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의 주호민 작가 인터뷰

2008. 4. 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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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저널 버즈]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가기 싫어하면서도, 일단 다녀오기만 하면 평생의 안주거리가 되는 신기한 동네가 있다. 그렇다. '군대'다. 오죽하면 한국 남자 세명을 방에 가둬놓고 사흘을 굶겨도 군대 이야기만 시켜놓으면 오히려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다는 우스개가 나왔을까. 그 정도로 방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군대라는 공간은, 어쩌면 이야기로 먹고 사는 우리 같은 작가들에게 있어 필수 통과 코스와 같은 곳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단 전문 작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군대라는 사회와 격리된 공간은 그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작가로 만들어준다. 새벽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자작시 두어 수 읊어보지 않은 이와, 꿀 같은 휴가를 나와 술자리를 같이한 친구들에게 창작 소설 한두 편 늘어놓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평생 두 번 하기 힘든 경험을, 그것도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했으니 얼마나 이야깃거리가 많겠는가.

작가란 별 것 아니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 작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5,000만 인구의 절반인 2,500만에 육박하는 잠재적 작가를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다(다소 엉뚱하긴 해도 설득력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대한민국의 그 2,500만에 육박하는 작가군(群)을 손뼉치며 공감하게 만든 작가가 있다고 하자. 작가가 작가를 울리고 웃기다니! 세상에 이런 강한 작가가 또 있을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짬>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누구나 아는 군사기밀(?)을 만천하에 퍼뜨린 주호민이 그 주인공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가 같은 소재로 수없이 도전했지만, 이 정도의 공감과 파장을 일으킨 경우는 드물었다. 비록 화려한 그림체도 세련된 연출도 아니지만, 분명히 그 안에는 단순히 우스개의 소재로써가 아닌, 땀 냄새와 젊음의 열기가 뭉근한(나의 옛날, 내 아들, 친구, 그 이가 몸을 담았던) '군대'가 너무나도 생생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건조한 집단의 생생한 생명력을 이끌어 묘사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그런 궁금증은 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설의 여운이 끝나지 않은 2월의 중순 서울 홍대, 두 달 전 같은 장소에서 본 코너의 타깃이 되어주었던 정구미 작가와 홍유라 작가, 필자의 친구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박정운군, 전담 스크립터 박민선양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이 자리를 빌려 방대한 분량의 녹취 풀이에 지대한 도움을 준 박민선양에게 큰 감사를 전한다).

■ "가능성의 발견"석가 : 자, 그럼 준비해 온 질문을 하겠습니다.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한 것 같은데, 지금 만화를 하게 만드는 그 동력이 뭐라고 생각을 하는 지…? 음, 처음에 어떤 계기로 만화를 시작했어?

호민 : 처음에 시작한 건, 그냥 뭐 그런 친구들 있잖아요. 학교 다니다 보면 반에 꼭 한 두 명씩 있는, 교과서 여백에 낙서하고… 그냥 그런 식이었죠.

석가 : 헤헤 .나도 그런 놈이었지.

호민 : 다 그래요.보면 다 그런 것 같아요.

석가 : 근데 나 같은 경우에는, 만화가를 하고 싶어 하긴 했지만 정작 만화는 안 그렸던 것같아. 만날 그리는 게 로봇이나 이런 쪽이었지. 너처럼 이렇게 연습장에 진짜 의미 있는 만화 같은 걸 그리진 않았었거든.

호민 : 저는 반 친구들이 다 등장하는 만화를 그렸어요.

석가 : 그럼 애들이 그러잖아. 나, 나도 등장시켜줘, 난 언제 나와.

호민 : 옆 반까지 연습장이 돌면서 걸레가 다 됐죠. 형 말처럼 자기 등장시켜달 라고 조르고, 그런 게 너무 재미있잖아요. 제 맘대로 친구들의 모습을 희화화 하거나 과장시키면서 친구들 반응 보는 거.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취미였는데, 첫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도 실패하고. 그러다가 직업 전문학교의 애니메이션과를 갔어요.

거기서 포토샵이나 만화의 기술적인 부분들(자선 긋고 그런 거 있잖아요?) 을 배웠고요. 그때(2000년)가 인터넷의 태동기로 웹툰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인터넷과 웹툰의 가능성을 잘 몰랐어요. 그런데 군대를 다녀오니까 강풀이라는 작가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더라고요. 사실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강풀은 똥 만화(웃음) 그리고 우리는 그거 보면서 그냥 웃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다녀오니까 웹툰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장르가 되어있는 거예요 .

