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NBA]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뛰었던 남자, 앨런 아이버슨!
양준민 2017. 12. 3.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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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이 명언의 주인공은 자신의 말처럼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농구를 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NBA 리그를 지배했던 불세출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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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양준민 기자]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이 명언의 주인공은 자신의 말처럼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농구를 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NBA 리그를 지배했던 불세출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신장은 코트 위에선 가장 작았다. 하지만 마치 그 차이를 비웃기라기도 하듯 장신 선수들을 농락, 어느 누구도 쉽게 그를 막아 세우지 못하는 등 경기에 끼치는 영향력만큼은 여느 장신 선수들 못지않았다. 특히, 그의 폭발적인 득점력과 크로스오버 드리블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볼 핸들링은 매 경기 TV와 경기장에서 그를 지켜보는 팬들을 열광시켰고, 마찬가지로 한국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이쯤 되면 다들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필자가 소개하려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NBA 역사상 최고의 득점기계로 평가받고 있는 앨런 아이버슨(42, 183cm)이다.(*아이버슨 정규리그 914경기에서 평균 26.7득점(FG 42.%), 플레이오프 71경기에서 평균 29.7득점(FG 40.1%)을 기록했다)
아이버슨은 1996년부터 2010년까지 14년간 NBA 코트를 누볐다. 하지만 그 역시도 리그 우승 경험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다. 심지어 파이널 진출 경험도 딱 한 번뿐이다. 또, 팬들의 호불호도 분명히 갈리는 선수로 “독단적인 플레이로 팀 분위기를 망가뜨리고 팀원들의 경기력을 떨어드린다”는 등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득점왕 4회, 정규리그 MVP 1회, 3번의 NBA 올-퍼스트 팀 선정 등의 기록이 말해주듯 그 역시도 NBA 리그를 대표하는 전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예로 지난 2016년, 명예의 전당에 그 이름을 올리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설들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2016년 명예의 전당에는 아이버슨과 함께 야오밍, 샤킬 오닐, 컴버랜드 포지, 쉐릴 스웁스, 젤모 비티가 이름을 올렸다)
2010년 친정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끝으로 NBA 경력을 마무리, 잠시 유럽에서도 선수생활을 이어갔던 아이버슨은 2013년, 공식적으로 농구화를 벗고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은퇴식 당시 “내 평생 모든 것을 농구에 바쳤다. 농구에 대한 내 열정은 계속해 코트 위에 있지만 지금의 나는 농구를 하고 싶은 열망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됐다. 돌이켜보면 정말 위대한 여정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던 아이버슨은 최근 농구에 대한 열정을 다시 찾은 탓일까. 지난해 3대3 프로리그인 BIG 3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선수시절과 비교해도 전혀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는 등 잠시 시들었던 농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은퇴 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장은 코트 위에선 가장 작았다. 하지만 마치 그 차이를 비웃기라기도 하듯 장신 선수들을 농락, 어느 누구도 쉽게 그를 막아 세우지 못하는 등 경기에 끼치는 영향력만큼은 여느 장신 선수들 못지않았다. 특히, 그의 폭발적인 득점력과 크로스오버 드리블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볼 핸들링은 매 경기 TV와 경기장에서 그를 지켜보는 팬들을 열광시켰고, 마찬가지로 한국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이쯤 되면 다들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필자가 소개하려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NBA 역사상 최고의 득점기계로 평가받고 있는 앨런 아이버슨(42, 183cm)이다.(*아이버슨 정규리그 914경기에서 평균 26.7득점(FG 42.%), 플레이오프 71경기에서 평균 29.7득점(FG 40.1%)을 기록했다)
아이버슨은 1996년부터 2010년까지 14년간 NBA 코트를 누볐다. 하지만 그 역시도 리그 우승 경험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다. 심지어 파이널 진출 경험도 딱 한 번뿐이다. 또, 팬들의 호불호도 분명히 갈리는 선수로 “독단적인 플레이로 팀 분위기를 망가뜨리고 팀원들의 경기력을 떨어드린다”는 등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득점왕 4회, 정규리그 MVP 1회, 3번의 NBA 올-퍼스트 팀 선정 등의 기록이 말해주듯 그 역시도 NBA 리그를 대표하는 전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예로 지난 2016년, 명예의 전당에 그 이름을 올리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설들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2016년 명예의 전당에는 아이버슨과 함께 야오밍, 샤킬 오닐, 컴버랜드 포지, 쉐릴 스웁스, 젤모 비티가 이름을 올렸다)
2010년 친정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끝으로 NBA 경력을 마무리, 잠시 유럽에서도 선수생활을 이어갔던 아이버슨은 2013년, 공식적으로 농구화를 벗고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은퇴식 당시 “내 평생 모든 것을 농구에 바쳤다. 농구에 대한 내 열정은 계속해 코트 위에 있지만 지금의 나는 농구를 하고 싶은 열망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됐다. 돌이켜보면 정말 위대한 여정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던 아이버슨은 최근 농구에 대한 열정을 다시 찾은 탓일까. 지난해 3대3 프로리그인 BIG 3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선수시절과 비교해도 전혀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는 등 잠시 시들었던 농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은퇴 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아이버슨,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농구 선수의 꿈을 키우다!
