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에 혼을 심는 도공
'세창도예 연구소는 5천년 민족문화예술의 상징이며 민족의 긍지요 자부심인 고려청자를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청자로 승화시켜가는 곳입니다.세창에서 개발하여 작품화한 여러 가지 문양의 2중 투각 작품들은 청자의 비취색과 섬세하고 세련된 도공의 손과 가슴으로 빚어져 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상감기법을 응용한 작품들과 양각, 음각, 퇴화문기법 등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한 청자들은 세창의 자랑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확신합니다. 2002년 9월 노동부와 한국 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하리에 있는 김세용(59세) 세라믹명장의 세창도예연구소(031-632-7711~3)를 알리는 글이다.
10월 2일 재벌구이 불을 지피는 날에 맞추어 세창도예연구소를 찾아갔다.
김세용 명장의 작업은 워낙 세밀해 한 작품을 한 달 동안 만들 때도 있다. 혼자 작업하느라 1년에 한번 가마에 불 때는 것이 예사다. 전시실과 공방이 있는 이층건물과 안쪽으로 살림집이 있고 그 가운데 가마가 터를 잡고 있다. 청자의 고고한 자태를 탄생시키기 위해 가마는 온통 불길로 채워졌다. 환원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불길이 가마를 빈틈없이 채워야 한단다.
전통공예 중 도자기는 제일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 많아 힘든 작업으로 종합예술이라 일컫는다는 김세용 명장.
"청자는 정직한 자기로 올곧게 정형을 따라 빈틈없이 섬세한 손길로 빚어야 합니다. 형태에서 조각에 이르기까지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해요. 모든 과정이 다른 도자기에 비해 가장 복잡하고 생산 공정도 더딘데다 소성 후 성공 확률도 제일 적어요. 가마요변을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렇듯 완벽을 추구해야하는 청자를 그것도 제작과정이 어려워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2중 투각기법―문양을 따낸 외피와 그릇으로서 쓰임새에 충실한 내피의 이중구조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를 김세용 명장은 이렇게 말한다.
"전생에 고려 도공이었나 봅니다. 청자, 백자, 분청 다 해보았지만, 유독 청자가 나와 잘 맞아요. 청자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은연중 제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지요."
김 명장은 청자를 빚기 위해 흙을 손수 만들어 쓴다.
1300도에서 견딜 수 있는 가소성, 수축성, 점력이 좋아 터지지 않고 잘 만들어지는 흙을 찾아 배합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지질학은 물론, 열팽창, 수축에 관한 역학을 알아야 하고, 흙을 곰팡이가 슬 때가지 숙성시켜 흙이 차져야 도공과 흙이 혼연일체가 되어 흙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유희할 수 있다고 말한다.
5년 정도 숙성시킨 흙은 흙 자체에서 색이 나와 흙과 유약, 물에 따라 각기 저마다의 모습과 색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도자기는 같은 것이 두 개가 있을 수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게다가 김세용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이중투각은 성형과 조각과정이 어렵고 성공확률도 적어 더더구나 같은 작품은 없다. 모두가 저마다의 특징을 지닌 것들이다.
이중투각은 조각, 건조(대작의 경우 지하 작업장에서 1년간 건조), 유약을 입히기 전 초벌구이 등 어느 것 하나 소홀이 할 수 없다. 청자는 유약을 두껍게 바르므로 하루 하나 손질할 때도 있을 만큼 손질에 시간이 많이 든다. 산화-중성-환원을 거쳐 청자 빛이 나오게 되는데, 환원은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불꽃으로 가마를 채워야 한다. 불 때기도 더디고 힘들지만, 10~20%만 작품으로 태어날 수 있어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드는 청자 빚기는 그래서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젊었을 때는 대작을 주로 했으나 요즘은 2중투각의 여러 가지 호(壺)를 만든다. 그의 대작은 10번을 구워 10년 만에 완성한 작품도 있다. 혼자 작업하다보니 한 작품을 한 달 동안 만들 때도 있어 1년에서 1년 반 만에 한 번 가마에 불을 때게 된다고. 다른 사람보다 50배정도 느린 작품 생산이지만 그는 청자를 고집한다.
고려 도공의 환생
김세용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국립박물관에 가서 처음 도자기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소장품 가운데 유난히 도자기가 그의 가슴에 와 박혀 떠나지를 않았다. 박물관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도자기를 보면서 우리 민족이 얼마나 도자기 만드는데 열심이었나를 깨닫고 자신도 도자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오늘의 김세용 명장을 있게 했다.