그래서 나는 군대 이야기를 반드시 만화로 그리겠다고 다짐을 했죠. 다른 매체는 아예 생각도 못했거든요. 군대 가기 전 '삼류 만화' 사이트에서 연습장 만화를 스캔해서 올리는 정도였으니까요.

석가 : 사실 나도 네가 말하던 태동기 때부터 계속 인터넷에서 그림이나 만화 동호회 활동을 하던 세대이기 때문에, 가끔 너뿐 아니라 '판당고'나 '촹'같은 친구들의 연습장 만화를 종종 봤었지. 그런데 당시 나는 이 친구들이 실제로 책을 내고 만화계에서 활동을 할 수 있는 작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

그러니까 막말로 이런 낙서 같은 만화가 책으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지. 당시까지만 해도 만화책을 내려면 칸이나 자선치는 법도 알아야 하고, 스크린 톤이나 펜 테크닉도 잘 써야 되고, 뭐 그래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잖아. 만화가가 되기 위한 정통성 같은 부분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고.

나는 그런 것이 싫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다 보니까 나마저도 얘는 글쎄,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그런데 막상 당당하게 책 내고, 이렇게 유명작가가 돼서 이름을 알리니까 뭐랄까, 굉장히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한 거야.

호민 : 하하하 !사실 제가 생각해도 좀 그래요.

석가 : 정말 통쾌했어. 뉘앙스가 좀 이상하긴 한데, 봐라, 이런 놈도되지 않냐!

호민 : 하하,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석가 : 만화의 형식적인 부분에 대해 힘들고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있다면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아 좋았다는 얘기야.

민선 : 아까 인터뷰 시작하기 전에 여쭤봤던 건데요, 호민님의 만화를 보면 칸이 있잖아요, 간격이나 크기를 일정하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칸새(홈통)의 경우도, 보통 만화를 보면 세로는 좁고 가로는 좀 더 넓게 한다거나 그런 게 있잖아요.

호민 : 그게 두 가지 정도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삼류만화' 때부터의 버릇 때문이에요. 그냥 왜 연습장에다 만화 그릴 때,('王'자를 그리며) 항상 8칸으로 나눴거든요. 그때는 뭐, 홈통도 없어요, 그냥 선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나는 삼류만화 출신 작가입니다, 뭐 이런 느낌도 있고. 그리고 칸이 그런 식으로 일정하게 정해져 있으면 술술 읽혀요.

<먼 나라 이웃나라>도 보면 4단에 항상 3칸이잖아요? 그렇게 돼 있으면 다른 부분에 신경 쓰거나 긴장할 필요 없이 술술 그냥 읽혀요. 그런 걸 노린 부분도 있었죠.

석가 : 전에 구미 같은 경우는 칸 연출을 중요시한다고 했었는데.

호민 : 그랬죠.

석가 : 구미 때도 얘기 했지만, 나도 칸 연출을 잘 못해서 무조건 3단이나 4단으로 칸을 일정하게 나누고 차라리 비주얼로 승부를 보자 이런 식이거든. 만화를 할 때 외적인 형식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인식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걸 강풀이나 호민이가 깨버린 거야. 강풀은 아예 칸도 안치잖아?

호민 : 그게 보기에 진짜 편하잖아요.

석가 : 작가 입장에서 독자들은 이런 칸 연출 하나까지도 음미를 하면서 볼 것이라는 일종의 부담감 같은 것이 있잖아? 그건 그걸 능숙하게 연출할 수 있는 작가의 몫이고, 너 같은 경우는 온전하게 이야기 자체에 집중을 시키니까….

호민 : 저는 작업할 때 주안점을 두는 부분이 '술술 읽혀야'된다고 생각해요. 항상 만화를 그리면 업데이트를 하기 전에 어머님께 제일 먼저 보여드려요. 내일 모레 환갑이신데요, 어머니가 먼저 이해가 돼야 해요. 어머니가 보셔서 이해가 안 되면, 이건 다른 어른들이 봤을 때 무리가 있다, 이건 쉽게 읽히는 만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칸 연출뿐 아니라) 제가 너무 젊은이의 이야기, 신세대의 언어로 이야기를 했을 때, 만약 어머니께서' 이게 무슨 뜻이니?'라고 물어보시면 쉽게 고쳐요. 저는 정말 남녀노소 모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거든요.

