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릭'의 강도하 작가 인터뷰
몇 년 전인가, 라이브의 제왕 이승철이 오랜 공백 후에 <네버엔딩스토리>라는 곡을 들고 컴백해 한참 인기를 얻을 즈음이었는데, 어떤 네티즌이 댓글로 이러더란다. "신인 치고는 잘 하시네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조성모 오빠 정도는 되겠는데요." 물론 조성모가 이승철의 까마득한 후배 가수였다는 사실은 말 할 필요도 없겠다.

어느 날'강도하'라는 작가가 인터넷에 <위대한 캣츠비>라는 걸작을 들고 홀연히 나타났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얼핏 잘 단련된 전투적인 여성신인 정도로 여겨졌던 그가 원래 여러 젊은 작가들에게 큰형님 대접을 받는, '강성수'라는 본명으로 90년대 인디 계열 만화 판에서 활발히 활동한 경력의 노련한 중견작가였고, 한 술 더 떠 여성 만화계의 거성인 원수연 작가의 부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독자들은 묘한 당혹감마저 느꼈으리라.
당혹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유가 달랐다. 나는 아이스크림같이 달짝지근한 <드래곤볼>과 <슬램덩크>가 공전의 히트를 치던 10여 년 전부터, 여러소규모 프로젝트와 무크지를 통해 그의 만화를 접해왔다. 모든 독자와 지망생, 작가들이 일본만화의 단맛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재현하려 눈에 불을 켜고 있을때, 그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무려'아방가르드씩이나 한'만화를 쏟아내고 있었고, 당시 어설프게 겉멋 든 새내기 대학생 시절 나는 뭔지 모를 그 모호한 매력에 빠져 허우적댔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청춘 3부작 - <위대한캣츠비>, <로맨스 킬러>, <큐브릭>'을 들고 나왔을 때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그것은 댄싱 퀸 김완선 노래의 작곡자가 알고 보니'록의 대부'신중현이었다는 반전을 접했을 때의 기분이라거나, 평생 인분과 토사물에만 매달릴 것 같았던 강풀이 <순정만화>로 변신했을 때의 충격보다도 심했다.
이건 변신이라기보다 숫제 배신에 가까웠다. 그런데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게 맛있다는 거였다. 너무 맛있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언제까지나 인디와 언더그라운드의 대변자 역할을 할 것만 같았던 그가 이렇게 변신하기까지 그 동안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쳤던 것인가? 나는 3부작의 끝인 <큐브릭>의 마지막 후기를 읽자마자 여운을 음미할 틈도 없이 먼지가 앉은 그의 예전 작품들을 다시 복습해야만 했다. 아, 어지럽다.
평소 나에게 마음씨 좋은 형님일지 몰라도, 역시 어렵고 부담스러운 마음은 어쩔수 없다. 예전부터 인터뷰를 요청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망설이길 몇달. 나는 새해 새벽 전구가 나간 화장실에서 뜻하지 않게 그의 단축번호를 누르는 웃지 못할 실수를 저질렀고, 그렇게 2008년 1월 1일 새벽 2시, 어색한 새해 인사와 함께 인터뷰 약속이 잡혔다.
■ "실험, 분노, 콤플렉스"석가 : 저번 도영이형(강풀) 때도 같은 얘기를 했는데, 저는 형들 만화를 잘 못봐요, 무서워서. 솔직히 그래서 못 보다가 인터뷰를 해야 하니까, 형님 만화도 뒤늦게 세 편을 내리 몰아서 읽었거든요. 놀라운 게 새벽 5시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청춘 3부작을 다 보고 나니까 오후 4시가 다 됐더군요. 푹 빠져들어서 꼬박 11시간을 본 거죠. 와, 그 흡입력이라는 게 너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상한 거예요. 형님도 그런 적 있으세요? 남의 작품 보고 속상했던 기억이라든지….

도하 : 어, 그럼, 속상하지. 이유도 모두 다르지.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자면(그림만 두고 봤을 때), 이 정도 그림을 완성시킨 내 나이 또래의 작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투도 있고, 또 나보다 어린데 이런 그림을 완성했다면 그 질투는 또다른 거고. 그리고 또 어느 순간 그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별 다른 부대낌없이 본능적으로 알아버린 작가를 봤을 때 느끼는 탄성도 있고 부러움도 있어.
난 이렇게 몸에 상처가 많은데(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얘기), 물론 그 작가도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다고 울부짖겠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상처 없이이걸 알아냈구나(라고 보일 때면) 대견하다기보다 너무 부러워. 상처가 많다고 해서 꼭 좋은 것 같지만은 않거든.
