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순표 '천일야화'색기 빼도 못말려~

2006. 11. 17.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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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만화 <누들누드>의 작가 양영순에게서 '엽기발랄 성' 이야기를 빼면 뭐가 남을까?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이 억눌러오던 성적 판타지를 기발하게 풀어내며 '만화계의 외계인'으로 불렸던 20대 초반 당시의 양영순이었다면 아마 '단팥 없는 찐빵'만 남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든 양영순은 독자를 유혹할 더 영양가 있는 '단팥'을 개발했다.

어느새 데뷔 10년을 넘긴 중견 작가 양영순씨가 그동안 자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성적인 코미디 단편 만화'와는 정반대의 역작을 들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성적이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으며, 장편인 극화를 시도한 것이다. 하룻밤을 함께 보낸 처녀 1천명의 목을 눈하나 깜짝않고 벴던 폭군의 이야기 <천일야화>다.

양영순의 <천일야화>는 2004년부터 1년 동안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연재했던 장편만화를 6권으로 묶어낸 것이다. 연재 당시 회당 6만여회에 이르는 조회수로 시작해 연재를 마칠 즈음에는 하루 평균 30만명의 누리꾼이 양씨의 이야기에 숨을 죽였다.

제목은 <천일야화>지만 리차드 F. 버턴의 판본으로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는 이야기의 틀거리만 따온 순수 창작 장편 만화다. 왕이 왕비의 외도 때문에 하룻밤을 함께 보낸 처녀들을 매일밤 죽여 정원이 핏빛으로 물들 지경에 이르지만 충직한 신하의 딸이 천일 동안 풀어내는 이야기로 광기를 멈춘다는 틀은 같다. 나머지는 '양영순표 상상력'이 빚어낸 이야기들로 채웠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펼쳐지는 5개의 이야기에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 남녀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진한 형제애 등을 녹여냈다.

그렇다고 내내 뭉클하고 심각하지만은 않다. 때를 놓칠 새라 잠시 방심한 독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유머는 여전하다. 끝을 알 수 없는 그의 상상력도 마찬가지. 판타지 서사물이라는 장르에 걸맞게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마신'을 보기만 해도 움츠러있던 상상력이 기지개를 펴는 느낌이다.

즉물적인 욕망만 뒤쫓는 하급 마신에서부터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예수를 닮은 마신까지, 인간사와 곳곳에서 얽히는 마신의 존재는 눈여겨볼 만하다. 원전에서 이들은 도깨비 같은 존재로 묘사되지만 양씨는 이들에게서 상징적인 의미를 읽어낸다. 살다보면 뜻대로 안 되는 상황,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운명 등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마신으로 형상화한 것이란 해석이다.

다양한 마신 캐릭터는 그 자체로 보는 즐거움을 주지만 양씨는 "어릴 때 보고 자랐던 괴물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며 "계속 마신 개념이 확장돼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마신은 예수를 벤치마킹하기까지 했다"고 귀띔한다. 실제 만화가 인터넷에 연재되는 동안 독자들은 댓글을 통해 마신 개념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 종교 논쟁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다양한 마신은 또다른 '인간'

양씨의 장편 데뷔작인 <천일야화>는 확실히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문화콘텐츠 기획자인 박성식씨는 "이제까지 양영순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고도의 비유와 은유, 미장센으로 이야기하기를 벗어나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를 정면으로 풀어내며 독자들과의 접점을 넓혔다"고 평했다.

사실 예전 양씨는 몇번씩 장편을 시도했지만 몇회를 넘기지 못하고 연재를 접었다. 양씨 본인도 "작품을 시작하고 중간에 잘 접어서 내 별명은 '종이접기 작가'"라고 고백할 정도다.

"단편이 비계덩어리를 모두 제거한 살코기라면 장편은 그 살코기에 양념을 더덕더덕 붙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보니 장편은 살코기만 죽 쌓아올린 '살코기 더미'더라구요."

주3회 140회 연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건 독자들의 성원 덕이 컸다. 독자들은 매회 수백 개에 이르는 댓글로 양씨의 이야기에 화답했다. "처음 인터넷 연재를 시작하고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작가 강풀(강도영)씨에게 물어봤어요. 그때 강풀씨가 독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보면서 느끼는 쾌감에 벗어나기 힘든 중독성이 있다고 했어요.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느낀다고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다시 잠들 때까지 책상에 앉아있어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독자들은 덕분에 훨씬 원숙하고 부드러운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원래 탄탄한 데생으로 그림 실력을 인정 받았지만 <천일야화>에서 그의 그림은 단행본을 '소장본'으로 둔갑시킬 만하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조 속에 펼쳐지는 아랍 문명의 복장과 풍경 등은 매혹적인 스토리 말고도 만화가 주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그러나 양씨는 "이라크 전쟁이 터져 현장 답사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 묘사가 세밀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인터넷에 연재됐던 만화를 단행본으로 옮기는 데는 기술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양씨가 단행본 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업했기 때문이다. 스크린에서 스크롤로 죽 내려서 보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을 책에는 그대로 옮길 수 없었다. 그러나 단행본에는 단행본 나름의 재미를 집어넣었다. 각권 앞에 실린 원로 만화가들의 추천사와 그림, 동료 만화가들의 <천일야화> 패러디 만화는 단행본에서 만날 수 있다. 만화가 탄생하기까지 작가가 고심한 흔적, 아이디어 구상 등을 엿볼 수 있는 제작노트와 뒷이야기도 실려있다.

제작 노트와 뒷이야기도 곁들여

요즘 만화판에서 거의 주류로 떠오른 인터넷 만화는 <누들누드>같은 방식의 짧은 에피소드 위주의 단편, 그리고 강풀이 대표주자로 꼽히는 서사적 구조를 갖춘 장편만화로 나눌 수 있다. 애초 단편 만화의 대명사였던 양씨는 <천일야화>로 장편에도 단편 못지 않은 재능이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두가지 분야를 모두 아우르게 됐다. 양씨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는 장편 서사물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원래 만화의 구상단계에서 <천일야화>는 먼지 폴폴 날리는 <아라비안 나이트> 10권을 그대로 옮긴 '학습만화'로 세상 빛을 볼 뻔했다. 인터넷에서 양씨와 함께 교감했던 독자들과 단행본을 받아보게 될 독자들에게 양영순의 <천일야화>는 여러모로 고마운 선물이 될 것이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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