1975년 6월 7일,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난 아이버슨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체 자랐다. 그의 어머니, 앤 아이버슨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아이버슨을 낳았고 아이버슨과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만 했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아들의 경기를 지켜봤고 아들이 농구선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없는 살림 속에서도 나이키 농구화를 선물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아이버슨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 아이버슨이 농구선수의 꿈을 키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다름 아닌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버슨은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와 농구에 모두 재능을 보였다. 농구팀에서는 신장의 한계가 있다 보니 주로 포인트가드로 활약했지만 반대로 미식축구팀에서는 쿼터백, 킥 리터너, 디펜스 백 등 다양한 역할들을 맡으며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미 1학년 때부터 주전 한 자리를 차지했던 아이버슨은 2학년이 되자마자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 미식축구팀과 농구팀 모두를 버지니아 주 챔피언으로 이끌기도 했다. 당시, 아이버슨은 농구와 미식축구, 두 부문 모두에서 올해의 고등학교 선수상까지 수상, 일약 팀 내의 최고 스타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인생은 호사다마라고 잘 나가던 아이버슨에게 시련도 있었다. 바로 대학진학을 앞두고 볼링장에서 친구들과 놀던 중 폭행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던 것. 다행히 주변 지인들과 가족들의 도움으로 무죄를 선고받기는 했지만 이 때문에 아이버슨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대로 나빠지면서 대부분의 명문 대학들이 그의 스카웃을 꺼리는 등 농구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에 아이버슨의 어머니가 직접 나서 당시, 조지타운 대학의 농구팀을 맡고 있던 존 톰슨 주니어를 찾아가 아들을 한 번만 만나 달라 사정을 했고, 어머니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존 톰슨은 아이버슨과 면담을 가진 후 아이버슨의 스카웃을 결정, 우여곡절 끝에 아이버슨은 대학무대를 밟을 수 있게 됐다.
대학무대에서도 아이버슨은 거침이 없었다. 대학교 1학년 첫 해, 아이버슨 NCAA 리그 30경기에서 평균 20.4득점(FG 39%) 3.3리바운드 4.5어시스트를 기록, 빅 이스트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팀을 NCAA 토너먼트 16강으로 이끌기도 했다. 대학생활의 마지막 해였던 2학년 때도 37경기에서 평균 25득점(FG 48%) 3.8리바운드 4.7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대학 2년 동안 67경기에서 평균 23득점(FG 44%) 3.6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올리면서 조지타운 대학 농구부의 최고의 스타로 활약했다. 결국, 대학무대도 좁다고 생각했던 아이버슨은 2학년을 마친 후 NBA 진출을 선언, 조지타운 농구부가 창설된 이래 처음 얼리로 신인드래프트에 나간 선수에 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96년 NBA 신인드래프트는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아이버슨을 비롯해 코비 브라이언트, 스티브 내쉬, 레이 알렌, 스테판 마버리 등 리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들이 대거 나왔던 드래프트였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아이버슨은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부름을 받으며 전체 1순위의 영광을 차지, 동시에 NBA 역사상 최단신 1순위라는 진기록까지 함께 세웠다. 무엇보다 1990년대 NBA는 지금과 달리 빅맨들이 강세를 보이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쟁쟁한 빅맨들을 제치고 단신 가드인 아이버슨을 지명한 것부터가 농구 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2009-2010시즌 SK 나이츠에서 뛰던 사마키 워커도 당시 전체 9순위로 댈러스 매버리릭스의 지명을 받았다. 참고로 당시 13순위는 코비 브라이언트였다)

▲겁 없는 신인 앨런 아이버슨, ‘NBA 최고의 자리’를 탐하다!