석가 :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상처 없이 그런 것을 표현해 낸다는 게….
도하 : 응. 그런 게 부러운 거야. 상처 받는 게 꼭 훈장은 아니라고.
석가 : 저는 예전에 (최)규석이(<습지생태보고서> - <사랑은 단백질>의 원작자)를 볼 때마다 비슷한 심정을 느꼈어요. 그 친구와 비교했을 때 저는 제 스스로 작가로서 어떤 사회적 의식이 없다는 게 항상 콤플렉스였거든요.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작가로 데뷔를 했는데, 막상 나는 의식도 없고 하고 싶은 얘기도 몇 개 없다고 느껴질 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그런 입장에서 규석이를 바라볼 때의 심정은 마치 형이나 도영 형의 만화를 보고 난 뒤 내 만화를 볼 때의 참담한 기분 같은 거였죠.
도하 : 질투는 굉장히 좋은 힘이야. 질투가 없는 사람들이 안타까운 거지.
석가 : 그건 질투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냥….
도하 : 자신에 대한 분노야? 처절함?
석가 : 하하. 그냥'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속상한 거죠. 난(그들과 비교했을 때) 뭐가 모자란 걸까? 그래서 처음에 잡지사를 찾아가서 이것'(석가가 간다')을 자청해서 하겠다고 한 것도, 그냥 흉내내보고 싶었어요. 물론 그냥 얘기하고 싶다는 것도 있었지만 성공한 작가들의 행동이나 생각들을 알아본 다음 나 스스로 따라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는데, 구체적인 계기가 필요했던 거죠, 만남을 위한 계기. 음…, 하지만 형은 좀 뭐랄까, 무서웠어요 (웃음).
도하 : (한참 생각 후)나는 사람들 만나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나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나를 만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석가 : 박재동 선생님이나 이희재 선생님 같은 분들 뵐 때도 안 그랬는데, 이상하게 형은 좀 어려웠어요(웃음). 왜냐면, 형 그런 얘기 많이 들으셨죠? 형 만화는 너무 어렵다는 얘기요(도하 : 많이 들었지). 비유나 상징 같은 코드들이 너무 치밀하고 많다 보니까, 오래 전에 하셨던 <진검승부(필자 주 : 강도하의 예전 단편집 <슬픈나라 비통도시>에 수록된 코믹 단편)>같은 짧은 단편도 읽으면 되게 웃긴데, 맘 놓고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에요(모두 웃음). 웃으면 왠지 가벼운 놈 되는 것 같고.
도하 : 나는 계속 바뀌고 있는데, 초반에는 굉장히 공격성이 많았다고 생각해. (최)규석이와는 진한 대화를 아직 못 나눠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신념이랄까? 신념을 표면화 시키는 게 되게 강했어. 신념이나 주제, 테마가 없는 사람은 없어. 지금은 사는 거 자체가 그거 없인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고 있는데, 어렸을 때는 인위적으로 내가 그걸 통제하고 가두고 관리해야 될 거라고 생각한 거야.
행여나 다른 테마를 만났을 때, 내 테마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 강한 나이다 보니까 공격성향이 있었던 거지. 내 밥 뺏기기가 싫어서, 테마가 상처 입는 게 싫어서. 어르신들이 말할 때는'참, 저 놈 주장 세다' 이었겠지만, 정작 나에게는 그건 주장이 아닌'생존'에 관련된 문제였거든.
이것을 잃어버리면 나는 무너질 것 같은. 그 때는 내가 갖고 있었던 상업성이라든지 인지도에 관련된 가치 같은 것들이 완전 바닥이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창작활동은 열심히 끊임없이 계속 했어. 그런데 작품 자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는 많단 말이야. 그걸 사람들이 헤집는 게 싫었어.
내가 내 콤플렉스를 인정할지언정 다른 사람들이 헤집는 건 싫었어. 그러다 보니까 원활한 핑퐁 식의 대화가 이뤄지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지. 물론 젊은 시기의 얘기야, 지금도 마음은 젊지만 물리적인 나이로 젊었을 때 얘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상대방이 말하고 싶은 의도가 중요하지, 이 사람이 실제로 표면화 시키는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됐어. 그렇게 바뀌니까 사람들을 대하는 게 상대뿐 아니라 나도 상대를 대하는 게 편해지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보는데, 더 좋아져야 돼. 그런 갈증이 되게 많으니까.
