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꽃에게 길을 묻다]<6>히말라야 찔레꽃

2005. 6. 2.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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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붉은 장미의 계절이다. 도시 담장에 늘어져 있는 장미를 볼 때마다 섬에 두고 온 해당화가 생각난다.

같은 장미과이지만 둘은 많이 다르다. 해당화는 분명 장미처럼 세련된 도회 이미지는 아니다.

바닷가 모래땅에서 자라는 그 꽃은 사람 발길 닿지 않는 후미진 해변이나 섬에 가야 만날 수 있다.

분홍 자주 보라색이 섞인 넓은 꽃잎은 시골 여인네 저고리 색깔을 떠올리게 한다.

예전 시골 아낙이 모처럼 장에 가거나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라도 할 때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내 입던 붉은 저고리의 물 빠진 빛깔이다.

모든 꽃들이 여인에 비유되기는 하지만, 해당화에서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여인을 떠올린다.

그것도 순정을 바쳤지만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거나 그마저 포기해야 하는 그런 여인이다.

“백모래 十里벌을/ 사뿐사뿐 걸어간 발자국/ 발자국의 임자를 기다려/ 해당화의 순정은/ 해마다 붉어진다”(이용악, ‘해당화’) 남쪽에서는 서해 최북단, 북쪽에서 보자면 서해 최남단인 장산곶 마루 맞은편 백령도에 다녀왔다. 그 섬에서 해당화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오래전 동해 화진포에서 해당화를 만난 일은 있다. 그때의 기억이 외진 곳에 숨듯이 피어 있는 해당화를 선뜻 알아보게 했다.

백령도 앞바다에 심청이가 빠졌다는 인당수가 있다. 그 인당수 바로 앞에 장산곶 마루가 길게 해무 속에 뻗어나와 있고, 그 뒤편은 황해도 몽금포다. 옹진군에서 심청이를 기리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인당수와 장산곶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섬 언덕에 심청각을 지어놓았다. 그 심청각 오르는 산길에 해당화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하지만 바다와 어울리지 못하는 산길의 해당화란, 백령도 산야에 유달리 많이 핀다는 연분홍 주라꽃 처지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해당화는 바다를 거느려야만 운치가 살아난다.

자갈이 콩알처럼 자그맣고 빛깔도 흑적청황(黑赤靑黃)으로 여러 가지여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콩돌해안으로 갔다. 콩돌은 아랑곳없이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해당화는 쉬 보이지 않는다. 멀리 해안 끄트머리 절벽 아래 언덕에서 홀로 피어 있는 해당화 한 그루를 간신히 발견했다. 그 외로운 여인네를 앞세워 해변을 배경으로 부지런히 사진을 찍다보니 여인의 얼굴이 바다 쪽으로 향해 있어 카메라에는 뒤통수만 잡힌다. 하릴없이 부도덕한 ‘연출’을 감행하기 위해 여인의 얼굴을 카메라 렌즈 쪽으로 돌려놓으려 무심코 가지를 잡았다가 가시에 손가락이 찔렸다. 아프다.

“해당화 해당화 명사십리 해당화야/ 한 떨기 홀로 핀 게 가엾어서 꺾었더니/ 내 어찌 가시로 찔러 앙갚음을 하느뇨./ 빨간 피 솟아올라 꽃잎술에 물이 드니/ 손끝에 핏방울은 내 입에도 꽃이로다/ 바닷가 흰 모래 속에 토닥토닥 묻었네.”(심훈, ‘해당화’) 해당화는 5〜7월 해안에서 주로 핀다. 늦봄부터 피기 시작해 초여름에 절정을 이루다가 여름 다 갈 무렵 열매를 맺는 꽃이다. 해당화는 예전에 우리네 바닷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었지만 요즘은 귀한 존재가 돼버렸다. 해당화 뿌리가 당뇨병에 특효라 하여 너나없이 채취하는 바람에 그리 됐다는 얘기도 있다. 더욱이 해당화는 장미처럼 도시나 가정에서 따로 키우지도 않아, 그저 시나 옛 이야기에 남아 있는 아련한 추억 속 이름일 뿐이어서 젊은 층일수록 그 꽃을 본 이들은 드물다. 해당화는 들국화나 찔레꽃처럼 쉽게 접할 수 있던 토속적인 꽃이었다.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한용운, ‘해당화’)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된다는 마지막 행이 눈물겹다. 눈물에 어룽진 해당화 꽃잎. 해당화는 무심하게 피어나는데 온다던 사람은 여전히 소식이 없다. 말 그대로 그리운 님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지만, 이 시를 쓴 이가 만해 한용운이고 보면 식민지의 암울한 정서 속 눈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독립도 이루었고, 다시 세월이 흘러 간난신고의 현대사를 거쳐왔지만 여전히 해당화는 살뜰하고 그리운 여인네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해당화는 흰 치마를 입고 있다/ 남양주에서 온 그 여자/ 한때 바다와 동거했던 그 여자/ 가녀린 발목에 모래가 묻어 있고/ 달빛을 업고 서 있는 여자/ 알몸이 눈부시다/ 서오릉 언덕 아래/ 해당화를 심은 날 밤/ 밤새도록 파도소리 들리고/ 내 발목에도 모래가 묻어 있다”(김종해, ‘해당화 심던 날’) 시인은 바닷가 어디쯤에서 해당화 묘목을 얻어온 모양이다. ‘바다와 동거했던 그 여자’를 서오릉 언덕 아래 집 뜨락에 심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여인의 발목에 모래가 묻어 있다. 여인은 밤새도록 자신의 몸에 품고 있는 파도소리를 통곡처럼 들려주고, 그 꽃의 그리움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시인도 자신의 발목에 모래를 묻히며 여인에게 다가선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구름도 쫓겨 가는 섬 마을에 무엇 하러 왔는가 총각 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시름을 달래보는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이경재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노래) 대중가요로 접어들어도 해당화는 갈데없는 순정의 여인이다. 이미자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의 가사는 순정하고 애절하다. 섬마을에 부임한 외지 총각, 열아홉 살 섬 여자에겐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자 가슴 뛰게 하는 연모의 정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총각 선생, 언젠가는 철새처럼 떠나갈 운명이고 통통배 뒷머리에서 눈물지으며 여전히 섬에 남아 순정의 세월을 보내야 할 섬 여자에겐 어설프게 마음 주어서는 안 될 대상이다. 그래서 해당화는 어울리지 않게 가시를 줄기에 둘레둘레 심어놓았는가. 석양 무렵 해는 안개에 가려 금방 빛을 잃었다. 3㎞에 이르는 백령도 사곶 해안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군용기가 뜨고 내릴 만큼 모래땅이 단단해서 천연비행장으로 활용하던 곳이다. 사곶 해안 너머 북한 땅 장산곶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장산곶 마루는 인당수를 사이에 두고 해무 속에서 웅크린 소처럼 검은 실루엣으로 누워 있다. 사곶 해안 가로등이 서서히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해당화 두 그루가 어둑한 바닷가 언덕에서 그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국화가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늙은 누님이라면, 해당화는 추억 속 어린 누님 같은 꽃이다. 어두워질수록 더 진한 향은 누님의 지분 냄새를 닮았고, 연분홍 꽃잎 안에 가득 담고 있는 짙고 선명한 노란 수술은 누님의 굵은 눈물방울 같다. 해당화 누님은 인당수를 바라보며 하냥 흔들리는 중이다.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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