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왜 폐비윤씨에 집착했나(역사극 다이어리)

[김형우의 역사극 다이어리 17]
'왕과 나'가 최근 소화(폐비윤씨, 구혜선 분)의 애절하면서도 고고한 죽음을 그리며 본격적인 연산군 일대기를 그릴 예정이다.
사극불패코드로 통하는 연산군(정태우 분) 때문인지 '왕과 나'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도 어느때보다 크다. 네티즌들은 소화가 죽음에 이르자 연산군이 보여줄 피의 복수를 '연산군 데스노트'라고 명명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연산군은 한국역사상 최고의 폭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친모인 폐비윤씨가 연산군의 광폭함을 끄집어냈다는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언제나 흥미를 돋구는 대목이다.
수많은 사극과 영화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뼈에 사무친 그리움을 토해내던 연산군. 과연 연산군은 왜 이토록 폐비윤씨에 집착했을까?
● 폐비윤씨,연산군 이해하기 힘든 죽음과 폭정
연산군의 폐비윤씨 컴플렉스를 논하기 앞서 연산군과 폐비윤씨가 처해져있던 시대상황을 정확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가들 대부분은 폐비윤씨의 죽음에 대해 "정치권력싸움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폐비윤씨를 단순히 '투기'라는 죄악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당시 조선권력 정점의 왕실엔 인수대비가, 조정엔 한명회가 서있었다. 인수대비가 보인 권력욕은 이미 알려진만큼 대단함이 넘쳐났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예종독살론의 숨겨진 배후라고 점쳐질 정도로 왕권소유에 대한 욕심은 여러 정황으로 쉽게 포착된다.
폐비윤씨는 이런 인수대비를 거부한 듯 보인다. 인수대비의 독점권력에 맞선 것이다. 그러나 거대권력가인 인수대비와 배경없는 폐비윤씨의 싸움은 제대로 맞붙어보기도 전에 폐비와 사사라는 윤씨의 철저한 패배로 끝났다.
권력의 핵 한명회 역시 폐비윤씨를 바라보는 눈이 달갑지 않았을 터다. 자신의 딸인 공혜왕후가 죽은 자리를 이은 윤씨는 분명 내라인의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윤씨가 떠오르던 사림파와 손을 잡을 경우 자신과 훈구파에게 닥칠 위기도 예견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연산군이 세자자리에 올랐다. 일부 사가들은 성종이 폐비윤씨에게 보였던 가혹한 처사는 인수대비와 한명회가 쏟아낼 공격을 차단하려는 처사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모든 죄를 폐비윤씨에게 돌림으로써 연산군을 보호하려 했다는 의견이다.
● '연산군 피의 복수' 친모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VS 왕권강화 정치적 행보
결국 연산군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은 '죄인의 자식'이라는 꼬릿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이는 분명 왕권강화를 최우선 목표로 삼던 연산군에게 커다란 짐이었다. '어린조카를 죽인' 세조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도 죽는 그날까지 그 꼬릿표에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몇몇 역사가들은 연산군이 보인 폐비윤씨를 위한 복수전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인 술책이었다고 말한다.
'죄인의 자식'으로는 절대권력을 소유할 수 없는데다 언제든지 왕위를 뺏길 명분을 내줄 수도 있었다. '사사된 폐비윤씨 아들' 은 연산군에겐 잊고 싶은 단어였고 '복위된 중전의 아들'은 연산군이 왕권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는 실록의 여러 기록을 바라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한때 '억울한 어머니를 위해' 칼날을 휘둘던 연산군은 치세말기 윤씨 제삿날에도 기생들과 술판을 벌였다.
결국 '폐비윤씨 복수전'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고 강화하기 위한 술책이었을 뿐, 어미잃은 슬픔으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분석도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을 논하매 있어 폐비윤씨를 빼놓을 순 없다.
실록을 비롯한 여러 정,야사서에는 연산군이 얼마나 폐비윤씨를 그리워했는지 적고 있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엄했던 아버지 성종, 언제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인수대비 그리고 세자 자리를 위협하던 훈구세력에 대한 뿌리깊은 미움이 폐비윤씨 사사로 인해 폭발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는 폐비윤씨 사사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한 이들은 잔인하게 죽인 점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폐비윤씨의 정적이던 엄귀인과 정귀인에겐 그녀들의 아들들이 매질을 해 죽게 만들었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칼을 들고 인수대비를 위협했다고 하고, 야사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발길질을 했거나 이마로 박치기를 했다고 한다.
한명회를 비롯한 당대 고관들은 부관참시를 당해 두번 죽었고 윤씨의 폐비를 막지않았다는 이유로도 많은 관료들이 죽어나갔다.
이 뿐아니다. 연산군은 폐비윤씨가 고려 공민왕의 비 노국공주와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전국에 있는 노국공주그림을 모았다고 한다. 연산군이 폐비윤씨를 얼마나 그렸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분명 연산군의 폐비윤씨에 대한 집착은 단순히 정치적인 면이나 감정적인 면, 하나로만 설명하기 힘들다.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맞물리며 벌어진 역사 속 비극으로 바라보는 것이 옳다.
한편 월화드라마 '왕과 나' 52회가 25일 오후 9시55분 방송된데 이어 53회가 26일 오후 방영된다.
(사진설명=1998년 방송된 KBS 1TV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채시라-안재모)
김형우 cox109@news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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