석가 : 그 때는 왜 그렇게 치열하셨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 당시의 형님을 보면 비단 만화뿐만이 아니라 다분히'파인 아트적인 퍼포먼스라든지…, 굉장히'표현'에 대한 욕구가 많았던 것 같거든요. 아까 말씀하신 방어적인 기질도 결국 표현이라는 게 전제가 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거니까요.

도하 : 여러 번 얘기했던 건데, 몇 년간 일관된 대답을 하고 있는 걸 보니까 정말 그게 맞나 봐. 이유는'분노'라고 보는데, 이쯤 오니까 맞는 것 같아. 분노의 대상은 계속 바뀌었어. 처음에는 내가 갖고 있는 콤플렉스에 대한 분노가 많았고…. 일단 너무 어렸을 때 만화의'만'자도 몰랐을 고3 시절에 데뷔했으니까. 그런 놈이 만화의 기능을 알겠어 뭘 알겠어? 만화의'외형'을 알겠지.
누가 봐도'어, 만화네'라는 정도만 갖췄을 뿐이지, 만화의 기능성이나 만화가 최소한 소화되고 다시 내게 남는 과정 있잖아, 그런 걸 체험하거나 내 것으로 할 시간이 없었거든. 계속 따라쟁이처럼 만화 흉내를 내고 있었어. 글과 그림이 결합되면서 어떤 특정한 장르로 인식되는 과정만을 반복하고 있었지.
그렇게 너무 꿈만 같은 시기를 4, 5년인가 보내고 87년도에'보물섬'에서 데뷔를 했는데, 이두호, 이현세 선생 같이 요즘 자주 뵙는 그 분들은 그 당시 이미 완성된 작가들이었거든. 나는 미완의 사람이 갑자기 프로작가가 돼 있는 거잖아. 그런 나에게 어떠한 콤플렉스가 있었을까? A부터 Z까지 다 콤플렉스였어. 그림이 돼 있나, 이야기에 대한 기본이 돼 있나, 하물며 그 흔한 대사치기의'합', 그것마저도 너무 미숙한 거야. 그러니까 선생님들한테 작품을 내놓는 순간은 마치 시험 치르는 기분이었지.
그런데 지금 내 동기들 - 가장 친한 윤태호(YAHOO, <이끼>의 작가)를 예로 들자면 허영만 선생님의 문하생 생활을 꽤 오래 하면서 좋은 양분도 받았고, 나중에 또 조운학 선생에게 상업적인 여러 가지 기능들, 노련함 그런 것들을 데뷔해 놓고도 다시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배웠단 말이야. 그거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거든.
석가 : 잠깐만요, 형님은 문하생 생활 하지 않으셨어요?
도하 : 응, 없었어. 고3 때 그냥 교재나 학원경험 없이 공부하다가 데뷔한 케이스야. 너무 기본기가 안 돼 있어서 매번 원고를 그릴 때나 구상할 때, 인쇄된 책을 볼 때도 너무 얼굴이 시뻘개지는 거야, 무를 수도 없잖아. 누구 문하생으로 들어간다는 건 꿈도 못 꿨고, 아니, 문하생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그렇게 장시간 보내면서 내 마음 속에는 콤플렉스가 너무나 굳건하게 살이 돼 버린 거야.
"나는 만화가가 아니다."만화라는 모양새를 계속 배출은 하고 있지만, 나는 만화가가 아니다. - 이건 과장이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될 거야. - 콤플렉스는 곧 분노거든? 그래서 데뷔하고 만화 공부를 시작한 거야. 만화 공부를 하고 데뷔한 게 아니라 얼떨결에 입성해서 작품을 내고 연재를 하면서 군대 갔다오고…. 그 때부터 만화 공부를 시작한 거야.
정상적이고 일반적으로 데뷔한 작가가 거치는 과정이라 함은,' 사랑 받고 소통하기 위해서 작품을 축적하는 기간'이어야 해. 그게 정상적인 작가의 성장 과정이야. 그 작가를 노련한 작가로 만드는 성장통은 따로 있어. 그런데 나는 데뷔한 후에 만화 공부를 시작하다 보니 내 관심은 상업과 소통이 아니게 돼 버렸거든.
(내 관심은)내가 그리고 있는 만화의 미학적 관점과 타 장르의 미학적 경험치들, 그들이 이미 수많은 시간 동안 부대낌을 통해 완성시켜 놓은 장르의 미학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과의 간극과 그것을 채워나가는 방법, 만화라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내가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매 작품이 단편화(콩트) 될 수밖에 없었어. 당장 이번 달에 심취되어 있던 미학적 관념이 이 단편을 통해 나와야만 하고, 그 다음에 내 화두가 바뀌면 그걸 또 풀어내야 돼. 무언가 내가 정리된 상태에서 긴 장편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거든.