아이버슨 등장 이전, 단신 선수로는 마이클 아담스(54, 178cm)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아담스에게 폭발적인 득점력은 없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슛을 밀어 넣는 이른바 ‘푸쉬 샷’이라 불렸던 특이한 슛폼과 함께 번뜩이는 재치들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아담스는 당시 리그를 대표하던 저니맨 중 한 명으로 11년의 선수생활 동안 그가 수집했던 유니폼의 개수만도 무려 6개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아담스는 1996년, 샬럿 호네츠를 끝으로 농구화를 벗었고 당해 연도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입성한 아이버슨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계속해 리그에서 단신 선수 센세이션을 이어가게 됐다.(*아담스는 정규리그 653경기 출장 평균 14.7득점(FG 41.5%) 2.9리바운드 6.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드래프트 당시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NBA에 입성한 아이버슨은 데뷔 시즌부터 거침없는 언행과 함께 마이클 조던, 레지 밀러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아성에 겁 없이 도전장을 던지며 호평을 받았다. 그중 아이버슨이 조던을 크로스오버 드리블도 완전히 제치고 득점을 올리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날 아이버슨은 시카고를 상대로 37득점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5경기 연속으로 +40득점을 기록, 윌트 체임벌린이 보유하고 있던 연속 +40득점 기록까지 깨는 등 데뷔 시즌 평균 23.5득점(FG 41.8%) 4.1리바운드 7.5어시스트라는 숫자를 기록지에 남기며 그해 신인왕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당시, 아이버슨의 활약에 대해 다른 선수의 칭찬에 인색한 조던조차도 “내가 저 나이 때도 아이버슨만큼 하지는 못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는 후문.(*체임벌린은 데뷔 시즌 3경기 연속 +40득점을 기록하며 아이버슨 이전까지 이 부문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아이버슨의 활약에 힘입어 하위권에 쳐져 있던 소속팀 필라델피아는 1996-1997시즌 22승 60패를 기록, 이는 전 시즌보다 4승이나 늘어난 숫자였다. 아이버슨의 가능성을 확인한 필라델피아는 1997-1998시즌 개막을 앞두고 과감히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이들이 던진 승부수는 다름 아닌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사임한 래리 브라운 감독의 선임과 함께 테오 래틀리프, 애런 맥키, 에릭 스노우의 영입 등 본격적으로 아이버슨을 위한 팀을 꾸리기로 결정했던 것. 그중 아이버슨의 농구인생에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브라운 감독의 필라델피아행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NBA를 대표하는 용장이자 지장이었던 브라운은 수비적인 농구를 지향하는 등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진 감독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브라운 감독이 폭발력 있는 득점력에 반해 수비에서 약점을 가진 아이버슨을 어떻게 활용할지와 함께 개성이 강한 아이버슨을 어떻게 다룰지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던 부분. 무엇보다 인디애나 시절, 한 성격했던 레지 밀러도 잘 다루며 인디애나를 동부 컨퍼런스 강팀으로 이끌었던 브라운 감독이었기에 아이버슨과 브라운, 두 사람의 조우가 만들 시너지효과가 더욱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필라델피아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아이버슨의 플레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던 것으로 알려졌던 브라운 감독은 부임과 동시에 어떻게 하면 필라델피아를 아이버슨 중심의 팀으로 만들 수 있을지 많은 고심을 거듭했다.
