대 발레리나, 전부 내가 만든 신발 신고 춤춰
그가 일하는 곳은 서울 종로2가에 위치한 무용용품 전문업체 '미투리'. 이곳에서 지난 1972년부터 줄곧 '토슈즈'를 비롯한 발레 슈즈와 각종 무용 신발을 만들어왔다. 방학인데도 가게에는 머리를 올려 묶은 무용 전공 학생들이 쉴 새 없이 들락날락했다.
발레리나가 신는 '토슈즈'를 취급하는 곳이라니 막연히 화려할 거라고 상상했는데 가게는 의외로 소박했다. 이씨는 이곳에서 직원 한 명과 함께 100% 수작업으로 하루 20~30켤레씩 연간 6000~9000켤레의 토슈즈를 생산하고 판매해왔다. 30여년간 만든 토슈즈만 해도 어림잡아 18만~20만켤레는 될 듯하다.
요즘은 수입 토슈즈가 인기를 끌다 보니 국산 판매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아직도 발레를 처음 시작하는 어린 학생들은 대부분 그가 만든 국산 토슈즈를 신고 발레리나의 꿈을 키운다.
"80년대 중반부터 약 15년 동안은 국립발레단을 비롯한 여러 발레단에 정기적으로 납품했어요. 그때는 외국 제품이 수입되기 전이라 다들 우리 것을 신었죠. 전국을 다 커버할 정도였으니까요. 봄에 콩쿠르 시즌이 시작되면 물량이 모자라서 난리였어요."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국내 유일의 토슈즈 메이커였다. 그가 일하는 '미투리'보다 먼저 인사동에 '백조'라는 토슈즈업체가 있었지만 곧 문을 닫았고, 이후 크고 작은 업체가 잠깐씩 생겼다가 사라져갔다.
"60년대까지 스포츠화를 만들다가 주변에 발레 슈즈 수요가 있기에 무턱대고 전환한 게 시작이었죠. 아무런 기술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당장 토슈즈는 만들어야겠는데 유럽에서 200여년 동안 발전시켜온 토슈즈 제작기술을 단번에 전수받을 길이 없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로부터 닳아빠진 토슈즈를 얻어다가 해부해가며 독학으로 제작법을 익혔다.
처음에는 겉모양만 따라했다. 두꺼운 광목에 아교를 발라 예닐곱 겹씩 포개서 토슈즈의 앞 코를 만들고 공단(새틴)으로 전체적인 모양을 지었다. 바느질도 눈에 보이는 대로 똑같이 따라했다. 그렇게 완성된 시제품을 들고 한국 남자 발레의 대부인 임성남 선생을 찾아가 자문하고 학생들에게 신겨보기도 했다.
"첫 작품을 서울예고 학생에게 신겼는데, 일어서다가 '아이코' 하면서 주저앉더니 토슈즈를 내동댕이치더라고요."
앞 코가 너무 딱딱한 게 문제였다. 토슈즈의 외부를 감싸는 공단이 신발용이 아닌 의류용이라 강도가 약한 것도 흠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맨땅에 헤딩하기'에도 요령이 생겼다. 그는 우리보다 토슈즈 제작기술이 그나마 나은 일본에서 접착제를 수입해 쓰다가, 나중엔 직접 전용 풀을 개발했다. 공단도 적정한 혼방 비율을 찾아 주문해다 썼다.
늘 그를 따라다니는 고민은 '앞 코가 너무 딱딱해 무용수들의 발톱이 빠지지 않을까' '바닥의 가죽이 부드럽지 않아 힘으로 밀어 신다가 종아리에 알통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고민만큼 숱하게 토슈즈의 디자인과 소재를 바꿔가며 지금에 이르렀다.

▶언젠가 남부럽지 않은 국산 토슈즈 만들 것
2000년대 이후 수입품의 수요가 늘고 IMF 이후 발레를 배우는 인구도 줄었지만 그의 자부심은 여전하다. 현재 우리나라 발레계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그의 토슈즈를 신고 최고 무용수로 도약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국립발레단의 김학자, 강숙현 씨. 세종대 무용과 장선희 교수, 동아대 무용과 김복선 교수 등이 제 단골고객이었어요. 그들이 스승이 돼 학생을 키워내고 있는 걸 보면 저도 덩달아 보람이 생기죠."