그러니까 매 단편들이 파편적이고 뒤죽박죽인 거야. 예를 들어 <슬픈나라 비통도시> 같은 경우는 그런 부대낌의 후기들 중에서 비교적 어두운 것과 정치적인 이야기들만 뽑아서 모은 작품집이거든. 그래서 그 때 내 만화를 명명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단어는 - 지금은 너무 우스운 단어가 돼 버렸지만 -' 실험'이야. 그러니까'만화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어. 어느 누가 만화실험을 하고 싶겠어?
하지만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실험을 하는 과정이었던 거지. 물론 사람들은 비판을 해.' 자기 배설적이다, 소통의 의지를 아예 처음부터 거세한 채 내놓는 그런 일련의 작품들이 도대체 만화사적으로나 지금 현재 만화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느냐'면서 공격을 했단 말이야.
(나는)미안합니다. 지금 이렇게 어려운 만화 판에, 더더군다나 큰 성과를 낼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실험만 해대서 죄송합니다, 라고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어.
석가 : 그런 사과를 실제로 하셨어요?
도하 : 선생님이나 동료들이'너 왜 그렇게 하는데?'라는 간단한 질문을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는 건'제가 하고 싶어서요!'라고 간단하게 얘기할 수 없던 나이야. 나름대로 이렇게 문장화 시켜서 설명하고 싶어했던 나이거든. 제가 생겨먹은 게 이래서요, 라고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건 그것보다 한참 이후였어.
석가 : 근데 그 분들은 그러셨을지 몰라도, 형 좋으시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웃음) 저는 그런 실험성 짙은 만화들이 좋았거든요. 예전에'만화실험 봄'이 나'화끈'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너무 좋았던 게, 비록 살갗으로 이해는 되지 않을지 몰라도 뭐랄까, 씹으면 씹을수록 묘하게 단물이 배어 나온다고 해야 하나?
저는 형님이 그런 고민을 하시던 시기에 중, 고교를 거쳤던 철저한 독자 입장에 있었는데, 당시 친구들이 즐겼던 <드래곤볼>이나 <북두권> 같은 류의 만화에 어떤 반발 내지는 염증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게 우리 사이에서는 절대적이었으니까. 나도 나중에 만화가가 되면 꼭 이런 걸 해야 하나? 라고 걱정하던 시기였거든요.

표현이 이상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더욱 그런 (실험류의)만화들이 포근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카툰P 프로젝트의'야후매니아'에서 데뷔했고, 오버그라운드에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제 발로 다시 걸어간 곳도'파마헤드'였고…. 그런 입장에서 아까 그런 식으로 그런 작품들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공격을 받으면 나도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반박을 해주고는 싶은데, 그런…(단어를 한참 고민하다가) '통빡'이 안 된다는 게 너무 상한거죠.
도하 : 방·사에 그런 유사한 논쟁이 정기적으로, 시즌마다 벌어지는 걸 내가 보고 있어. 그건 앞으로도 계속될 거야. 그러니까 그런 얘기지. 실험에 대한 오해와'맞장'뜰 필요는 없다. 음…, 그런 공격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두 가지야. 하나는'니들은 짖어라, 난 한다.'이게 한 쪽에 있겠고, 짖을 때마다 같이 물어뜯는 쪽이 있을 거야.
그래서 물어뜯으려고 했더니 내 이빨이 썩어있었다거나, 아니면 물어뜯었더니 엉뚱한 사람을 물어뜯었거나. 그런 여러 가지 실전을 겪으면서 계속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식이 있을 거야. 그런데 나는 아까 말했던 만화 실험류의 잡지들이 나왔을 때 후자에 있었어. 그러니까 초지일관하면서 도를 깨우쳐버린 사람이 아닌, 누군가 들쑤시면 그것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를 썼던 타입이었지.
낙낙 : 그것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
도하 : 음…, 정확히 말하자면 보호가 아니라, 그리는 행위 플러스 이것(실험에 관한 정당성을 어필하는 행위)도 내가 그리는 행위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지. 내 신념대로 무언가 결과물을 내놓는 것만큼, 내 결과물에 대한 여러 가지 소통의 과정 내에서 필요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주는 작업도 창작 작업만큼 중요하다고 믿었던 시기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평론가랑 굉장히 관계가 좋은 작가 중의 하나야. 원래 작가는 태생적으로 평론가와 좋은 관계일 수가 없거든(웃음).