석가 : 오….집에서 지원을 해주시는 편이니?

호민 : 아, 어머니, 아버님이 다 화가세요. 아버지가 홍대 60 학번, 어머니가 71 학번.

석가 : (무릎을 치며) 어쩐지~ 그렇지. 외삼촌이 '성완경'선생님이라더니(필자 주 :한국과 유럽의 만화교류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는 만화, 미술평론가).

호민 : 정말 환경이 좋죠. 아버지도 만화를 좋아하시고. 그래서 항상 작업을 하면 먼저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재미있어 하시면 아, 괜찮게 나왔다 싶고.

석가 : 복 받은 환경이네. 어렸을 때부터 연습장에 만화 그려도 태클이나 불안감이 없었을 거 아냐.

호민 : 사실 제가고교 시절에 어느 정도 공부는 했었어요. 서울에 있는 학교를 갈 수 있는 정도는 됐었는데, 너무 소신 지원을 하다 보니 다 떨어졌거든요. 그때 직업전문학교 애니메이션과를 가서 만화를 하라고 권유하신 분이 어머니에요.

석가 : 넌 진짜, 크~ 나도 복 받은 경우긴 하다만, 집에서 반대하는 지망생들이 들으면 진짜 우울해할 정도로 부럽다 부러워(일동동감). 환경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어쨌거나, 그렇게 술술 읽히는 만화가 좋다고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네가 그런 만화를 많이 읽고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거든. 넌 스스로 어떤 만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

호민 :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만화는 명랑만화에요 . 뭐 꾸러기나 둘리….

석가 : 꺼벙이!

호민 : 그렇죠. 길창덕 선생님의 꺼벙이. 그런 만화들은 화려한 연출도 별로 없고 칸도 일정하잖아요. 꾸러기나 둘리 같은 경우는 항상 전신이 다 나와요 . 클로즈업이나 이런 것도 없고, 항상 일정한 칸에 정해진 크기 같은 형식이 안정 적으로 술술 읽히거든요.

그리고 <짬>을 그리게 된 계기라고 한다면, '아트 슈피겔만'의 <쥐>(필자 주 : '쥐'를 의인화시켜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유태인들의 학살 문제에 대해 다룬 작품. 만화사나 만화의 형식적 텍스트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작이다) 덕분이었어요. 아우슈비츠 이야기인데, 왠지 군대랑 비슷한 점이 많은 거예요.

민선 : (울상을 지으며)군대가 그렇게 비참해요?

호민 : 비참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형식이 그렇다는 거죠. 형식상으로 군대를 1회성 콩트 소재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아트 슈피겔만의 <쥐>처럼 완전 체험하는 식으로 내레이션과 에피소드를 섞어서 버무리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저는 다큐멘터리 같은 그런 형식이 좋더라고요.

■ "기억, 그리고 기록"석가 : <짬>을 읽으면서 느꼈던 게, 만약 내 밑에 너 같은 후임이 있었으면 정말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후임들에게 어떤 고참이었어?

호민 : 무관심 했어요. 특별히 잘해주지도 못해주지도 않는, 그냥 후임들에게 무관심한 그런 고참 있잖아요.

석가 : 그런데 그게 너 스스로는 군 생활을 잘 한 건지는 몰라도, 고참 입장에서는 졸병들 잘 갈구는 후임이 편하거든.

호민 : 일과 시간에는 항상 자동차 만지고 운전하고 그러니까 상관이 없는데, 군생활의 진짜는 일과 후잖아요, 내무 생활. 내무실에 있을 때 저는 전혀 애들 터치하거나 그런 게 없고,항 상 혼자 책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민선 : 주로 무슨 책을 읽으셨어요?

호민 : 상당히 많이 봤어요. 집에서도 많이 갖고 가고, 애들이 갖고 오는 책도 많고. 책을 왜 많이 읽었냐 하면, 책을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군대가 아니거든요. 그냥 책 속의 그 세계에요. 그러니까 약간 현실도피 같은 느낌도 있고, 시간도 잘 가고 해서요.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책들 있잖아요?' 샘터'나 선교 책자들, 심심하니까 그냥 다 읽는 거예요.

석가 : 하하, 샘터 기억난다. '좋은 생각'도 많이 읽었지. 내가 <짬>을 읽으면서 놀랐던 게 그런 부분들이야. 너무 디테일한 거야. 군 생활을 겪었던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부분을 얘가 마구 끄집어내는 거야. 사실 나도 병과(주 : 훈련소에서 각자 배정받는 특기 분과를 말한다)가 4.2인치 박격포였거든.