이제 그의 나이도 환갑을 넘겨 다음 세대에게 토슈즈 제작법을 전수해야 할 때다. 그러나 젊은 사람 중에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이가 거의 없어 걱정이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힘든 일이라 그런가 봐요. 이러다간 국산 토슈즈도 없어질 텐데."
지금도 발레 공연을 보면 자꾸만 토슈즈에만 눈이 간다는 이씨. 그의 소망은 언젠가 세계 최고 수준의 국산 토슈즈를 생산하는 것이다. 외국 제품을 수입해다 쓰면 당장은 편리하지만, 저렴하고 품질 좋은 국산 제품을 만들어야 더 많은 이가 발레를 가까이 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서양인들과 다른 한국인들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망도 있다.
"젊어서는 의욕이 대단했는데 사실은 나이 먹으면서 점점 수그러들어요. 딱히 고급 기술을 전수받아올 곳도 없고, 저랑 같이 토슈즈를 만들 사람도 없다 보니까요. 한 번은 누군가 미국의 유명한 토슈즈업체 '카페지오'를 견학시켜 준다고 해서 부리나케 쫓아갔는데, 막상 갔더니 정식 초청이 아니라서 제작 과정은 보여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본사 건물만 구경하고 왔죠."
이씨는 아직도 토슈즈 제작기술을 배우러 유학을 떠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토슈즈를 만드는 나라가 세계에서 몇 곳 안 돼요. 아시아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 정도인데, 그나마 일본이 좀 나은 편이지만 서양에 비하면 한참 뒤처져 있죠. 중국제는 값은 싼데 품질이 떨어져요. 제 소망은 한국에서 남부럽지 않은 토슈즈를 한 번 만들어보는 거예요."
김소민 기자/som@heraldm.com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m.com토슈즈는…발레리나들의 상징 발등이 연출하는 아치 아름다움의 극치

토슈즈의 등장은 19세기 낭만주의 발레의 부흥과 맥락을 같이한다.17세기 전문 직업무용수가 생겨난 이후 발레는 기교적으로 급격히 발전한다. 18세기 말엽부터 실험적인 무대를 중심으로 발 끝으로 서는 '푸앵트' 기법이 사용되고, 이를 위해 발에 꽉 끼는 신발도 등장했다. 하지만 '푸앵트'를 개발한 초창기 이탈리아 무용수들은 이 기술을 단순히 곡예적인 기술로 활용하는 데에 그쳤다.
'푸앵트'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리고 발레의 주류로 자리 잡게 한 것은 1823년 필리포 탈리오니가 안무한 '라 실피드(La Sylphide)'였다. 탈리오니는 이 작품에서 딸인 마리 탈리오니를 '실피드' 역으로 출연시켰는데, 요정이 날아다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종(鐘) 모양의 하늘하늘한 흰색 드레스를 입혀 발 끝으로 춤추게 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발 끝으로 서서 춤추는 가냘픈 여 주인공은 이때부터 '발레의 표준'이 됐다. 더불어 모든 여성 무용수가 무대 위에서 토슈즈(푸앵트 슈즈)를 신게 됐다. 이 스타일은 '발레 블랑(Ballet Blancㆍ백색 발레)'이라 불리며 이후 여러 작품에서 변주됐다.
무용수가 처음 토슈즈를 신는 나이는 11~12세 무렵이다. 발레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나이는 보통 10세 전후이고, 발레를 배운 지 2년가량이 지나 몸에 근력이 생기면 그때부터 토슈즈를 신기 때문이다.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의 정정화 부원장은 "무리하게 일찍 토슈즈를 신으면 관절에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발달 정도에 따라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며 "토슈즈를 신으면 발등으로 아치를 만들어 아름다운 동작을 연출할 수 있고, 테크닉을 구사하기도 쉬워진다"고 설명했다.
국내 정상급 무용수들은 200여년 전부터 토슈즈 제작기술을 축적해온 유럽 제품을 선호한다. 영국의 '프리드', 프랑스의 '레페토' 등이 최고급 브랜드로 손꼽히지만 켤레당 10만원에 육박하는 높은 가격 때문에 국내에는 사용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에서는 가격 대비해 품질이 우수한 켤레당 4만~5만원 선의 러시아의 '그리시코', 호주의 '블럭' 등을 연습용으로 공급하고 있다.
김소민 기자/som@heraldm.com[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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