■ "청년시대"제법 긴 시간 동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 강도하는 이 시점의 현실과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차차 논리와 근거를 쌓아가던 중 그것을 다시 놓쳐버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닌가 싶어 다소 혼란스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도하 : (전략)내가 갖고 있던 갈증 중에'강도하라는 사람이 오락만화를 그린다면 어떤 만화를 그릴까'라는 물음이 있었어. 그것을 하나하나 채워가던 시기에 시대가 갑자기 바뀌어 버리니까 뭐야 이거, 싶은 거지. 내가 상대해야 할 대상이 바뀌어 버린 거야. 그런 어지러움이 있어. 논리와 근거를 잃어버린다는 건 마음속의'청년'을 잃어버린다는 거거든.
기성화 되어버린다는 얘기야. 여기서'기성'이라는 건 물론 단어적 설명이 아닌, 우리가 감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가장 혐오적인 표현이야. 청년이라는 건 내일 내가 죽을지, 아니면 어떤 근사한 여자에게 홀릴 지 모르는 두근거림으로 잠 못 자게 되는 거거든. 두근거림 없는 삶을 산다는 게 기성세대라고 본다면, 나는 최소한 지금까지 만화를 그리면서 두근댔거든? 내가 내년에 뭐를 할지 나도 나를 모른다는 두근거림이 있었어. 그건 스릴이야. 그런데 근본적으로 지금은 좀(혼란스러워)…. 그래서 그냥 차라리 잘 됐다, 올해는 작품보다는공부를하자, 그렇게된거지.
석가 : 저는 아직 작품 경험도 많이 없고 어려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제 스스로가 느끼는 지금의 사회적 상황이라는 것을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어떤 식으로 매치시켜야 할지, 어떻게 녹여내야 할 지 잘 와 닿지 않더라고요.
도하 : (한참 생각 후) 내가 좀 긍정적인 사람이거든? 사람들이 잘 오해하는 데(모두 웃음). 이번에 했던 3부작 자체가 좀 무겁다 보니까 내가 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긍정적 에너지를 모아서'강도하표'오락만화라는 걸 선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세상이 어수선해지다 보니까 갑자기 6, 7년 전에 기획했던 흡혈만화가 댕기기 시작하는 거야. 뱀파이어물이긴 한데, 배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2008년, 키스처럼 흡혈이 간단해진 도시인 거지.

설정이 뱀파이어라서 흡혈을 하는 게 아니라 흡혈이 합법화되어 있는 도시의 이야기야. '흡혈이란 행위가 무엇일까'로 시작해서'허기'로 끝나. 우리가 갖고 있는 허기란 무엇인가. 그래서 그들이 왜 흡혈을 할 수밖에 없고 흡혈이 성문화될 수밖에 없었는지, 미성년자에게는 왜 흡혈을 금지시켰는지, 그리고 주민등록증이 생기는 그 나이부터 흡혈이 합법화되는 세계로 들어가는 성년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청소년들이 볼 때는 기성세대가 혐오스러운 거야. 성인들은 버젓이 흡혈을 하지만 아직은 흡혈이 불법인 애들이 성문화 될 때의 논리는 흡혈이 합법화돼 있긴 하지만 청소년들만큼은'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거지.
이들이 갖고 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혐오적 시선과 도대체 왜 이네들만큼은 흡혈을 막아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와 이들이 갖고 있는 피, 피는 도대체 우리 몸의 어떤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상대방의 피를 빨아야 되는지, 왜 이들이 보호 받아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오면서 이야기가 끝나는데, 이 이야기가 내가 지금 살로 느끼고 있는 2008년도의 우리나라야. 이해 되지? 그러다 보니 오락만화에 대한 욕망을 그득그득 키워나가고 있는 즈음에 막 슬금슬금 올라오는 거야. 야, 너 이거 해야 돼, 하면서.
석가 : (끄덕) 좀 뜬금없지만, 오래 전부터 형 만화를 접할 때마다 느꼈던 건데요, 피뿐만이 아니라 정액이라든지, 땀, 콧물 같은 것들이 자주 보이는 거에요. 그게 어느 순간부터는 역겨운 게 아니라'철푸덕 철푸덕'같은 효과음과 어우러져서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거든요. 좀 이상하지만 애정 같은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흐흐흐.
