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하)


'종파분자'로 몰려 초라한 말년
"책임지도원 동무이십니까?""네, 그렇습니다만…"키는 중키이고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대머리 할아범이었다."나는 김두봉이라고 합니다."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김두봉 약력 줄임) 나는 이내 차분해져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소문과는 달리 그는 탐욕스럽게 생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맘씨 순한 시골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 내 아내는 평생 밥두 못 짓구 곱게만 지내다가 갑자기 농사두 하구 살림살이를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지금 치마끈두 바로 매지 못할 지경입니다. … 지도원 동무… 제발 목장 안에 있는 유치원 교양원이라도 자리가 있으면 배치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목이 메어 애원하듯이 말하는 그는 실주름 그어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가련하기까지 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가 태항산을 찌렁찌렁 호령하며 내달리던 연안파 호랑이였다는 사실, 국민군이 김두봉이라면 벌벌 떨었다는 사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위원장(국회의장)이었다는 사실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조선독립동맹' 결성한 연안파 우두머리
남파공작원 김진계 증언이다. 조선로동당 평남도당 농업부 책임지도원으로 일하던 1962년이었다. 그러니까 김두봉이 1958년 3월 '종파분자'로 꼬집혀 평안남도 맹산목장에서 '노동개조'를 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김진계가 들었다는 소문이다. "그는 맹산목장에서 일하는 사기꾼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돈과 양복을 뇌물로 바치고 잘 봐달라고 했다가 아까운 돈과 양복만 날렸다는 둥 벼라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김진계 증언은 이어진다.
가련한 늙은이의 몰상을 바라보는 순간, 죄야 김두봉에게 있지 젊은 아내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싶어 동정심이 솟아났다. 마침 그의 아내가 와서 인사를 했는데, 과연 소문대로 서른서넛 정도로 보이는 미인으로 팔십 고령의 김두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애절하게 호소했다.
"책임지도원 동무, 내레 생전에 농사일이라구는 해본 일두 없구서리 배운 거라구는 글밖에 없슴네다. 기러구설라무네 제발 유치원 교양원으루 배치시켜 주셨으면 뎡말 감사하겠슴네다."하지만 자꾸 매달려 간청하는 그녀에게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간부 인사를 배치하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인사배치권은 군당책임비서에게 있으니까, 그분에게 말씀드려보죠.""꼭 좀 부탁합네다."그녀는 머리를 연신 굽신거렸다. 은근히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러마고 약속한 나는 며칠 후 당책임비서에게 김두봉의 처를 목장유치원 교양원으로 쓰면 어떻겠냐고 상의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후에 들었는데, 김두봉의 처는 다행히 목장 유치원 교양원으로 배치되어 열심히 아동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두봉은 연안파 우두머리였다. 연안파에서 세운 정치모임인 '조선독립동맹'이 머릿골이고, 손발인 군사조직이 '조선의용군'이다. 1945년 12월 씌여진 < 해방전후의 조선진장 > 에 나오는 각 정당 및 정치단체 가운데 '연안조선독립동맹' 편이다.
이 단체는 1942년 1월에 국제정세에 호흥하여 화북조선청년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동방약소민족대동맹 산하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 단체인데, 연안정권 지원 하에서 지금까지 꾸준한 항일전을 계속하여 많은 무훈을 세워왔다. 그리고 의용군의 총사령 김무정(金武亭) 장군은 전형적 무인으로서 많은 청년들을 훈육해서 그의 인솔한 휘하 정예 부대는 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바이며, 동 장군은 부사령인 박효삼(朴孝三)(참모), 박일우(朴一禹)(정치)씨와 아울러 그 무명(武名)이 화북과 동북 일대에 떨치고 있다 한다.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 부주석 한빈(韓斌)·최창익(崔昌益), 기타 제씨가 근근(近近) 귀국케 된다는데, 기(其) 일부 요인은 11월 20일경에 평양에 도착되어 김일성 장군과 회담하여 의견교환 중이라고 한다.
조선로동당 정치국원 5명 중 한명
해방공간 평양에서 움직였던 정치두럭은 5개 동아리였다. 소련파, 연안파, 빨치산파, 국내파, 남로당파. 출신성분에 따른 계급적 처지나 정치적·사상적 생각이 다름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니라 동아리 성원들이 해방 전 움직이던 바닥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5개 동아리 가운데 가장 떨치는 힘이 좋았던 것은 연안파와 소련파였다.
