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J의 NBA 이야기] '라이벌' 매직 존슨 대 래리 버드

한준희 NBA 칼럼니스트 2008. 6. 20. 11:3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매직 존슨 대 래리 버드.

러셀 대 체임벌린 이후로 NBA 역사에 이런 라이벌은 또 없었습니다. 서로 포지션이 달라서 맞붙어 수비하거나 몸싸움을 벌인 일은 많지 않았지만, 대학 시절부터 시작된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프로에서도 리그의 양대산맥이었던 보스턴 셀틱스와 LA 레이커스로 입단이 결정되면서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치열한 라이벌로 계속 발전되어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컨퍼런스가 달랐던 관계로, 이 둘은 12 시즌에 걸쳐서 37번 밖에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둘 간의 대결은, 대학 파이널에서 매직 존슨이 승리했고, 프로의 정규시즌 대결에서 11승 7패, 세 번에 걸친 파이널에서도 11승 8패로 매직 존슨이 약간의 우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기는 혈전이었고 사투였습니다. 매직 존슨이 은퇴를 한 후, 이러한 회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프로선수들은 큰 경기를 앞두고 2-3일 정도는 잠을 설칩니다. 저의 농구인생을 통틀어 제가 잠을 설친 경기는 몇 안 됩니다. 1979년 대학농구 결승전, 그리고 프로에 들어온 후, 버드의 셀틱스와의 일전들이 바로 그 몇 안 되는 경기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저의 아버지를 제외하면, 제가 제일 두려워하고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래리 버드였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버드도 매직에 대해 이와 비슷한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도 이 둘의 등장은 다른 메이저 스포츠에 밀려 쇠퇴해가던 NBA 리그의 인기를 증폭시켰으며, 이 둘에 의해 다시 되살아난 셀틱스 대 레이커스의 라이벌전은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농구의 인기를 몇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까지 해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줄리어스 어빙 혼자서 근근히 이끌어 온 리그의 불씨를 매직과 버드, 이 둘이서 완전히 살려냈고, 이 둘이 살려낸 리그에 기름을 부은 것이 마이클 조던이라고…

이 둘의 라이벌전은 1979년 NCAA 파이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버드가 이끄는 인디애나 주립대와 매직 존슨이 이끈 미시간 주립대와의 결승. 많은 농구팬들은 버드와 매직이 같은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들어온 것으로 알고 계시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버드는 셀틱스에 의해 1978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6번으로 이미 드래프트가 되어 있던 선수였고, 매직은 1년 후인 1979년 드래프트를 통해서 NBA에 들어 왔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1979년에 버드는 이미 대학 5년생이었다는 것이죠. 1975년에 인디애나 대학에 진학했지만, 시골 촌놈인 버드는 이런 대형 캠퍼스가 생리에 맞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퇴를 하고 1년이 지난 후에 비교적 작은 인디애나 주립대에 재입학했던 것입니다.

대학 시절 내내 센터를 보며 리바운드, 패싱, 외곽슛까지 못하는 것이 없었던 버드는 1979년 시즌에 소속대학팀을 33승 무패라는 놀라운 전적으로 이끌며 결승전에 안착시켰습니다. 그는 동시즌 대학농구 MVP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미시간 주립대는 시즌 내내 조금씩 삐걱거렸으나, 시즌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강해지는 모습을 보였고, 특히 2년생 스윙맨 매직 존슨은 뛰어난 운동능력과 사이즈를 앞세워 상대팀 수비를 홀로 무장해체시키며 팀을 결승전까지 이끌었습니다. 전미 대륙의 관심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기록으로 남아있는 24.1%의 TV 시청률을 끌어낸 1979년 대학농구 결승전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전력면에서 우세한 버드의 인디애나 주립대가 우승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전력에서는 뒤졌지만 전략면에서 우세했던 미시간 주립대가 시종일관 경기를 장악하는 양상이 발생했습니다. 미시간 주립대는 경기 내내 버드에게 더블팀, 트리플팀 수비를 붙였고, 팀의 플레이메이커이자 인사이드의 기둥이었던 버드는 완전히 자신의 경기 페이스를 잃고 맙니다. 결국, 승부는 미시간 주립대의 75 대 64 완승으로 끝나버리죠. 버드는 21개의 슈팅시도에 7개만 성공시키며 19득점에 그쳤고, 매직 존슨은 화려한 패싱력을 선보이며 10개의 슈팅시도에 8개를 성공, 24점을 득점했습니다. 매직은 토너먼트 MVP로 뽑혔고, 버드는 이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습니다.

이제 NBA라는 새로운 무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78-79 시즌의 레이커스는 47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 세컨드 라운드까지 진출했던 팀이었지만, 뉴올리언즈 재즈와의 트레이드로 받아낸 1979년 드래프트 넘버원 픽도 가지고 있던 팀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직 존슨은 드래프트 1번으로 레이커스에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당시의 레이커스는 드래프트 운도 상당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 3년 후에도,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레이커스는 비슷한 방식으로 드래프트 1번픽을 갖고 있다가 대학 최고선수였던 제임스 워디를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1982년에 우승을 한 팀이 우승 직후에 곧바로 벌어진 드래프트에서 대학 최고의 선수까지 뽑아간 상황이었지요.

