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만한 펜, 라미 사파리 만년필

2008. 10. 27. 16: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쇼핑저널 버즈] 의심할 여지없는 디지털 만능의 시대.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 역시 펜이라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을 대표하는 PC 입력장치, 키보드로 바뀌었다. 하다못해 이제는 카드 결제조차 터치스크린 위에 스타일러스 펜으로 서명하는 경우도 많을 만큼 디지털 만연의 시대지만 펜이 가지고 있는 효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정 업무의 전체적 아웃라인을 잡을 때 타인에게 메모를 전할 때는 물론 디지털이 틈입할 수 없는 순간과 상황에서도 그렇다.

기록하고 메모하는 습관을 갖고 있어 BIC의 0.7mm 수성 펜과 썼던 내용을 깔끔하게 지울 수 있는 파일럿 프릭시온 펜을 쓰기도 하며 0.5mm 펜탈 샤프를 사용하기도 한다. 주머니에는 언제나 다이어리 작성용인 라미 피코가 들어있다. 사실 수 십,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필기구는 언감생심이지만 나름 필기구에 대한 욕심이 있으니 소설가 김훈 선생처럼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작가까지는 아니어도 그럴듯한 펜 한 자루 정도는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미 로트링의 아트펜을 사용하지만 이 펜은 '요즘 같은 시대'의 필기용으로서는 실격이다. 펜의 필기감과 같은 본질적 요소 때문이라기보다 모양 때문인데 일단 아트펜은 뚜껑을 펜 뒤에 꽂을 수 없다. 사실 이렇게만 해두어도 펜은 쉽게 굴러다니지 않지만 뚜껑과 펜의 본체가 분리된 아트펜은 책상 위에서 잘 굴러다닌다. 책상 위에서 펜이 잘 굴러다니는 것은 대형 참사의 단초가 된다. 이런 종류의 펜은 키보드나 마우스를 잡고 있는 시간보다 펜을 더 오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

그래서 최근 라미의 사파리 만년필을 구매했다. 이 물건은 원래 4만 원 가량이지만 지인을 통해 12,000의 저렴한 가격에 구매한 것. 원래 유광 화이트 색상은 2007년 스페셜 에디션이다. 라미 사파리는 해마다 스페셜 에디션 컬러 제품이 나오는데 2006년에는 파스텔 블루, 2008년은 라임 컬러다. 적은 수량을 찍어낸 한정판 개념의 리미티드 에디션은 아니지만 이미 파스텔 블루와 화이트 컬러는 일반 매장에서는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 되었다.

라미 사파리의 디자인은 일반적인 만년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보통 만년필은 둥그런 형태의 몸통과 뚜껑을 갖고 있지만 라미 사파리 몸통은 둥근 형태와 사각형이 섞여있는데 이는 단순한 디자인 요소가 아니라 둥근 형태의 펜이 가질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책상 위에 둬도 혼자 굴러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펜촉을 가지고 있는 만년필에서는 중요한 것이다.

사실 고가의 만년필들이 이런 디자인적 요소를 갖추지 않은 것은 아마 할리 데이비슨의 자존심(혹은 오만함)과 비슷한 것이다. 최신 레플리카와 스쿠터조차 모두 다 가지고 있는 안전장치 - 기어가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 - 에 대해 할리 데이비슨은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이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얘야. 이것은 장난감이 아니란다'란 의미의 무덤덤한 전언일 수도 있겠다.

고가의 만년필 역시 제대로 사용 못하고 책상 위에서 굴려먹는 사람들을 위한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배려는 아름다운 것 아닌가. 그것이 감동과 찬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또한 만년필은 잉크 리필이 필수적이지만 잉크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몸체를 돌리고 열어 내부를 봐야 한다. 라미 사파리는 몸통에 2개의 구멍이 두었고 이를 통해 잉크 잔량을 항상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 순간에 잉크가 없어 필기를 못하거나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못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잉크는 기본적인 컨버터(압력으로 잉크를 빨아들이는 장치)와 전용 카트리지를 사용할 수 있다. 펜의 그립은 엄지와 검지로 잡는 부분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다. 이 부분의 형상이 매우 적당해 장시간 필기를 해도 손이 아프지 않다.

뚜껑은 심플한 형태의 클립이 붙어있고 상단은 십자(+) 형태의 마무리로 디자인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사실 만년필은 사용자가 반복적으로 쓰면서 길을 들이는 것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의 필기습관에 꼭 맞는 전용 펜으로 변모한다. 다행히 1차 구매자는 이 펜을 몇 번 사용하지 않아 전혀 길이 들지 않은 상태였다. EF촉은 가장 얇은 촉으로 메이커마다 잉크가 나오는 두께에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제품의 EF촉은 대략 0.5mm 의 굵기로 잉크가 나오며 F촉은 0.6~7mm 정도다.

제조사의 특성에 따라 살짝 종이가 긁히면서 약간은 빡빡하게 써지는 필기 감의 제품도 있고 거친 종이에서도 부드럽게 써지는 제품이 있다. 라미 사파리는 이 스펙트럼 중에서 약간은 후자에 가깝다. 매끈한 종이(몰스킨, 로디아의 메모패드나 미도리 노트와 같은)는 당연히 그렇고 약간 거친 표면의 종이에서도 그렇다. 촉의 재질은 스틸로 금(gold)촉에 비해 필기감이 우수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 가격에 금촉을 바란다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필기감은 가격대를 떠나 생각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물론 워터맨이나 몽블랑의 만년필 사용자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다. 4만 원짜리 만년필이 기십, 기백만 원짜리 만년필과 같을 수 없는 것은 4만 원짜리 이어폰이 기백만 원 이상의 음향 시스템과 같을 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분명한 것은 필기감은 음질과 비슷해 개인의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약간은 날이 선 거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물 흐르듯 부드러운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공통적인 평가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도 있으니 바로 '가격대 성능비'다. 라미 사파리는 워터맨이나 몽블랑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도 '이 펜은 쓰레기야'라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만족스럽다.

디지털 기기 전문 블로그인 뿜뿌 인사이드(bikblog.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는 고진우씨는 얼리어답터( www.earlyadopter.co.kr)의 콘텐츠 팀장을 맡고 있다.

다소 장황하게 라미 사파리를 리뷰 했다. 앞으로 내가 열심히 쓸 이 펜을 다른 사람이 쓸 때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스펙, 편의성 등 모든 면에서 디지털에 상대가 되지 못하는 아날로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길이 든다는 것. 그것은 사람간의 사랑을 닮았다. 그리고 이는 디지털로는 절대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 언젠가 디지털은 이런 영역까지 '복사'하게 되겠지만 아직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지나친 디지털 만연에 대한 안식이다.

[ 관련기사 ]▶ 아이에스브이, 만년필형 펜앤마우스 출시디지털 펜, 프리샛 듀오 랩톱 펜세련된 디자인이 매력적인 만년필, LAMY 조이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Re싱크 펜케이스

고진우 버즈리포터(http://bikblog.egloos.com/)

'IT 제품의 모든것'-Copyright ⓒ ebuzz.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전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