호민 : 그래요?

석가 : 그런데 난 기억이 하나도 안 나! 그런데 예를 들어서 포판 (주 : 박격포를 지지하는 원형 철판) 밟을 때 세 명이 어깨동무하고 쿵쿵 뛰는 것 같은 그런 부분 있잖아? 그거 보면서 아 맞다! 이랬지! 싶고. 나도 매일 군에서 일기를 썼는데도 기억이 안 나더라고. 자료조사는 어떻게 했어? 일기를 아무리 자세하게 써도 이렇게까지 나올 것 같지는 않거든.

호민 : 농담이 아니라, 100% 기억에 의존해요.

석가 : 진짜?

호민 : 그러니까 선명한 기억들은 일반 사회에서 정말 보기 힘든 모습들이에요. 예를 들어, 포판 밟을 때 3명이 어깨동무하고 돌아가면서 팡팡 뛰는 거, 그런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어요. 왜냐면 너무 희한하니까.

석가 : 나는 이번에 인터뷰 요청을 하면서 보고 싶었던 게, 네 군 생활 일기였어.

호민 :그런데 문제가, 그 일기를 이사하면서 잃어버렸어요.

일동 : 으악!!

호민 : 일기가 있을 때는 '이것만 있으면 진짜 재미있게 그릴 수 있겠다'이러고 있다가, <짬> 시작하기도 전에 잃어버렸어요. 처음에는 '와~ 어떡하지, 피와 땀으로 쓴 자료인데'싶어 미칠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기장의 내용을 그대로 만화로 옮기기보다는 빈자리를 지금의 제 센스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였어요. 뭐, 잃어버린 제 잘못이죠.

석가 : 아깝다! 그거 누가 주웠을까… 나도 군 시절 동안 일기를 6권 썼는데, 3권은 잃어버리고 3권 밖에 없거든 .그 3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

호민 : 박재동 선생님은 국민학교 때 그린 그림을 아직까지 갖고 계신다잖아요. 지우개에 도장 판 거, 그런 것도 아직도 갖고 계시는데, 지금부터라도 제가 갖고 있는 걸 소중히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중략) 그런 것들 있잖아요, 학창시절 교과서 여백의 수많은 낙서들… 그런 것을 다시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석가 : 맞아, 나는 가끔 내가 나중에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동안 잃어버리고 없어져서 괴롭고 슬펐던 것들, 보고 싶었던 것들을 다 만날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호민 : 와, 저도 그런 생각 했었어요! 지금까지 나의 모든 분실물들이 다 모여 있으면 좋겠다! 라고.

석가 : 비단 분실물만이 아니라, 보고 싶었던 사람, 미안해서 사과하고 싶었는데 못 만난 사람, 이런 사람들도 다 거기 모여 있는 거지. 예전에 그런 소재를 가지고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거든,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

■ "비겁함"호민 : 백수형(트라우마)이 예전에 저에게 조언을 해주시더라고요. 제가 극화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석가 : <무한동력>얘기야?

호민 : 예, 저는 수기(에세이)쪽에 강점을 보이는 것 같다고요. <짬>도 그렇고. 제가 직접 겪은 일을 풀어가는 재주가 괜찮으니까, 20대 중후반의 남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그려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무한동력>이 그런 얘기거든요. 영화 <에스트로넛 파머> 아시죠? 그거랑 비슷해요. 예전 에 한 번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어떤 아저씨가 나왔는데, 무한동력 장치를 자기 집 마당에다 엄청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있는 거예요. 근데 방송국이 좀 잔인한 것이 항상 그런 사람한테 꼭 대학 물리학교수를 데리고 가서 얘기를 해줘요. "이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지만 그 아저씨는 순수하게 자기 신념이 있어서 만든 거잖아요. 그걸 짓밟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만약, 그 대학교수 앞에서 무한동력 장치가 돌아간다면 정말 통쾌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작을 했어요. 꿈이 있고, 그게 설사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계속 믿으면 비록 도달할 수는 없다고 해도 가까이는 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약간 흔한 주제지만, 너무 촌스럽게 주제를 부각시키지 않고 잘만 하면 좋은 만화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살짝 격양된 투로) 요즘 젊은 제 또래들 보면 정말 꿈이 없어요. 그냥 연봉 몇 천, 공무원, 안정된 생활, 그냥 그거잖아요, 지금 원하는 게. 약간 몽상가 같은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돈도 중요하지만 당신이 꿈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해보세요, 그게 <무한동력>의 주제거든요.

