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의 세상'그 신성한 힘

2007. 8. 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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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 [난이도 = 고등]

김수정의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그냥 소리 내어 웃고 싶을 때가 있다. 가만히 있어도 헉헉 지치는 한낮의 여름, 사는 게 하나도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면 입에서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외로운 둘리는 귀여운 아기 공룡. 호이 호이, 둘리는 초능력 내 친구."

둘리가 외롭다는 것을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만화의 내용이 밝고 재미있어서 미처 찾지 못한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어른이 된 지금 발견한다.

둘리는 1983년에 만화책으로 태어나서 1996년 만화영화 '아기공룡 둘리'로 전세계 공룡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되었다. 1억년 전에도 아기였던 둘리가 빙하 타고 한국 쌍문동에 온지도 2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겐 귀여운 내 친구인 것이다.

공룡이 가진 험악하고 공격적인 이미지를 단번에 전복시키며 옆집 아이처럼 친근하게 둘리는 우리에게 왔다. 밥 먹으라는 소리도 귓등으로 흘리며 텔레비전 앞에 바짝 다가가 만화 영화의 세계로 완벽하게 몰입하던 즐거운 시간. 그 안에는 우리 기억 속의 초등학교 앞 문방구처럼 없는 게 없다.

'아기공룡 둘리'는 여느 만화 영화보다 뛰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현실과 불가능이 없는 상상의 시간이 절묘하게 조각보처럼 색색으로 이어져 있다. 만화영화는 빈 꽃병과 같다.

어떤 꽃을 꽂느냐에 따라 무한한 향기와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만화영화를 통해 삶의 어두운 부분을 과감히 생략하기도 하고 웃음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키기도 한다. 어린 시절 폭 빠져들었던 만화의 추억이 장대높이 뛰기 선수처럼 우리의 지루한 일상을 단숨에 훌쩍 뛰어넘게 한다.

둘리의 친구들은 하나 같이 버려지거나 쓸쓸한 처지이다. 둘리는 영이와 철수가 자신을 기쁘게 반겨주었듯이 도우너나 또치, 옆집 사는 가수지망생 마이콜까지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인다. 혈족 중심의 가족이 아닌 열린 가족 관계의 형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둘리의 생각은 길동씨와 마찰을 빚는다.

그러나 길동씨 역시 이 불청객들을 통해 어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착한 본성으로의 회귀를 얻는다. 이 집에서는 아기 희동이부터 어른 길동씨까지 모두 평등하다. 심지어 도우너는 길동씨를 애완동물이라고 부를 만큼 가부장적 권위가 통하지 않는 집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 자식만을 생각할 뿐, 바로 등 뒤에 있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상처는 돌아보지 않는다. 가족이기주의는 어른들에게는 집착과 왜곡된 사랑으로, 아이들에게는 친구를 이겨야 하는 경쟁상대로 만들어버렸다. 이 과정 속에서 고모집에 맡겨진 아기 희동이나 마이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들은 계속 행복한 어느 가정의 주변을 겉돌 뿐이다. 그 집들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그러나 둘리의 초능력은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마법을 건다. '호이 호이'는 고대부터 금기된 주문이다. '호이 호이'를 외치면 위계질서는 사라지고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리는 이런 권력지향적인 사회를 부정하며 서로에게 따뜻한 고향이 되어주는 능력을 가르쳐 준다.

마이콜은 외국인 노동자다. 그는 스타를 꿈꾸지만 불법체류자라는 신분과 검은 피부를 가진 외국인이라서 무시를 받는다. 마이콜의 노래는 80년대의 대표 노래들을 패러디한 제목이다. '아줌마와 구공탄' '그댄 두부를 무척 좋아하나요?'등의 노래는 싱겁고 엉뚱하지만 나이를 초월해 둘리를 스승으로 모시는 순수함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만화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꿈의 자리다. 착한 마음과 서로를 돕고 이해하는, 잃어버린 세상이 여전히 만화영화 속에는 살아있다. 서로에게 고향이 되어주고 엄마가 되어주며 아이들은 만화와 함께 공동체적인 삶의 가치를 배운다. 한때 부당하게 괄시받던 만화가 이젠 당당히 미술의 한 영역으로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며 행복한 우리 만화의 힘을 느낀다.

폭력이 없는 둘리의 세상을 향해 우리도 선풍기를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조용필의 '친구여'를 따라 부르는 둘리, 얼음별을 초록생명의 별로 부활시키는 사랑과 꿈의 주문은 결국 그리움의 발화점인 것이다. 멸종될 운명이었던 아기공룡 둘리에게 엄마가 있는 고향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둘리 곁에는 새 친구들이 살가운 식구가 되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갖는다.

(정지원사진) 둘리와 그의 친구들이 더는 외롭지 않기를. 우리들 사이에 놓인 거대한 빙하 밑에는 말썽쟁이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운 둘리가 잠들어있다. 그리고 또다시 어떤 착한 아이가 둘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문은 열릴 때 가장 아름답다. 그것이 집이든 마음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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