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27>채용신 '최익현 초상']74세 노인의 이글거리는 눈빛..우국지사의 기개를 담다
극세필 화법으로 세밀히 묘사
황색 곤룡포 차림의 '고종 어진'
황제의 위엄 고스란히 전해


1850년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난 채용신은 어려서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고는 하나 곧장 화가가 되지는 않았다. 37세 때 무과 급제로 벼슬길에 올라 49세까지 무관으로 재임하다 퇴직해 할아버지의 고향인 전주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종종 그림을 그려주던 채용신의 실력이 서울까지 소문이 나 여러 신하를 통해 고종에게 추천됐던 것이다. 조선 시대 초상화의 제1원칙은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時他人·일호불사 편시타인)’였는데 채용신의 극세필 화법은 그의 호 석지(石芝)를 따 ‘채석지 화법’이라 불릴 정도였다.

유교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근대인으로서의 도전정신을 곳곳에서 보여준 채용신은 여성 초상화도 적극적으로 그렸다. 그전까지 여인이 단독으로 주인공인 초상화는 극히 드물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운낭자상’은 평안도 가산의 관청에 소속된 기생 최연홍을 그린 것이다. 27세 때인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 때 군수를 도운 공으로 기생 신분에서 풀려나 논과 밭고 하사받은 인물이다. 그녀를 기리는 목적으로 제작된 듯한 이 그림은 사내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성모자상(聖母子像)을 떠올리게 한다.
말년의 채용신은 신문물인 사진술을 그림과 접목해 더욱 사실적인 초상화를 더 많이 그릴 수 있었고 ‘채석강도화소’라는 회화공방을 차려 초상화를 주문제작하기도 했다.
근대사의 상처를 인물화를 통해 남기려 애썼던 채용신은 고종어진을 그릴 때의 자세도 남달랐다. 왕의 얼굴을 자꾸 쳐다보는 게 송구해 화원들이 종종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는 어진 도사 자리에서 채용신은 도발적인 청을 올린다. 어진 초본을 가져가고 싶다고 한 것이다. 조선의 전통에서 볼 때 어진이란 왕이나 왕실 그 자체였기에 외부로의 유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고종이 이를 허락했다. 그리하여 채용신은 고종의 어진을 원하는 민간에게도 그림을 제공할 수 있었다. 전인지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관은 “채용신의 고종어진은 기존에 어진이 가졌던 의미가 바뀌어 누구나 모시고 싶어하고 모실 수 있는 숭모의 대상으로 ‘저변화’됐다는 것”을 강조하며 “고종어진의 초본을 유출해 민간 수요에 부응해 제작했기에 이같은 저변화를 촉발했고 이 점에서 채용신의 인물화가 근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고종은 어진을 미화하는 기존의 관례를 마땅치 않아했다. 원래 고종의 어진을 그린 도화서 화원은 철종어진과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 등을 그린 이한철이었는데 고종은 그가 그린 자신의 초상 3점을 세초(洗草)하라고, 즉 없애버리라는 명을 내렸다. 아마도 이한철은 그간 전해오던 전통에 따라 왕을 다소 이상화하고, 미화하고 과장해 표현했지만 그것이 고종의 뜻과 달랐던 모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고종 어진’이 그렇게 제작된 채용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용상에 앉은 고종은 왕의 상징인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정면을 응시한다. 옆 얼굴이 반쯤 보이게 비스듬히 앉은 이른바 ‘얼짱각도’가 보기에도 좋고 그리기에도 용이하지만 고종은 정면상이다. ‘승정원일기’ 등에 따르면 왕이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어진으로는 가장 바람직하다고 전한다. 전하는 조선 왕의 어진 중 청색 곤룡포를 입은 태조, 적색 곤룡포 차림의 영조와 달리 고종은 황색 곤룡포를 착용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공식적으로 고종의 지위는 중국 황제와 대등하게 격상된 만큼,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 곤룡포를 입게 됐다. 이렇게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인물을 크게 그리고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사실적으로 얼굴을 묘사하는 것이 채용신 초상화의 특징이다. 광대뼈나 이마 등 튀어나온 부분은 붓질을 덜 해 밝게 도드라지고, 움푹 들어간 코와 눈 주변에는 붓질을 더해 약간 어둡게 그렸다. 음영을 이용해 입체감과 사실성을 끌어올리는 기법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고 이 점이 채용신을 근대기의 중요한 인물화가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패인 눈두덩이 때문에 다소 지친듯한 인상이 있지만 피부색을 엷고 환하게 그린 덕에 전체적으로 온후한 느낌이다. 옥대(玉帶)는 가슴 위로 높이 올려 찼고, ‘임자생 갑오등극(壬子生 甲子登極)’이라 적힌 글씨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무릎 사이의 호패는 큼지막하게 그렸다. 신분증 같은 호패를 크게 보여준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바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양 무릎을 짚은 두 손의 표현도 눈여겨봐야 한다. 조선미 성균관대 미술학과 교수는 저서 ‘왕의 얼굴’에서 “이 작품은 이제까지 공수자세를 취해 소매 바깥으로 나온 적 없던 손이 실감나게 묘사된 점과 호패가 등장한 점, 황제를 표상하는 황색 용포를 입은 점 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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