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를 되찾자]비운의 간도관리사 이범윤

"청산리 큰 바위 밑에 내 유품이 있으니 광복하면 반드시 찾아오라."간도관리사로 우리 영토와 간도 이주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간도협약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의병장 이범윤. 그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며 남긴 유언이다. 〈뉴스메이커〉는 이범윤의 후손을 만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범윤의 행적을 취재했다.
아직도 일부 백과사전에는 이범윤의 사망연대가 미상으로 기록돼 있다. 사망한 장소 또한 명확지 않다. 서울 동작 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이범윤의 묘비에도 "노령신한촌에서 영면"이라고 적혀 있다. 이범윤이 국내에서 사망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하다는 원칙적인 반박이 있을 뿐이다.
이범윤의 손녀 이규순씨(71)는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것이 또렷하다"며 "1938년 만주에서 온 독립투사와 함께 아버님(이억종. 1958년 사망)이 직접 가서 할아버님을 모셔왔다"고 기억한다. 돌아올 당시 이범윤은 노환이 깊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정신도 맑지 못했다. 다만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면 "청산리에 전투가 많았는데 내 손으로 제일 처음 (고지를) 정복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범윤이 간도에 처음 발을 딛게 된 것은 1902년 5월 22일 고종황제에게서 "간도시찰사"의 명을 받고서다. 그해 6월 간도에 도착한 이범윤은 1년간 조선인 인구 등을 조사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범윤은 1만3천여명의 호적부를 작성해 52책에 담은 뒤, 양국 지도에 기재된 부분을 채집하여 〈북여요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를 정부에 제출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 양태진 소장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북간도 지역 호적부 등의 원본은 이범윤이 훗날 항일무장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남아 있을 개연성이 크다"고 추측했다. 1997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국립극동문서보관소에서 이범윤의 편지와 유품 등을 발굴한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는 "이범윤의 간도관리사 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청 위협으로부터 조선인 보호1903년 이범윤은 "간도시찰사"에서 "간도관리사"로 직무를 바꾸게 된다. 간도지역을 우리 영토로 인식한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에 임명하면서 권능을 상징하는 유척과 마패를 함께 내렸다. 이후 시찰활동에 전념하던 이범윤은 청나라 관리들의 폭정에 맞설 수 있게 교민보호관을 설치하고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한다. 하지만 이는 묵살당했고 이범윤은 스스로 장정들을 모집해 충의군을 꾸린다. 이런 점에서 간도 연구가 김득황 박사는 "스스로 "사포대"로 불린 충의군까지 조직해 청나라의 위협에서 간도 주민을 보호한 의인"으로 그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한다. 청나라와 벌인 감계담판에서 목숨을 걸고 영토를 지켜낸 이가 이중하라면, 간도 거주민의 안위를 직접 챙긴 인물이 간도관리사 이범윤이라는 설명이다.
[북여요람] 원본 보관 됐을지도...1905년 계속되는 청나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정부는 이범윤에게 소환명령을 내린다. 간도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범윤은 이에 불복하고 국외망명을 결심한다. 스스로 조직한 충의군 "사포대"를 이끌고 두만강 건너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이범윤은 이동휘 등과 국내진입을 계획하는가 하면 대한의군부를 조직해 청산리대첩에도 직-간접적으로 참가했다.
이범윤은 이 시기에도 고종황제가 하사한 마패를 사용하며 간도관리사로서 위엄을 갖췄다. 이범윤의 손자 이규대씨(59)는 "할아버님이 사용하던 마패와 유품을 청산리 바위 밑에 함께 묻었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고 했다. 선문대학교 정제우 초빙교수는 "유품을 청산리에 묻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며 "그렇다면 그 시점은 국권을 잃어버 린 1910년 전후가 아니면, 1925년 간도지역에서 신민회 창립에 관여하던 시기일 것이다"고 말했다. 신민회 참의원 원장에 선임되지만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했고 이때 이범윤의 나이가 70세에 이르렀기 때문에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북여요람〉의 원본도 같이 보관했을지 모른다.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은 예전에 이범윤의 측근이던 김홍일 장군에게서 "이범윤 선생은 항상 등에 큰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녔는데 귀한 것이라며 절대 내려놓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아마도 호적보나 지적보 아닐까 한다"는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고국에 돌아올 때는 빈손이었으니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당시 청산리에 함께 보관하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이다.
1940년 10월 2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39번지에서, 이범윤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일본 형사들의 감시 탓에 주변에 알리지도 못하고 장례는 조용히 치렀다. 민족을 위해 일생을 투신한 애국지사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1968년 이범윤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하지만 이는 허묘다. 이범윤의 유해는 장례를 치르고 화장됐으며 자손들도 수습된 곳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선산이 있는데도 화장을 하게 된 것은 당시 생활이 어려워 상여를 꾸밀 여유도 없었지만 독립운동가라는 게 알려지면 자손들에게 그 화가 미칠까 걱정했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이규대씨는 말끝을 흐렸다. 이범윤은 해방된 강토에도 편히 쉴 땅 한 평 차지하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6척 장신에 기골장대했던 이범윤 아직까지 이범윤의 사진은 발견된 것이 없다. 아마도 만주와 연해주 곳곳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했고 유품도 청산리 어느 곳엔가 묻어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범윤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규순씨는 "할아버님은 고령에도 눈썹이 짙고 검었는데 흰눈썹이 양쪽에 하나씩 길게 났고, 양미간 약간 위쪽에 새끼손톱만한 사마귀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규대씨는 "6척 장신에 기골이 장대했으며, 간도에서 산삼을 드신 후에 눈이 붉어져 "홍안장군"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이범윤이 간도관리사로 있을 때 청나라 관헌들은 그를 맹호 이상으로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범윤이 귀국한 뒤 그의 가족은 숨소리도 못내고 살았다. 일본 형사들이 집 주변을 항상 감시했다. 그들은 가끔 집 밖에 나온 어린 규순씨를 붙잡고 이것저것 추궁도 했다. 어리지만 분별이 있던 그녀는 한번도 할아버지의 일을 말한 적이 없고,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이범윤은 죽을 때까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국내에서 지낼 수 있었다.
당시 이범윤의 가족과 후손은 미곡상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이규순씨는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아버님을 불러 유공자로 대우하겠다고 제의했으나, 할아버지를 팔아 살지는 않겠다며 거절한 일도 있다고 했다. 이규대씨는 "국가에서 학비를 면제해주지 않았으면 학업도 제대로 마치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상하며 "할아버님 영향으로 큰형은 한국전쟁 때 군에 들어가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국가에 봉사했고, 나도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대령으로 예편했다"고 했다.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럼프 “향후 2~3주, 극도로 강하게 이란 타격할 것…논의는 계속”
- 홍준표 “김부겸 지지”, 김부겸 “홍 전 시장 만나고 싶다”
- “동아리 떨어졌어요, 생기부 어쩌죠?”…대입 준비로 동아리 면접 보는 아이들
- [편집실에서]기름진 탐욕이 부른 참사
- [취재 후]AI, 잘 알지도 못하면서
- “부디 나에게 이러지 말아요”…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기자회견
- BTS는 되고, 백기완은 안 된다? 광화문 광장을 점령한 플랫폼 권력
- 추미애 직행이냐 대역전극이냐…민주당 경기도지사 경선 관전법
- “조국·한동훈 와서 빅매치 되면 주민들은 즐겁지”…부산 민심 르포
- ‘4세·7세 고시’ 막았더니 토플 점수 내라?…‘유아 영어 사교육’ 규제 효과 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