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아이즈]전준엽의 미술산책-구모경 '도시 향한 상상력'

윤시내 2009. 7. 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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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전준엽(화가) = 예술 작품은 현실적인 효용성이 없다. 예를 들어 캔버스 위에 유채 물감으로 실제와 똑같이 그린 사과가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감탄을 한다. 진짜 사과 같다고.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하고 신선한 과즙이 입 안에 가득 찰 것 같은 사과가 눈 앞에 있지만 먹지는 못한다. 그림 속에 있는 사과이기 때문이다. 이 사과는 천 위에 여러 겹의 유채 물감이 덥힌 물질일 뿐이다.

그런데 먹을 수도 없는 사과를 보고 사람들은 반하고 만다. 진짜 사과보다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르고 사기도 한다. 왜 그럴까. 현실적 효용성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신선한 사과를 가질 수 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 많은 물고기와 만날 수도 있고, 지구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또 사람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도 있으며, 시간 여행을 하거나 심지어 하나님과도 만날 수 있다.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상상력이다. 이것은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온 근본적인 힘이었다. 지금은 상상력이 가장 잘 구현되는 장르로 영화가 꼽히지만, 예전에는 회화가 이를 이끌어 왔다. 이런 상상력의 소산이 예술 작품이다. 엉뚱한 상상력이 반짝이는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구모경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세계가 그런 경우다.

도시에서 감수성을 쌓아온 작가가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상상의 세계는 다소 치기 어린 듯 보인다. '이 도시가 숲이라면 어떨까'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모경은 자신의 화면 속에다 자작나무 숲을 만들어 놓았다. 자신이 사는 도시를 배경 삼아. 매일 마주치는 거리 풍경이 자작나무 숲으로 보인다면 얼마나 신선할까 하고.

"언젠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설경을 보았을 때,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됐습니다. 눈을 함빡 뒤집어쓴 도시의 전신주들이 어느 순간 자작나무처럼 보였습니다. 줄지어 서있는 전신주는 자작나무 숲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설경 속 도심을 걷다 보면 상상하게끔 되는 발상이다. 특히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검은 색에 가까운 속살의 대비는 풍경을 다루는 화가라면 한 번쯤은 그려보고 싶은 매력적인 소재다. 소담스레 내리던 눈이 그친 도심의 전신주에서 작가가 발견한 것이 바로 자작나무 자태였던 것이다. 도심의 매연에 그슬려 검정에 가까운 회색으로 변해버린 전신주 기둥에 쌓인 하얀 눈은 자작나무의 환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먹의 성질 활용한 솜씨 돋보여그러면 전신주가 자작나무로 변해버린 도심으로 들어가 보자.'그 순간'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이다. 작가가 꼭 기억하고 싶은 한 순간, 즉 의미 있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함박눈 맞은 전신주가 자작나무로 보였던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실제 현장을 보고 그린 것은 아니다. 순간적인 발상에 기초해서 작가가 재구성한 풍경이다. 그러니까 작가 마음 속 풍경인 셈이다.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풍경이기 때문이다. 전통 회화를 전공한 작가는 먹과 붉은 색만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먹의 성질을 응용한 솜씨가 돋보인다. 옅은 먹으로는 하늘과 원경의 건물을 그려서 공간의 깊이를 멋지게 연출했다.

도보와 담장으로 보이는 부분에서는 추상적 분위기가 엿보인다. 붉은 물감을 칠하고, 화선지 조각을 붙여놓았다. 화면 가운데 주차해놓은 자동차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는데, 바탕에는 짙은 먹을 칠했다. 얇은 화선지를 뚫고 바탕의 색채가 스며 나오기 때문에 평면적이지만 깊이감이 보인다. 배경의 서정적 분위기가 감도는 평범한 도시 풍경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요소다. 그런데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자작나무 덕분이다.

도로변에 서있는 전신주가 눈을 맞고 자작나무로 변해버린 현장인 것이다. 먹과 장지의 흰색 여백을 이용하여 그려낸 이 나무들은 추상적 요소와 구상적 요소를 함께 갖고 있다. 기둥처럼 정직한 형태와 입체감 보여주는 전체 윤곽에서는 구상적 분위기가 풍긴다. 그런데 나무 껍질과 속살의 대비를 나타낸 부분은 추상적 느낌이 짙다. 자작나무의 매력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구모경도 이런 매력에 이끌려 자작나무를 상상했을 것이다.

작가가 자작나무에서 찾아낸 추상성과 구상성의 조합은 이 작품의 전체 분위기를 이끄는 요소다. 따라서 전통회화 기법과 재료 만으로 그려냈지만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또한 도심의 보통 풍경을 소재로 삼았지만 평범한 풍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39호(7월27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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