도하 : 왜 그렇게 분비물에 집착 하냐고? (모두 웃음)
낙낙 : 제 생각에는 아마도 분출이나 배설의 의미로 사용하셨던 게 아닐까 싶은데요.
도하 : 집착이라고 인정해. 근데 그 때는 나뿐만 아니라'인디씬'이 그런 분비물을 즐겨 사용했거든. 로버트 크롬(필자 주 : 미국의 대표적인 팝 아트 계열 만화작가, 언더그라운드 성향의 파괴적이고 퇴폐적인 만화로 국내에서도 마니아 층을 보유하고 있다) 시절부터 보면, 온갖 분비물의 향연이잖아.
그 때는 분명히 분비물에 대한 애정 - 분비물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이미지의 정체성과 정 반대편의 정체성에는 뭐가 있는지에 집중했었다고. 그리고 만화라는 건 항상 긍정적이며 아름답게 미화되고…. 예를 들어, 동성애라는 것도 리얼한 실제 장면을 본다면 소녀들은 화들짝 놀라겠지만 만화 내에서는 너무 곱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만화가적 세계 - 만화가 허용하는, 추구하는 세계가 아닌 리얼한 세계를 담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플러스알파가 하나더 붙어.

뭐냐 하면, '인디씬'은 또'메인스트림'이 쓰는 코드의 정 반대 코드를 쓰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지. 그러다 보니 꽤 많은 작가들이 분비물에 대한 애정을 보였던 것은 소위 메인스트림에 대한 혐오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지금 내가 했던 청춘 3부작 같이 그 때와는 시간이 많이 지난 작품에서 분비물이 나왔다면 그 당시의 정치적 성향이나 의도성이 아닌, 다른 목적일 거란 말이야.
여기서 썼던 분비물은 많지가 않아, 딱 두 가지야. 피와 눈물이야. 그러니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피요, 내가 감정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눈물이야. <큐브릭>에서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을 중반까지 심어놓기만 하고 애들에게 눈물을 허락하지 않았거든. 애들로 하여금 한 번에 흘리길 원했기 때문에. 그런 의미였지.
석가 : 그럼, <큐브릭>은 매회 즉흥적으로 그리셨다는 거에요?
도하 : 아니,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처음에 짰던 이야기 구도를 다 엎어버렸어. <로맨스>나 <캣츠비>처럼 장장 10개월이라는 시간을 그림만 그리면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짜놓은 스토리대로 그림만 그리니까 너무 육체적 노동만 남는 거야. 얼마나 그림에 공력을 들였는가만 남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이 경우에) 소위 공력을 들인 그림이라는 건 백성민 선생님처럼 선 한번 잘 긋는 게 정말 좋은 그림이지, 꽤 오랜 시간 점묘법처럼 죽어라 그린 다음 블로그에 올려 그림 자랑하는 그런 경우를 이야기 하는 건 아니잖아.
석가 : 뜨끔!!
도하 : 그러니까 그야말로 노동에 지친 거야. 그래서 <큐브릭>은 짜놓은 스토리를 엎어버리고, 그 때부터 인터뷰를 했어. <큐브릭>은 지금 내 앞의 낙낙이나 민선이나 석가처럼, 그런'실제의 사람'을 만나서 들은 그들의 리얼 스토리야.
실제로 자기 경험담들이야 그 얘기가. 사람들에겐 어쩌면 가상으로 꾸며낸 캐릭터 설정과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담아낸 이야기들을 꾸며낸 이야기처럼 들을 수도 있을 거야. 오히려 리얼한 뉴스 들으면 엽기적인 이야기도 많고, 꽤 근사한 아침드라마 같은 경우에도 리얼한 것 같지만 단지 한 작가의 공상에 불과한 거잖아.
<큐브릭>을 할 때는 딱 하나만 생각했어. 각기 다른 도시에 네 명의 아이들이 대낮에 엉엉 우는 거야. 인파에 묻혀서. 그 한 장면을 무조건 그리고 싶은 거야. 왜, 무슨 일이 있길래 얘네들이 이렇게 비통하게 동 시간에 하늘을 보면서 엉엉 울까…. 그거에 대한 모티브는 이밍양의 <애정만세>였고.
석가 : 구미도 저번 달 인터뷰 때 똑같은 얘길 했어요. 그리고 싶은 딱 한 장면이 있는데, 그걸 향해서만 무조건 달려간대요.
도하 : 음, (내 경우는)<큐브릭>만 그랬어.
