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글 쓰기와 함께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2006. 7. 10. 15:2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PC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글을 쓰는 일이다. 회사의 업무를 위한 문서, 이곳에 올리는 기사, 개인 블로그의 글 등 워드프로세싱이 PC의 주된 용도다.

워드프로세서는 정말 편한 도구로 문서 작업 시간을 단축 시켜주고 손이 느끼는 피로도 손으로 쓰는 것보다 훨씬 덜하다. 그러나 나는 가끔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한 글 쓰기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필자도 처음에는 손으로 글을 썼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PC를 사용했지만 그 시절 PC는 워드프로세서 용도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게임이 주된 용도였고, 쓸만한 워드프로세서도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디스켓을 이용한 문서의 저장은 안전성이 떨어져서 선호하지 않았다.

당시 글쓰기의 도구는 연필과 원고지 그리고 연습장이었다. 연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기를 반복해 원고지는 너덜너덜해 지기 일수였고, 연습장은 글씨로 빼곡했다. PC를 이용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PC 통신을 시작하면서부터였는데 94년쯤으로 기억한다. 이 때부터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PC를 이용해 글을 쓸 때 느낄 수 있는 장점은 앞서 말했듯이 속도와 편리함이다. 필자의 평균 타자 속도는 분당 500타 내외지만 그 어떤 인간도 1분에 500개의 문자를 쓸 수 없다. 아마 1분에 100개도 힘들 것이다.

또한 지우개로 글을 지우거나 원고지를 뜯어서 구겨버릴 필요가 없다. 그냥 백스페이스나 Delete 키를 눌러 지우면 된다. 지운 게 아쉬우면 Ctl+Z 키를 눌러 되돌리기(UNDO)를 하면 된다.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하면 제목과 소제목에 여러 서식을 적용할 수 있고 하이퍼링크로 관련 페이지로 이동할 수 있게 하거나 원하는 그림을 삽입하고 간단하게 표를 그려 출판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서를 손쉽게 만들 수 있다.

파일로 저장하고 디렉토리로 정리하니 열람도 쉽고 복제도 간단하다. 이렇듯 PC는 글쓰기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반드시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글쓰기의 즐거움 일부를 담보로 편리함을 손에 넣은 것이다.

워드프로세서를 실행 시켰다. 하얀 공백의 빈문서, 당신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은 제목을 쓸 것이다. 사람에 따라 본문을 쓸 수도 있다. 제목을 먼저 썼다면 제목에 어떤 글꼴을 지정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폰트와 글씨 크기를 고민하면서 이렇게 바꿔보고 저렇게 바꿔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제목의 문장보다도 제목의 모양이 더 먼저 눈에 띄기 때문이다. 서식은 문장을 포장할 수 있게 해줬지만 포장에 가려 글의 내용은 더욱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Backspace와 Delete 키는 손쉽게 문자나 문장을 지울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글 쓰는 이는 아무 고민 없이 문장을 지울 수 있다. 손으로 글을 쓸 경우 지우개나 수정액으로 문자를 지우는 일은 그 자체가 글씨를 쓰는 것보다 힘든 노동이다. 연필로 한 줄 쓰는 것보다 그 한 줄을 지우개로 지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손으로 글을 쓸 때 이미 써놓은 문장을 지운다는 건 상당한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그 만큼 써놓은 문장을 지우거나 고치는데 인색해지고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UNDO를 이용한 되살리기는 이런 현상을 더 심화시킨다. 과거에는 UNDO를 이용해 방금 전 지웠던 단 하나의 문장만 되살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수십 개, 혹은 백 개 이상의 문장을 저장해두었다 마음대로 되살릴 수 있다.

그 만큼 지우는 행위에 대한 부담은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지우는 일이 쉬워지면서 지워진 문장이 PC의 메모리에는 남아 있겠지만 사람의 머리 속에서는 더 쉽게 잊혀져 버린다. 몇 년 전 지웠던 문장이 아쉬워지는 낭만적인 경험은 더 이상 없다.

PC를 이용한 글 쓰기는 손으로 글을 쓰는데도 영향을 준다. 가끔 손으로 노트에 문장의 도입부를 적고 다음 줄을 써 나가려고 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거 글씨가 너무 안 예뻐, 줄도 안 맞아, 글씨 크기도 제각각이야."

사실 이건 글을 쓰는데 그다지 필요 없는 고민이다. 글을 쓰는 주체와 글을 편집하는 주체는 다르다. 저자는 글의 내용을 책임지는 역할이 있지만 PC의 글쓰기는 편집자가 가져야 할 고민의 일부를 저자도 함께 해야 한다. 그렇다고 편집자의 고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칼럼을 연재하는 김상하 씨는 블로그를 통해 만화와 서브컬처를 주제로 블로깅하고 있으며, 각종 미디어에서 IT칼럼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PC를 이용한 글 쓰기의 더 큰 단점은 누구나 손쉽게 아무 때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PC가 가져온 가장 긍정적인 변화이자 가장 부정적인 변화다. PC로 누구나 쉽게 글을 쓸 수 있게 되고, 인터넷의 발전으로 글을 쓸 지면이 늘어나고, PC의 보급으로 어느 곳에서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글 쓰기의 권위는 이미 휴지조각이 되었다. 1류 대학의 훌륭한 교수님보다 가리봉동 영희 엄마의 글이 더 강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변화다. 부정적인 변화는 말할 것도 없이 인터넷에 수없이 떠도는 음해성 글과 각종 악플이다. 이제는 악플이 바이러스나 스팸메일과 함께 3대 인터넷 공해로 불릴 정도다.

고객의 의견을 접수할 때 우편, 전화, 이메일, 게시판 중 가장 공격적인 의견이 많이 접수되는 것은 게시판을 이용하는 경우다. 쉽게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그 만큼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짧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글을 쓰고 이것이 악플이 된다.

PC를 이용해,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글을 쓰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잃어버린 것도 많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주장은 지금 당장 PC를 버리고 연필이나 볼펜을 쥐고 손으로 글을 쓰자는 게 아니다. 그저 한 번 쯤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펜을 버리고 자판을 두드리게 되면서 무엇을 잊었는가를…. 그리고 가끔은 인터넷 선을 뽑고 메모장을 띄운 뒤 글을 써보자. 우리가 잊어버린 게 단순히 글 쓰는 도구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Buzz

김상하 IT칼럼리스트(akachan@paran.com)

쇼핑저널 ebuzz(www.ebuzz.co.kr)

-'No.1 IT 포털 ETNEWS' ⓒ 전자신문 & 전자신문인터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자신문인터넷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http://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 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전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