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오티베큠 '판매왕이 만든 진공펌프 신화'
[머니투데이 박준식기자][[우린 초일류 中企] 국내유일 국산 건식 진공펌프 제조업체]
"'행크'는 우리 동료야. 우리가 제품을 만들면 바로 저 친구가 모조리 팔았던 거라고. 그냥 그저그런 남이 아니란 말이야!( Hank is your colleague. He is the one who has been selling all of your products. Not anybody, somebody, nobody!)"
현지직원들의 리더 격인 대니얼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주변은 크게 술렁였다. 뻣뻣하게 움직이던 미국 직원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행동도 조금씩 변했다. 서로 얘기를 주고 받더니 그날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마침내 교본에 없는 노하우까지 전수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 직원들을 동료라고 여기면서 나타난 변화다.

오흥식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처음에는 설비만 뜯어가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와서보니 기술 노하우는 교본만으로 이뤄진게 아니었다. 막막했다. 게다가 미국인 직원들은 비협조적이었다. 공장을 폐쇄하고 설비를 가져간다니 자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믿고 피츠버그까지 날아온 40명의 한국 직원들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안간힘으로 버티던 날들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일순간 변화했다. 11년 동안 한국에서 뛰어다녔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동안 노력했던 게 헛되지 만은 않았구나." 그는 실감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해야 하나. 절정에 달했던 인생의 고비가 일순간 역전됐다. 현지 직원들과 관계가 좋아지자 일이 풀렸다. 처음에 생각했던 계획들이 눈 앞에서 하나씩 이뤄졌다.
엘오티베큠이 독일 라이볼트베큠(Leybold Vacuum)의 미국공장을 인수하던 과정이다. 국내 유일의 반도체 제조장비용 국산 건식 진공펌프업체로 도약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행크가 날린 홈런들을 기억해봐"
행크는 오흥식 엘오티베큠 사장(45)의 젊은시절 별명이다. 미국 프로야구 홈런왕 행크 아론을 빗대어 라이볼트베큠 본사 동료들이 선물한 애칭이다. 그럴 만도 했다. 오흥식은 매번 기록을 갈아치우는 판매왕이었다. 연초 1억원을 목표로 잡으면 결과는 10배인 10억원에 달했다. 본사에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시장도 스스로 만들어 냈다.
91년 레이볼트베큠의 한국지사에 입사한 그가 판매를 시작한 제품은 반도체 제조장비용 건식 진공펌프. 본사가 개발해 놓고도 영업망이 없어 팔지 못하던 제품이다.

당시 삼성전자나 현대전자, LG반도체 등은 대부분 영국 애드워드의 제품을 썼다. 시장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진공펌프는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수조원 규모인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하다. 주장비도 아닌 보조장비를 검증도 안된 제품으로 교체할 만큼 시장은 관대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신출나기 영업맨 오흥식은 견고한 시장을 뚫고 다녔다. 처음에는 150년 레이볼트의 역사를 내세웠다. 그게 안되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는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했다. 기회가 주어지면 꽉 움켜잡았다. 시험적으로 납품할 기회가 생기면 거래 중 생길 수 있는 품질문제를 철저히 없앴다. 고객과 맺은 약속은 무조건 지켰다. 그는 젊음과 패기를 팔았다.
93년부터 오흥식이 판매한 건식펌프는 매년 100억원 어치가 넘는다. 본사는 '행크'가 홈런을 날릴 때마다 '기적'이라고 얘기했다. 99년 본사는 한국에 건식 진공펌프 조립공장을 세웠다. 오흥식이 제출한 기획안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오흥식은 4년 연속 세일즈어워드를 수상하고 총괄임원으로 승진했다. 노력에 걸맞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인생에 찾아온 갈림길의 선택

기회는 그렇게 노력해온 이의 것이었다. 2001년, 본사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스위스계 투자지주회사 유넥시스(현 올리콘)가 라이볼트베큠을 인수하게 된 것. 유넥시스는 인수후 구조조정 차원에서 건식 진공펌프사업 매각결정을 내렸다. 한국시장은 커가고 있었지만 사업성 자체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사는 독일, 공장은 미국, 시장은 한국에 있던 기형적인 상황이었다. 외부적 요인도 비관적인 판단에 한 몫했다. 미국 공장의 생산성이 갈수록 떨어졌고 2001년 불어닥쳤던 세계적인 반도체 시장 불황이 적자를 늘렸다.
오흥식은 일생일대의 기로에 섰다. 한쪽은 안전해 보였다. 미국 에어 프로덕트와 대만 테코가 매물로 나온 사업부 인수를 희망했다. 두 회사 모두 펌프사업을 인수하면 시장을 개척한 오흥식에게 아시아지역 판매책임자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미래가 보장됐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종업원이었지만 조립공장 등을 한국에 적극적으로 유치한 이유는 남다른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로서 언젠가 기술을 국산화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오흥식은 사업부를 인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라이볼트베큠은 그런 그를 처음 반신반의했다. 100억원이 넘는 인수가격도 문제였지만 사업노하우가 없었다. 행크는 믿음직스러웠지만 종업원과 오너경영인의 차이는 너무 커 보였다. 그 스스로도 갈등이 심했다. 당시 10억원 가까이 모아둔 재산을 재테크로 불리자는 친구의 유혹이 선택을 잠시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는 밀어부쳤다. 전문경영을 위한 지식과 제품개발에 필요한 기술은 미약한 상태였지만 10여년간 쌓은 한국 지사운영의 노하우와 제품유지보수를 통해 얻은 데이터가 있었다. 라이볼트베큠도 어렵게 개발한 기술을 시장에서 경쟁 중인 라이벌에게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오흥식이 그동안 이룬 공헌도를 높이 평가했다.
◇운과 기회는 노력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축복
엘오티베큠의 영문상호인 LotVacuum은 Leader of Technology on Vacuum의 줄임말이다. 진공기술의 리더가 되겠다는 의지다. 오흥식 사장은 창업 후 반년간 40여명의 전직원과 함께 피츠버그 공장으로 떠나 한국으로 기술을 이전했다. 이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 때마다 뜻을 알아준 국내·외 동료들이 그에게 힘이 됐다.
오 사장은 기술이전 후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연구개발에 주력했다. 2003년말 진공펌프 국산화에 성공했고, 삼성전자 협력업체로 선정돼 창업 2년 만에 연 매출 213억원을 올렸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해 지난해엔 코스닥에 상장했다. 지난해 매출은 367억원(순이익 52억원)을 넘어섰고 올해 목표는 예상(447억원)보다 늘어난 5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오 사장은 "성공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운이나 기회를 제대로 알아보고 자기 것으로 붙잡을 의지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기회는 열정과 패기로 맞서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다.

박준식기자 win0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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