결국, 1997-1998시즌, 한 시즌동안 아이버슨의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브라운 감독이 내놓은 해법은 바로 아이버슨의 ‘슈팅가드 기용’이었다. 이를 위해 브라운 감독은 포인트가드에 수비력이 좋은 스노우와 맥키를 기용하면서 아이버슨의 수비적인 부담을 덜어줬다. 수비 시 아이버슨이 포인트가드 수비를 맡고 스노우와 맥키 등이 2번 포지션 수비를 맡는다는 것이 브라운 감독이 내놓은 복안이었다. 당시, 브라운의 선택에 많은 이들의 비난과 우려의 의견을 표했다. 심지어 브라운 감독의 결정에 모욕에 가까운 조롱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버슨의 공격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브라운 감독은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고 브라운 감독의 선택이 옳았음은 곧 증명됐다.(*1997-1998시즌 아이버슨은 80경기에서 평균 22득점(FG 46.1%) 3.7리바운드 6.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다음 시즌인 1998-1999시즌, 아이버슨은 슈팅가드로 뛰면서 공격에만 더욱 집중,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볼 핸들링으로 자신보다 더 큰 선수들을 마음껏 농락, 생애 처음으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브라운 감독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이는 NBA 역사상 최단신 득점왕이 탄생했던 순간으로 아이버슨은 빠르게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수비력이 좋았던 스노우와 맥키는 포인트가드로 뛰면서 브라운 감독의 의도대로 아이버슨의 경기조율과 수비에 대한 부담을 덜어줬다. 마찬가지로 래틀리프도 1998-1999시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정되는 등 인사이드에서 아이버슨의 부족한 외곽수비력을 메워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해줬다.(*1998-1999시즌 아이버슨은 48경기에서 평균 26.8득점(FG 41.5%) 4.9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당시, 직장폐쇄 조치로 인해 단축 시즌으로 치러졌던 1998-1999시즌, 아이버슨과 브라운 감독이 만남이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필라델피아도 정규리그 28승 22패를 기록, 동부 컨퍼런스 6번 시드로 8년 만에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아이버슨은 계속되는 잔부상에 시달리면서도 생애 처음으로 밟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평균 28.5득점(FG 41.1%) 4.1리바운드 4.9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1라운드 올랜도 매직을 시리즈 전적 3-1로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2라운드에서 밀러가 이끄는 인디애나에 스윕패를 당하면서 처음으로 밟은 플레이오프는 2라운드 진출에 만족해야했다.(*NBA 역사상 직장폐쇄는 1998년을 포함해 총 4차례 발생했고 최근에는 2001년 직장폐쇄가 있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는 이후 팀이 완전히 정상궤도로 들어서면서 전 시즌에 이어 1999-2000시즌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1999-2000시즌 아이버슨은 평균 28.4득점(FG 42.1%) 3.8리바운드 4.7어시스트를 기록, 당시를 기준으로 자신의 득점 부문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고,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아이버슨의 맹활약에 힘입어 필라델피아도 49승 33패를 기록, 동부 컨퍼런스 5번 시드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아이버슨과 필라델피아는 1라운드 샬럿 호네츠를 시리즈 전적 3-1로 물리치고 2라운드에 진출했지만 다시 한 번 인디애나의 벽에 가로 막히며 또 다시 2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했다.(*아이버슨은 1999-2000시즌을 시작으로 11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마침내 2000-2001시즌, 아이버슨은 생애 처음으로 NBA 우승반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시즌을 앞두고 필라델피아에게 한 차례 위기도 있었다. 바로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아이버슨과 브라운 감독이 대립각을 세웠던 것. 브라운 감독은 팀 연습에 지각은 물론, 때로는 모습까지 보이지 않는 아이버슨에게 불만을 드러냈고 당시 인터뷰에서 “당신이라면 회사에 매일 지각하고 심지어 나오지도 않는 직원을 좋아할 것인가”라는 말로 아이버슨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질세라 아이버슨도 브라운 감독에게 맞서기 시작했고 화가 난 브라운 감독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아이버슨의 트레이드를 논의, 트레이드가 성사단계에 이르렀지만 양 팀이 의견차를 보이면서 아이버슨은 계속해 필라델피아게 남게 됐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아이버슨이 팀이 100%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실제로 아이버슨은 브라운 감독에 직접 찾아가 사과의 뜻을 전하는 등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의기투합에 성공했다.
비록 시즌 전에는 악재들이 겹쳤지만 이를 계기로 팀이 더 단단해진 필라델피아는 2000-2001시즌 개막과 동시에 10연승을 달리는 등 정규리그 56승 26패를 기록, 동부 컨퍼런스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아이버슨도 정규리그 71경기에서 평균 31.1득점(FG 42%) 3.8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 다시 한 번 득점부문 커리어 하이를 새로 쓰며 득점왕과 함께 정규리그 MVP까지 차지했다. 올스타전 MVP 역시 아이버슨의 몫이었다. 필라델피아는 아이버슨뿐만 아니라 브라운 감독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맥키와 디켐베 무톰보도 각각 올해의 식스맨상과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하는 등 최고의 한 시즌을 보냈다.(*아이버슨은 2000-2001시즌 평균 2.5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스틸왕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정규리그와 달리 플레이오프에선 필라델피아는 고전을 거듭했다. 1라운드 그간 자신들을 가로막았던 인디애나를 3-1로 가볍게 물리치고 2라운드에 진출했다. 다만, 동부 컨퍼런스 제패는 성공했지만 토론토 랩터스와 밀워키 벅스를 차례대로 만나 시리즈가 7차전까지 가는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파이널에 진출 당시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특히, 후반기부터 잔부상에 시달렸던 아이버슨은 결승전을 앞두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부상부위만 무려 11개에 이를 정도로 이미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아이버슨은 파이널 전까지 플레이오프 18경기를 거의 풀타임으로 뛰었다. 더욱이 필라델피아는 정규리그 동부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후반기 아이버슨의 부상으로 연패에 빠지는 등 정규리그에 비해선 팀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지 못했다.