그러나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1966년 처음 남의 집에 도공으로 들어가 도자기를 배울 때, 분업화로 인해 소성, 성형 , 조각 중 한 가지만 하게 돼 다른 과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일과 후 혼자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연마해나갔다. 전 공정을 혼지 다 할 수 있는 도공은 많지 않지만, 그의 노력과 근면의 결과 혼자 전 공정을 다 할 수 있는 기능을 터득했다.
"참 힘든 시절이었어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면 버티지 못했겠죠. 정말 도자기 만드는 것이 좋아 밤에도 호롱불 밑에서 물레를 돌렸어요. 흙과 싸우다보면 동이 터오곤 했죠."그는 무서운 집념으로 작업에 몰두하여 불과 1년 만에 숙련된 도공에게만 허락되는 조각을 하게 되었고, 78년에는 독립하여 자신의 요장을 차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가 일을 배우던 당시 이천에는 7~8개 도자에 100여명이 도공이 있었다. 부부가 1달간 가마 주인의 일을 해주고 그 삯으로 가마 한 칸을 빌려 작품을 생산하는 처지였다. 다행이 가마 1칸에서 얻은 작품을 판값이 다른 사람 9칸 가마 분 보다 많이 나와 그것이 요장을 개설할 종자돈이 됐다. 그가 청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으로 그 신비한 색채와 세련되고 귀족적인 멋에 반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누가 가르쳐 주거나 책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스스로 깨닫고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도구며 공정을 개선한 것은 자신의 전생이 고려도공이 아니었나 싶은 운명 같은 것이 있어 어렵지만 이루어낸 것 같다고 회상한다. 도자기를 만들며 순간순간 힌트를 얻고 영감을 얻는 것이라든지, 청자와 연이 맞고 느낌이 좋은 것도 그 때문이라 여긴다. 37년 가까이 이 일 하면서 수많은 공정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명장에 선정된 요인이라 생각한다는 김 명장.
공정개선 중 제일 중요한 것이 흙을 만드는 수비과정으로, 먼지가 들어가지 않은 깨끗한 흙을 만들기 위해 비닐로 천정을 만들고 밑에도 대나무 발을 깔아 깨끗하고 좋은 흙을 수비하도록 공정개선을 했다. 휠터 프레스라고 하여 흙물 짜는 기계를 만들어 2시간 정도면 수비할 수 있어 흙 실험하기에 용이하고 좋은 흙을 빨리 만들어 쓸 수 있어 공정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는 또 조선내화벽돌로 가마를 박았다. 망송이 가마는 굽다보면 천정에서 돌, 흙이 떨어져 작품이 망가지므로 고열에도 변함없는 내화벽돌로 가마를 만들었다.
2중투각기법은 속에 도자기를 성형하고 겉에 다시 성형한 도자기를 덧대 무늬를 넣게 되는데 도자기를 아래위로 연결할 때 물결무늬로 절단하여 연결함으로써, 견고하고 표 나지 않으며 실패율을 줄이도록 고안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시유를 할 때도 청자는 두껍게 입혀야 한다. 속 따로 겉 따로 시유해야 도자표면에 유약이 고르게 입혀져 눈물자국 없는 매끈한 작품이 가능하다.
그밖에 성형도구도 개선했다.
김세용씨는 1966년 고려청자에 입문하여 81년 전승공예전 입선을 시작으로, 97 도자기공모전 금상 수상까지 다양한 수상경력과 더불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 '2중 투각국화과형 화병'을 빚어 선물한 투각의 대가로 청강문화산업대학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여러 국제대회 워크숍에 대표작가로 참가했다.
도자기는 불이 빗어낸 보석
흔히들 도자기는 도공의 손에 의해 빚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공의 생각은 다르다. 흙을 반죽하고 유약을 바르고, 무늬를 새기는 것은 그들의 일이다. 하지만 1,300도를 넘나드는 가마에 들어간 도자기가 불속에서 어떤 형태로 빚어지는 지는 불과 도자기만이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지 기다릴 뿐이다.
그는 "고려시대의 청자가 아닌 이 시대의 청자를 만들자"는 일념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고수했고, 90년대 들어 조금씩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작품을 흉내 내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 명장은 자신의 기법과 문양까지도 도용되는 것에 "예술엔 특허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해 일반화시켰다.