석가 : 그래서 그런지 저는 3부작 중 <큐브릭>이 제일 좋았어요.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10대의 통곡이라는 게 제 스스로 이미 겪은 일종의 성장통처럼 보였고, 그래서 가장 예뻤다고 할까요. 그러고 보면 청춘 3부작에서는'나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모두 20대, 40대, 10대의 이야기잖아요.
도하 : 예전에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이라는 전설적인 작품이 있었거든? 제로 작가가 만화 속 캐릭터의 나이였잖아. 독자 층도 만화를 실제로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는 친구 또래다 보니까 서로 간에'끼리문화'가 형성돼서 메가 히트작이 나올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는 제공이 됐었단 말이야.

거기다 센스도 있고 시대적인 여러 요소가 얽혀서 굉장히 트렌드한 작품이 나왔지. 그런데 나는 좀 생각이 달랐던 게, 지금 내가 나를 다루면 지금의 내 감정만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1, 2년 전 일기를 봤을 때의 민망함처럼. 최소한 내가 20대를 다룰 때는 내가 20대에서 비껴나 있을 때 다뤄야겠다. 그럼 내가 이들에게 허락된 엔딩도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닌 가장 적당한 엔딩이 나오고 여러 가지 배려나 밸런스를 갖출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그래서 지금 나는 청춘이라는 걸 바라보는 시선이 그 속에서 광폭하게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일정 거리에서 끌어안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고,' 괜찮아, 더 가봐, 끝이 있어. 가봐.'라고 할 수도 있는 위치거든. 그래서 <캐츠비>를 할때는 자신만만했었고.
<로맨스 킬러>같은 경우 나는, 스스로 어떤 특정한 나이의 노예가 되겠다고 열어놓으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생각이 있어. 그럼 20대는 20대가, 40대는 40대가 생각할 수 있는 사고에서 멈출 수밖에 없어. 그래서 초반에 얘기했던 청년문화를 나는 열렬히 지지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청년에 대한 근성이랄까? 속에 분노가 없으면 청년이 아니라고 생각해. 무언가 순응한다는 것은 부드러워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게 아니라, 졌다고 보는 거거든. 세상원리 알아버렸단 얘기야.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버렸다는 거야. 예를 들면 이런 거지. 일제 때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몇 대가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 시기에 적당한 위치선점 한 사람들은 몇 대가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 이런 것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것들을 수업해나가다 보면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순응하게 돼. 극단적인 비유지만 만화도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 "조언"도하 : 데뷔를 준비하는 예비 작가들 보면 주변에 보여주려는 사람이 많잖아. 근데 그건 굉장히 큰 실수거든.
낙낙 : 어, 왜요?

도하 : 절대 객관화 될 수 없는 상대들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작품을 보여주고 적을 만들 때, 예비 작가들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게'세상이 날 못 알아주네'병이 있거든. 근데 그건 스스로 커진 게 아니라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준 거야.
주변에서는 호의적으로 그 작품에 대한 장점을 얘기해 주고, 단점도 상처 받지 않을 정도로 얘기해주려고 애를 쓰거든. 근데 실제적으로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보여줄 때는, 그들에게 내 작품은 단지 그대로 천지에 널려있는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잖아. 말 그대로 콘텐츠가 갖고 있는 힘만을 딱 평가해 버리고 말아.
그 때 받는 상처를 객관적으로 아, 내 작품이 이렇구나 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내 주변에서는 다 좋게 얘기하는데 악플러들이 넘치는 이런 뭐 같은 곳에 하니까… 라고 생각해 버리기 쉽다고.
왜냐면 이 쪽에서 데미지 입고 싶지 않거든. 그들 세계에서 서로 인정 받는 코드 내에서 놀고 싶거든. 거기서는 이런 코드만 써도 즐거워하고 박수 받으며 '와, 네가 제일이다'라고 얘기하고. 그러니까 완벽하게 스스로 자기를 소외시키는 거지. 내가 볼 때는 기성 작가를 많이 안다는 것도 별로 안 좋아.
낙낙 : 그래요? 그건 또 왜 그런 걸까요.
도하 : 예비 작가가 공부해야 될 건 작가가 아니라 그 작가가 만들어 놓은 텍스트인데, 그 텍스트가 제대로 안 보이거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간단해. 낙낙과 민선 양이 오늘 날 봤어. 오늘 나를 보기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작품에 대한 선호가 있건 없건 간에, 만약 있다고 치자고, 어떤 사람이 내 작품에 대해 분석하면서 내 작품에 굉장히 오물을 끼얹는 말과 분석을 했다고 쳐. 내가 긍정적으로 설전이 벌어질 수는 있지. 만약 상대편의 말에 논리와 근거가 있다면 수용도 할 거야. 근데 나를 알게 됐다, 만나게 됐다, 친하게 됐다.