석가 : 야! 멋있다, 그거. 꼭 해라!!

민선 : 와~제목도 좋아요. 무한동력.

호민 : 근데 그 주제를 어떻게 하면 은근히 드러낼 수 있을까가 고민이에요. 주제를 너무 부각시키면 촌스럽잖아요.

석가 : 왜 그렇게 생각해?

호민 : 예를 들어,제 여자 친구와 그린 합작이 있는데요, 부모님의 억압 아래 있는 청년 배에 탯줄이 달려있어요. 여자 친구가 고민하는 게, 탯줄 자체가 부모의 억압 속에 있다는 걸 너무 드러내니까 촌스럽지 않느냐는 거죠. 저도 공감 을 하거든요. 그래서 주제를 은근히 묻어나게 하는 부분을 조절하는 게 자꾸 고민이 돼서요.

석가 : 왜… 난 괜찮을 거 같은데?

호민 : 저는 그런 게 싫거든요. '네가 뭔데 날 가르쳐?'이런 거.

민선 : 교과서 같은 만화!

호민 : 네. 그런 느낌.

민선 : 전에 박재동 선생님께서 사랑, 배우자, 돈 같이 인생에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을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석가 : 그러게. 학교에서는 텍스트만 가르치지.

민선 :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게 작가의 몫인 것 같다고…

석가 : 내 생각도 그래. 확 질러 그냥. 너무 은근히 보여주려고 하는 것도 스트레스 아냐.

호민 : 저는 너무 소심한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작가는 몽상가 기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 자신이 원고료나 이런 거에 벌벌 떨면서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과연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석가 : 물론 고료는 무섭지. 하지만 내 생각은, 지금 이 순간에 생각하고 살아있는 의미를 표현하는 건 '지금' 해야 된다는 거야. 주위 친구들이나 학생을 보면 안타까운 것이 자꾸 아끼려고들 한다고. 내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먼 기약 같은 거.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언제 될지 어떻게 알겠어. 그러니까 나는 그런 면에서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막 싸질렀잖아. 연습장 만화 올리고 독자들에게 공감 얻고. 그 순간 형식이라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

호민 : 사실 <짬> 이전에는 삼류만화라는 미명하에 정말 싸지를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어느 정도 작가가 되고 보니까(그게 어려워요.)…. 그 싸지르는 만화가 너무너무 그리고 싶어요.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생각하는 바를 예전같이 막 지르고 싶은데, 그걸 못하겠어요.

석가 : 그런데 저번에 성수형(강도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생각한 건데, 내가 무 슨 성인이 아니잖아. 어차피 사람이란 건 살아가면서 많은 정보를 얻어가면서 스스로 취사시키면서 방향이라는 게 생기고 그런 거 아니겠냐고. 우리가 바라보고 지향하는 좋다고 생각하는 사회는 이런 얘기도 있고, 저런 얘기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평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잖아.

그런 면에서 전혀 너나 내가 부담을 가질 게 아니지. 그냥 자기가 생각하는 얘기를 자기 신념대로 계속 쏟아내면 된다고 생각해. 내가 지금 싼 똥이 냄새가 난다고 해도, 10년 후엔 훌륭한 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지금 쌀 수 있을 때 싸야지.

호민 : 저는 비겁한 생각들이 막… 왼손으로 그려서 익명으로 올려야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석가 : 그건 솔직히 나도 그랬어. 나도 필명을 바꿔볼까? 그러면서 흐흐.

민선 : <윤회의 비밀>이라는 책에, 나쁜 짓을 했을 때 받는 벌 '카르마'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보통 우리는 나쁜 일을 직접적으로 해야만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무시하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그것이 더 큰 죄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석가 : 어떤 현상을 보고 반응을 하지 않거나 피드백을 하지 않았을 때?

민선 : 차라리 나쁜 짓이라도 하면 반성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데, 그대로 계속 있기 때문에… 윤회설의 기본은 영혼이 점점 진화한다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나쁜 거라고, 그게 인상적이었어요.

호민 : 진짜 공감 가는데요, 그거.

석가 : 불의를 보고 반응을 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죄악이 된다는 거네. 와… 나 어떡하냐.

호민 :정말 반응을 하고 싶은데, 비겁한 게 익명으로 하고 싶다.