해방 3일 만인 1945년 8월 18일 현준혁(玄俊赫, 1904~ 1945), 김용범(金龍範, 1902~?), 장시우(張時雨, 1891~?), 이주관, 최경덕(1908~?), 장종식 같은 이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회를 얽으면서 박헌영 당중앙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9월 28일 조공 평남도책이었던 현준혁이 암살되고 조선민주당을 세웠던 조만식(曹晩植, 1882~?)이 묶이면서 무너졌다. 남로당파는 스탈린 뒷받침을 받는 김일성이 46년 1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면서 힘이 빠져버렸다. 러시아 출신 조선인 혁명가들로 뭉쳐진 소련파는 처음 힘을 떨쳤으나 이론가보다 빨치산 출신을 좋아하는 스탈린 속마음이 드러나면서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으니, 남은 것은 연안파와 빨치산파로 불리던 갑산파이다. 동만 항일빨치산들이 벌인 항일유격투쟁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이 보천보습격투쟁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사북으로 한 빨치산파를 갑산파(甲山派)라고도 불렀다.
46년 8월 북조선신민당이 북조선로동당에 빨려들어가면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이었던 무정이 50년 끝 무렵 중국으로 망명하고, 독립동맹 부주석과 신민당 부위원장이었던 한빈·최창익이 57년, 김두봉이 58년 '종파주의자'로 몰려 숙청당한다. 그리고 연안파는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까지 올라갔던 최창익이 거칠게 앙버티었으나 흐름새를 돌릴 수는 없었다.
6·25 바로 앞 북조선 최고권력인 조선로동당 정치국원은 5명이었다.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 김책, 김두봉. 그 가운데 독공부로 조선말사전을 엮어낸 김두봉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받는 우러름은 대단한 것이었다. 연설이나 담화 때 하는 목소리가 차분하고 느릿해서 사람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따뜻한 기품의 인물이었다. 6·25때 인민군 중좌로 내려왔던 팔로군 출신 군인이 있었다. 전라도 원통산·회문산·운장산·지리산 지구에서 기운차게 움직였던 '외팔이부대' 부대장 한팔(韓八)이 전하는 김두봉 소식이다.
'해방전쟁'이라 울먹이며 독려
"…그동안 공화국에서는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그러나 1948년의 남북협상이 실패해버렸고, 결국 우리와 함께 남조선 인민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5·10선거와 단독정부가 수립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에 대항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1950년 6월 23일. 인민군 제6사단 13연대는 개성 송악산 주능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14연대는 송악산 우측, 15연대는 옹진반도에 있었다. 다른 군부대도 모두 38선 주변으로 전진배치되어 있었다."조국에 복무하겠습니다."한팔 중좌가 아내에게 거수경례를 하였을 때 빙긋 웃음을 지어보이던 새각시짜리는 이내 슬픈 얼굴로 바뀌는 것이었다. 한팔 중좌는 다시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거수경례를 하였다."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송악산 우금에 천막으로 만들어진 임시 회의장이었다. 대대장급 위 군관들이 모여 있었다. 김두봉은 그때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였는데, 시국 이야기가 끝날 때쯤 눈물을 흘리기 비롯하였고, 군관들은 영문을 모른 채 김두봉을 바라보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두봉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동안의 노력과 더불어 6월 7일에는 민주주의전선에서 특사를 보내 조선 전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를 주장했었고, 해방 5주년 기념식을 서울에서 개최하자는 등, 조선최고입법기관 구성에 따른 총선 실시,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필요한 조건, 총선을 지도할 중앙선거지도위원회 구성을 제의하는 호소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그들까지 체포해버렸습니다. 6월 14일에는 다시금 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가 남조선의 2대국회와의 합작제의를 하였으나 거부되어버렸습니다. 그 모든 것은 미제와 남조선 친일파 반동분자들의 책동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동포를 해방시켜야만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어느 외국도 우리를 간섭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 군관 동무들은 해방전쟁의 본분을 망각하지 마시고 맡은 임무에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1948년 이른바 '4김회담' 때 일이다.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빠져나가면 두 사람을 '미제 간첩'으로 몰아붙인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구가 기자들에게 "나를 5월 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김구가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암살당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김두봉 또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특별 감시하라고 한 것이 48년 4월부터라고 한다. 48년 4월 17일치 '레베데프 비망록'에 나오는 적바림이다. 평양에 있던 소련군정 첩보망이 남조선까지 뻗쳐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놀라운 일이다. 몇 년 뒤 박헌영과 이승엽을 머리로 한 남로당 출신 사람들을 '미제 간첩'으로 몰아붙이는 '시나리오'는 그때부터 이미 짜여졌던 것이다.
<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 에 보면 김두봉이 저세상으로 간 것이 1961년으로 되어 있는데, 남파공작원 출신 김진계 증언에 따르면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62년까지는 살아 있었다. 얼마를 더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것은 이미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나마 '미제 간첩'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이빨도 발톱도 죄 뽑힌 채로 집짐승이나 돌보는 '태항산 호랑이'였다.
|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 만다라 > 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 집 > < 길 > < 국수 >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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