낙낙 : 그 순간부터는 사적인 일로 바뀌게 된다는 말씀인가요?
도하 : 그 텍스트의 객관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서로 간의 설전은 물 건너가게 되는 거야. 예를 들어 지금 나 같은 경우만 해도 그래. 솔직히 말해서 만약 누가 석정현 작품에 대해 뭐라고 그러면 듣기가 싫다고.
낙낙 : 그렇게 되겠죠…?
도하 : 작품을 하나씩 잃어버리는 거야. 작가를 안다는 것은 예비 작가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거거든. 정말 좋아한다면, 그 작가는 안 만나는 게 좋아. 질투가 나서 못 견디겠고 정말 이 작가가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 가시거리에서 항상 맴도는 작가라고 한다면, 씹어 삼켜야지. 막 찢어 발겨서 삼켜야지. 한컷 한 컷 들여다 보면서 왜 이런 선을 그렸을까, 왜 여기서 멈칫했을까 이런걸 연구해야지. 그렇잖아?
석가 : (웃으며)예, 맞아요. 계속 보다 보면 이 작가 여기서 이 부분은 그리기 싫었구나, 귀찮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도하 : 최악의 경우를 하나 얘기해 줄게, 만화계에 보면 데뷔도 안 했는데 10년 넘게 계속 보이는 얼굴이 있단 말이야. 그 친구들은 만나면 반갑고 좋아. 그런데 볼 때마다 하는 소리가 똑같아. 요즘 작품 준비는 잘 돼가니? 예, 좀 일단은 올해는 돈은 벌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학습만화 몇 개 하고 있고요, 공모전도 준비하고 있고 그래요. 그럼 작가들은 아유, 그래 고생 좀 해라, 그러고 헤어지지. 나는 이런 작가나 이런 친구들이나 둘 다 싫어. 이 문화 자체가 싫어. 하지만 이건 정말 극단적인 예니까.
석가 :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를 알고 있다는 자체가 힘이 되는 케이스거든요. 친해지려고 하는 와중에 인력으로 끌어올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물론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건 아니고, 그렇게 힘을 얻고 난 다음 막 발버둥을 치는 거죠.
도하 : …너는 주로 오른쪽 장딴지로 발버둥을 치나 보구나. 하지만 나는 석가보다도 예비 작가들을 향한다는 전제를 깔고 한 얘기였고. 예비 작가들에겐 좀 조심스러워, 신중해야 돼. 기존 프로 작가가 된 다음에 교류가 없다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겠지. 나는 적절한 교류는 좋다고 생각해.

석가 : 형도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요, 몇 년 전에 형이랑 몇몇 형들이 제 작업실에 놀러 오셨던 적이 있어요. 당시 그냥 막무가내로 무작정 작업하던 <귀신>의 초안을 보여줬는데,' 도대체 주제가 뭐냐'면서 혼난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나름 굉장히 아팠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런 일침이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도하 :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사실,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은 또 약간 달라. 영화도 이야기, 연극도 무용도 회화도 이야기, 디자인이나 광고도 드라마가 필요하고…, '인생은 다 드라마야.'그런데(그 명제에 대해) 물음표를 달지 않고 계속 수긍만 하면서 돌진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따지면 원래 제 기능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묵사발 내는 거거든? 확실히 지금이 스토리텔링 전성시대인건 분명해. 하지만 나는 수긍을 못하겠어.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왜 특정한 장르의, 고유의 미덕들을 스스로 뉘우치고 부정하게 만들어야 하는지.
내가 볼 때는 네가 여태까지 그림에 쌓았던 공력이 어느 누구보다 적거나 많다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림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보인단 말이야. 이제는 좀 스토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는 건 긍정적이지만, 어느 순간 혼날 근거가 되는 건 아니란 얘기야. 정말 혼나야 될 사람들은, 자기가 주워들은 것과 자기가 실제로 행하는 것에 대한 간극이 너무 심한 사람들이거든.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자기 스스로의 욕망에 집착하자'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나는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짓눌러 왔던가, 칫 터질 것 같던 찰나 극적으로 숨통을 열어준 것은'청년'이라는 단어의 한 줄 의미였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와 맞닥뜨리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모습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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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현 월간 CGLAND 필자(http://www.cgl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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