김씨는 "적당하게 물결모양으로 외피를 절단하면 된다는 것을 터득하는데 10년 세월이 걸렸다"며 허허 웃는다.이렇듯 어렵고 기나긴 제작과정을 거쳐서 작품으로 남는 것은 10에 채 하나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금강산의 수려한 산세를 담고 있는 '금강산전도'와 '외금강만물상'을 위시한 대작들은 다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작품들이기에 비매품으로 전시실을 지키게 될 것이란다.
창작, 그중에서도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매력과 마력이 있어 한번 빠지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논 · 밭 팔아가며 매달리게 된다. 인류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생명력길고 오묘한 색을 가진 것이 도자기로 빛의 각도 실 · 내외, 전구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흙(地)에 물(水)을 넣고 반죽(風)한 것을 공(空)의 경지에서 나오는 무심으로 빚어 불(火)로 구워내는 도자기는 우주의 근본 5원소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을 형상화 한 것으로 인류와 함께 영원히 존재한다는 김세용 명장. 그는 한 작품을 10년 걸려 만들 때 좌절도 많이 했지만, 완성했을 때의 희열과 보람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말한다.
대작을 소성할 때, 흙의 두께에 다라 온도편차가 달라 15%의 수축이 일정치 않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격어야 했다. 그때 만들며 잘못된 것을 보관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김 명장. 잘못된 것은 무조건 깨버려야 한다는 스승님의 가르침 때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실패 물까지 순서대로 진열하여 문제점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그때는 잘 못된 것을 놔두면 거기에 안주할까봐 가차 없이 깨버려 작업과정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으뜸가는 청자"를 살려야 한다
최근 일본 아이치 현에서 열린 세계도자박람회에 그의 작품 3점이 소장되고, 2중투각매화병이 요미우리신문에 의해 명품으로 선정된 것이 기쁘다는 김세용 명장.
"이중투각의 문양, 형태를 다양화하고 집대성하여 발전시킨 사람으로 만족합니다."
그가 이중투각을 고집하게 된 동기 청자에서 비롯되었다. 김 명장은 청자를 빚으면서 3가지 원(願)을 하게 되었다.
첫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자, 둘 째 섬세하고 정교한 청자, 셋째 크고 웅장한 청자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이 세 가지 소원을 다 이루었지만 마음에 썩 차지는 않는다고. 2중투각기법의 아우트라인은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알고 더욱 정진해 우리의 '으뜸가는 청자'를 길이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이나 중국이 백자나 분청을 잘 만들어내지만, 청자만은 외국의 어느 나라도 우리 것처럼 만들지 못한다. 우리 청자가 세계 으뜸으로, 미술관을 만들어 영구보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김 명장.
아쉽게도 김 명장이 잇고 있는 전통방법은 타산이 맞지 않아 다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전통기법이 뒷전으로 밀려날 위기에 놓여있다. 배우려는 사람도 없어 맥이 끊어질 위기를 맞고 있다. 그나마 50대 이상의 도공들은 직접 보고 배워 전통을 알지만, 그 후 세대들은 몰라 국가는 4·50대 젊은 도공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맥 잇는 데 차질이 없어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고려청자를 두고 볼 때 우리의 도자기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은 틀림없지만, 생산성이나 수출여건 · 교육여건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황입니다."
김 명장은 우리 스스로 도자기 선진국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세계 시장은 일본 · 영국 · 독일 · 중국 순이며 우리나라는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출지원 · 교육시설 확충 · 특구 지정 등의 작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인간국보를 많이 지정해 국가적 재산을 쌓고 있어, 우리도 문화재를 많이 지정해서 인적자원을 두텁게 해 국가재산을 튼튼히 할 필요가 있다고.
위생적인 도자기로 품위 있는 식생활영위를 위한 도자의 생활화가 일반화 되어야 하고, 젊은이들도 도자의 재료나 기구 등이 발달해 작은 공간에서 적은 자본으로 취미를 살리며 공방운영이 가능하다며 도자기의 생활화를 강조하는 김세용 명장.
김 명장의 아들 · 딸과 부인까지 모두 도예를 하는 말 그대로 도예일가다. 아들 창묵(28세)씨는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아버지에게서 도자기를 전수 중이며, 세창도예라고 이름 지은 것도 대를 이어나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과 아들 이름을 각각 한자씩 넣어 지었다.
'자식이 배우겠다고 해 기분이 좋다'는 김세용 명장은 건강하게 오래도록 작품을 만들어 우리 청자를 세계적으로 알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청자사랑을 켜켜이 쌓아가고 있다.
홍창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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