석가 : 넌 반응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있지, 나는 무식하기 때문에 얘기를 못하는 경우라 내가 더 심각한 거지.

석가 : 정리하는 차원에서 마지막 질문을 하자.

호민 : 뭔 얘기를 했는데 벌써 마지막이죠!!

석가 : 그러게?(수첩을 뒤적이며) 야… 그래도 질문을 꽤 여러 개를 적어왔는데, 얘기 도중에 거의 다 나와 버렸어. 혹시 추가로 하고 싶은 얘기 없어?

호민 : 이 얘길 하고 싶었어요. <짬>이 데뷔작인데, 이 만화가 너무 떠버렸어요. 처음 만화인데 독자 만화대상 신인상도 받고, 첫 작품으로는 쉽지 않은 단행본도 나오고, 너무 벙벙한 거예요 .만화라는 게 쌓이는 재미가 있잖아요? 책이 되어 쌓이는. 그렇게 차곡차곡 나아가야 하는데, (한방에)너무 높이 쌓여버렸어요. 그래서 후속작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커요.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게 있잖아요? 1집 대박 난 가수는 2집에 대한 부담감이 배가 돼서 부진하기도 하고, 어떤 가수는 자살도 했잖아요. 제 경우에는 군대 이야기가 특화가 되는 바람에 지금도 '예비역의 수다'라는 이름으로 실상 <짬2>를 연재하고 있는데, 이미지 자체가'주호민이 얘는 뭐 군대 얘기 밖에 할 게 없나'라고 굳어져 버린 거죠.

다른 얘기도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운데 <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봐 겁도 나고. 그게 벽이 됐어요. 사실 <짬> 할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처음에 시작할 때 1화부터 50화까지의 내용을 모두 써놓고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작업하는 날이 되면 '아, 어제 이 내용을 그리기로 했지'하고 그리면 됐었는데, 지금(<짬2>를 연재하고 있는 시점)은 정말 밥솥의 밥 다 퍼먹고 누룽지를 긁고 있는 기분이에요.

소재가 없어요. 그래서 고통스러워요. 만화는 즐기면서 그려야 재미있는 것인데… 막 긁어요. 친구들에게 '군대 얘기 좀 해줘', '군대에서 재미있었던 일 없냐'고(물어보는 게 일상이 돼버렸죠)…. 하지만, 저는 지금 이게 작가로써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비겁하다고 생각하는데, 난 아직 젊어, 난 아직 20대야. 그런 식으로 자위도 하고,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난 왜 이렇게 비겁한 걸까 생각도 하고 그래요. 하하 .

석가 : 음… 네 인생은 비겁해 지지 않기 위해 달려가는 과정인 거구나? 하하하(모두 웃음).

인터뷰(라기 보다 술자리)를 정리하면서 문득, 필자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마루코는 아홉 살>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치의 비겁함을 고치는 모임'이라는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내용 중주인공 마루코의 친구인 미치는 평소 비겁한 성격으로 친구들의 핀잔을 받는 캐릭터다. 그의 비겁함을 보다 못한 친구들은 급기야 미치의 비겁함을 고치기 위한 엉뚱한 모임을 결성하고, 여러 의견을 내놓는다.

티격태격하는 동안 누구나 단점을 한두 가지씩 가지고 있고, '비겁함'도 그런 단점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단점도 관점에 따라 훌륭한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얼핏 '맹랑한 녀석들이네'라며 웃고 지나칠만한 평범한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스치듯 지나간다. 극의 초중반, 반에서 인기가 많은 오노와 유즈 콤비가 '비겁함을 고치는 모임'을 무관심하게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장면이다.

"아무렴 어때, 내 일도 아닌데. "작가와 연출자가 굳이 왜 이 장면을 집어넣었을까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 게 소름이 돋는다. 스스로 비겁하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는 이와 남이야 어떻든 자신의 할 일만 신경 쓰는 이 중 누가 더 비겁한 걸까? 말마따나 '카르마'의 무게는 누구에게 더 지워지는 것일까? 또는 지금까지의 완벽함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생과 지금까지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는 인생 중 어느 것이 더 재미있고 다이내믹한 인생인 걸까?

스스로의 단점을 알고 있다는 것은, 단점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우리의 앞길엔 군대 이야기만큼이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일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 모두의 비겁함을 위하여 건배!

석정현 월간 CGLAND 필자(http://www.cgl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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