버드는 일찌감치 보스턴 셀틱스의 눈도장을 받아 놓았던 선수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인종차별이 심했던 지역이 보스턴이었던지라, 백인이기까지 한 버드는 셀틱스 구단의 입맛에 딱 맞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50년대부터 오랫동안 증명이 되어 온 사실이지만, 60년대의 셀틱스 왕조를 이끌어낸 레드 아워바크 전 셀틱스 감독은 확실히 선수를 알아보는 눈이 탁월했습니다. 버드가 선수로서 꽃피기 훨씬 전이었던 인디애나 주립대 1학년일 때 부터 그에게 눈독을 들였던 아워바크는 존 하블리첵의 은퇴와 함께 무너져 내리던 셀틱스 왕조를 신속히 재건하기 위한 첫 번째 프로젝트로 버드의 영입을 지시했습니다. 버드가 1979-80 시즌까지는 프로에서 뛸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드 아워바크는 1978년 드래프트에서 버드를 잡아 버립니다. 그리고 무작정 1년을 기다리죠.

아워바크가 진정으로 노렸던 라인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래리 버드 - 매직 존슨 - 케빈 맥헤일의 라인업이었습니다. 상상만 해도 무시무시한 라인업입니다.

아워바크는 매직 존슨이 1980년 드래프트에나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대학 2년만 마치고 프로에 뛰어들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일찍 나오더라도 3학년까지는 마치고 프로 드래프트에 뛰어들던 때였습니다. 셀틱스는 많은 트레이드를 감행해서 1980년 드래프트의 1번과 3번 픽을 이미 확보해 둔 상태였습니다. 아워바크는 그 두 개의 드래프트 픽을 사용해서 오랫동안 탐을 내온 매직 존슨과 케빈 맥헤일 양 토끼를 모두 다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 라인업이 완성됐다면, 아마도 보스턴은 80년대에만 우승을 7~8회는 너끈히 해냈을 겁니다. 그런데 1979년 NCAA 우승을 끝으로 대학 2년생이었던 매직 존슨이 갑자기 1979년 NBA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습니다. 아워바크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겨 버린 것이죠.

그렇게도 원했던 매직 존슨이 다른 팀도 아닌 라이벌팀 레이커스로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아워바크 감독은 1980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다른 작업에 착수합니다. 매직 존슨을 놓친 대신, 괜찮은 센터를 잡아 와야겠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야만 동부의 라이벌 식서스와 전통적인 라이벌 레이커스를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선수가 워리어스의 로버트 패리쉬였습니다. 그는 워리어스의 지인들을 비밀리에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워 삶습니다. 1980년 드래프트에 나올 유능한 빅맨으로 '조 베리 캐롤'이란 훌륭한 센터가 있는데, 리그의 레전드가 될 선수인지라 너무나도 뽑고 싶지만, 현 셀틱스는 지금 당장 팀에 전력이 될 선수가 더 시급하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데리고 있는 '준수한' 빅맨 패리쉬를 나에게 주고, 대신 보스턴의 1번 픽으로 '미래의 레전드' 조 베리 캐롤을 뽑아서 너희들 팀을 리빌딩해라 라고 말이죠.

'조 베리 캐롤', 그는 키 크고 힘 좋은 서가나 좁(DeSagana Diop)과 비슷한 스타일의 준수한 빅맨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워리어스는 아워바크의 꾐(?)에 넘어갔고, 패리쉬와 보스턴의 1번 픽을 바꿉니다. 아워바크가 마음에도 없던 캐롤을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또 다른 이유는, 혹시라도 워리어스가 케빈 맥헤일을 1번픽으로 뽑을까봐 우려가 되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결국, 아워바크의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서, 워리어스는 케빈 맥헤일을 안 잡고 조 베리 캐롤을 1번픽을 사용해 드래프트합니다.

여러분, 아워바크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해서, 아워바크가 구상하던 버드-매직-맥헤일 라인업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대신에 보스턴은 버드-맥헤일-패리쉬를 중심으로 한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프론트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레이커스는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압둘자바와 준수한 스몰포워드 자말 윌크스, 총알같이 빠른 민완가드 놈 닉슨, 그리고 에이스 스타퍼 마이클 쿠퍼를 모두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매직 존슨이라는 걸출한 스타 선수를 낚았습니다. 이제 그를 중심으로 한 왕조의 시작을 온 천하에 알릴 준비를 마치게 된 것입니다.

대학시절 내내 센터와 파워포워드만 봐 왔던 래리 버드가 이제 레드 아워바크의 권유와 함께 장신 스몰포워드로 거듭나야 했던 반면, 대학시절에 포지션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뛰어 다니며 팀을 이끌던 매직 존슨은 프로에서도 플레이메이킹 스윙맨으로서 자신의 그 화려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1983년 시즌을 앞두고 매직 존슨은 팀의 포인트가드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지만 말이지요.

뒤에도 눈이 달린 듯한 패싱센스를 갖고 있었으며, 어느 빅맨보다도 손아귀 힘과 근력이 좋아서 강력한 보드 장악력까지 소유했던 빼어난 외곽슈터 래리 버드. 저는 래리 버드를 스티브 내쉬와 케빈 가넷, 더크 노비츠키의 좋은 점들만을 뽑아서 합친 다음, 가넷의 운동능력만을 제외시킨 선수였다고 묘사하고 싶습니다. 버드는 이 세 선수들보다 더 뛰어난 승부욕, 배짱, 클러치 해결능력도 보유하고 있던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81년 시즌에 무릎부상을 당하기 전까지는 너무나도 빨랐고 점프력도 출중했으며, 타고난 떡대에서 터져 나오는 완력과 긴 다리, 긴 팔, 엇박자의 드리블로 코트 전체를 장악했던 사나이 매직 존슨. 그의 해맑은 미소와 쇼맨십은 할리우드 이미지에 너무나도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 두 명의 젊은 슈퍼 스타에 의해 리그 전체가 접수될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 다음 편에 계속…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08-06-20 한준희 NBA 칼럼니스트( mosesjhahn@hotmail.com)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