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동헌의 우리 땅 우리 숨결]충남 서천 홍원항

2007. 4. 2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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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바빠졌다. 몸이 근질거리는 것은 둘째치고, 눈만 뜨면 꽃이 어른거려 방구들 지고 누워 있을 수가 없다. 어디로든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것은 그야말로 봄꽃의 책임이며, 봄바람의 책임이다.

봄 주꾸미, 가을 전어로 유명한 홍원항에 들어서니 갯바위에는 사내 세 명이 선 채로 낚시를 던져 놓고 있다. 시원스런 입질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앞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짱'이다.

"잘 잡혀요?"

"그럭저럭요. 뭐, 잡혀야 맛인가요."

낚시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는 데 있다. 고기가 잘 잡히면 잘 잡혀서 좋지만, 그게 신통찮으면 바람 한번 잘 쐤다고 여기는 축이다.

방파제 끝자락의 등대 앞에서는 잠수부 몇 사람이 산소통과 물갈퀴를 벗어놓은 채 돗자리를 깔아놓고 찌개를 끓여 먹고 있다. 어떤 이는 잠수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인적 드문 방파제 아래쪽으로 내려서는데, 어쩐지 희색이 만면하다. 가만 보니, 아이스박스 안에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삼이 만만치 않다. 일당은 하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다. 바다 인삼으로 불리는 해삼, 아이스박스 안에 든 해삼은 검은 기운이 감돌고 탁하다. 일식집에서 보던 뽀샤시한 빛과 사뭇 대조적인 것이, 역시 자연산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나무 위쪽에서는 꽃이 피고, 나무 아래에서는 떨어진 꽃잎이 땅을 덮는다. 마량리 동백숲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아예 멀리 갯바위 낚시를 나갔던 사람들이 낚싯배를 타고 물길을 가르며 항구 쪽으로 들어오는데, 항구에 정박 중인 고깃배에서는 어구를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어떤 이는 비교적 한가하게 시간을 낚고, 어떤 이는 다시 바다로 나가기 위해 어구를 손질하고…. 주꾸미 축제는 끝났지만 출어는 계속돼야 한다. 홍원항이 다시 흥청거리는 것을 보려면 가을 전어축제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니 그때까지 또 부지런히 바다농사를 지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꽃구경하기 좋은 날씨라 해도 노동의 현장은 그래서 엄숙하다.

홍원항은 오른쪽 왼쪽으로 절경을 끼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춘장대와 무창포 해수욕장이요, 왼쪽으로는 그 유명한 마량리 동백나무숲이다. 홍원항에서 주꾸미 맛을 즐긴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해변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은 바로, 홍원항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곳에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 아닌가.

무창포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해변에는 동심이 철철 넘치고 있다. 모래집을 짓는 아이들은 벌써 종아리 위로 바지를 걷어올렸다. 어떤 녀석은 어디서 구했는지 작대기 하나를 들고 국어 공부를 하는 중이다. 가만히 지켜보니 작대기 끝에서 '아버지'라는 글씨가 나타난다. 아마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모양이다. 한 녀석은 모자를 지긋이 눌러쓰고 모래 탑을 쌓는 중이다. 별무늬 셔츠를 입은 모습이 제법 터프해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입심이 요란하다.

◇왜 찍어요? 어른에게도 호통을 치는 동심의 주인공. 모래톱을 쌓기에 열중인 녀석은 벌써 바지를 종아리 위까지 걷어올렸다.
◇해변의 아이들은 봄을 즐기기만 하면 되지만 포구 쪽 식당 주인의 아이는 장사하는 법부터 익힌다. 손님 접대하기 바쁜 어른들 곁에서 벗어난 꼬마가 건어물을 뒤집어 보이고 있다.

"왜 찍어요?"

이런, 거의 맞먹자는 투 아닌가. 문득 말문이 막힌다. 어른들 앞에서도 초상권 문제로 얼굴 붉힌 적이 없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갔을까 말까 한 아이에게서 기습을 당한 기분이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왜 찍긴. 네가 멋있어서 찍은 거야."

녀석, 어쩔 수 없는 아이인지라 더 이상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녀석은 셔터 소리에 모래성을 쌓는 작업에 미세하나마 지장을 받은 모양이다. 어린아이도 신경이 예민할 수 있는 노릇 아닌가. 푸훗,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을 모터 보트에 몸을 싣고 신나라 하는 사람들을 일별하며 달랜다. 한 사람당 만 원씩 받고 10분여를 질주하는 모터보트가 급회전을 거듭해 가며 사람들의 환호성을 낳는데, 아, 봄이 만개했다는 느낌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상가 쪽으로 가니 사정은 달라진다. 식당 종업원들이 사람들이 주문한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사이 꼬마 한 녀석이 흥얼거리며 말린 물고기를 뒤집느라 바쁘다. 가만 보니 함께 놀아줄 친구가 없어 손님 호객하는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녀석의 할아버지가 대견하다는 듯 혼잣소리를 뱉는다.

"저놈이 이 다음에 크면 장사는 잘 할겨."

그러나, 장사를 잘할지는 몰라도 해변에서 마냥 동심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과 섞여 놀아야 할 아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녀석의 해맑은 눈빛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자, 마량리 동백숲으로 갈 차례다. 전국 곳곳의 동백이 제아무리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 해도 마량리 동백숲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 게다가 수백 년씩 된 80여 그루의 동백숲을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는 곳도 마량리 외에는 없다. 선운사의 동백숲이 유명하다고는 하나 거기서는 울타리 너머로 눈요기만 해야 하지 않는가.

◇'휴식은 없다.' 주꾸미잡이에 전념하느라 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쁜 홍원항 어부들이 어구를 손질하고 있다.
◇낚시는 언제나 기다림을 가르친다. 홍원항 방파제 옆 바위에 선 세 남자가 저마다 다른 자세로 대물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다.

마량리 동백숲의 역사는 5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마량의 수군첨사가 꽃 뭉치를 증식시키면 마을에 웃음꽃이 핀다는 꿈을 꾸고 바닷가에 나가 보니 꿈에서 보았던 꽃이 두둥실 떠다니기에 가져다가 심었더니 그게 바로 동백이었다는 전설이다.

안 믿어도 그만인 얘기지만, 마량리 동백숲은 그 후로 마량리 바닷가의 방풍림 역할을 하면서 지금, 봄날의 가장 화려한 생을 지나고 있다. 바닷바람과 맞싸워 자신의 몸을 지탱시키느라 위로 뻗기보다는 옆으로 생장을 거듭한 동백의 몸체는 그 자체로 근육질이다. 그런 몸에서 무더기로 꽃이 피고, 무더기로 꽃이 져 내린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동백나무의 위아래는 멀리서 보아도 선연한 빛의 융단이다. 사람들은 동백숲 여기저기를 거닐며 탄성을 쏟는다.

"세상에, 곱기도 하지."

"곱기만 한 게 아냐. 이거 봐. 아예 동백이 땅을 덮었네."

맞다. 수군첨사의 꿈에 기댄 동백꽃은 나무에도 가득, 땅에도 가득 우리네 꿈처럼 붉게 봄날의 중심을 덮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볕은 더욱 따뜻해지리라. 삶이 아무리 황홀하다 한들, 동백보다 붉을 수는 없다. 삶이 아무리 처연하다 한들 낙화보다 처연할 수는 없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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