반대로 조던의 시카고 왕조 이후 최고의 전력으로 평가받던 LA 레이커스는 시즌 초반 오닐과 코비가 갈등을 빚으며 팀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데릭 피셔의 복귀와 함께 팀이 정상화를 찾아가기 시작한 레이커스는 정규리그 종료를 앞두고 기록한 8연승을 포함, 파이널에 오르기까지 19연승 무패행진을 달리며 팀 분위기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황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레이커스가 플레이오프에서 꺾은 올스타의 숫자도 이들의 연승 숫자와 같았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이미 플레이오프가 열리기 전부터 두 팀의 대결을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표현, 우승의 향방보다는 레이커스의 무패 우승 달성 여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도 이에 대해서만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아이버슨과 필라델피아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버슨은 오히려 1차전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우리를 우승후보에서 제외시켰다. 우리가 파이널까지 온 것은 그저 운이 좋았고 파이널에서 스윕을 당해 빠른 시일 내에 여름휴가를 떠날 것이라 전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동전을 튕겼을 때 어느 쪽이 앞면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오랜 시간을 비행기 타고 이곳에 온 것은 레이커스의 들러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번 게임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임할 것이다. 우리는 승리를 간절히 원하고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점프볼이 시작되는 순간, 사람들의 예상이 틀렸음을 보여줄 준비가 됐다”는 말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 6월 7일(이하 한국시간), 아이버슨은 자신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필라델피아는 경기 초반 코비와 오닐의 수비에 집중하느라 릭 팍스와 호레이스 그랜트, 다른 선수들을 놓치며 리드를 내줬지만 아이버슨이 1쿼터에만 12득점 4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 기세를 올렸고 결국, 전반전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56-50, 필라델피아의 6점차 리드로 끝이 났다. 아이버슨은 2쿼터에도 팀이 올린 34득점 중 절반이 넘는 18득점을 올리며 전반에만 30득점을 기록하는 등 팀의 리드를 이끌었다. 마찬가지로 멧 가이거와 무톰보도 오닐에게 전반에만 18득점을 내줬지만 효과적으로 오닐을 막았고 맥키도 코비를 4득점으로 묶는 등 필라델피아는 육탄방어도 불사하지 않는 강력한 수비와 아이버슨의 날카로운 창을 앞세워 전반, 레이커스를 압도했다.
하지만 상황은 후반 들어 180도 달라졌다. 오닐이 3쿼터부터 힘을 내기 시작, 3쿼터에만 18득점(FG 70%) 6리바운드를 쓸어 담으며 추격을 주도했고 반대로 필라델피아는 아이버슨의 득점포가 3쿼터 종료 7분여를 남기고 침묵을 지키며 어려움을 겪었다. 오닐이 살아나자 레이커스의 선수들도 덩달아 살아나기 시작했고 레이커스는 오닐의 적극적인 1대1 포스트업을 앞세운 끝에 결국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이날 아이버슨은 타이론 루의 끈질긴 수비에 막혀 마지막 15분 동안은 3득점만을 올리는 데 그쳤다. 아이버슨의 팔을 잡아끄는 등 루의 반칙성 수비들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이에 대한 파울콜이 불리지 않았던 것도 아이버슨을 힘들게 했다. 루는 아이버슨이 공 자체를 잡지 못하게 하는 등 아이버슨을 압박하며 지금까지 아이버슨을 막은 선수들 중 가장 완벽한 수비를 선보였다.
그러나 아이버슨은 역시 아이버슨이었다. 연장전 시작과 함께 레이커스는 오닐과 폭스의 득점으로 경기 종료 2분 30여초를 남기고 5점차로 앞서갔다. 하지만 아이버슨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이때부터 무려 7득점을 몰아치며 추격전에 불을 지폈다. 그중 이날 경기의 백미는 단연, 아이버슨이 크로스오버 드리블에 이은 스텝-백 점프슛으로 루를 날려버리고 득점에 성공, 이후 보란 듯이 루를 넘고 유유히 백코트하는 장면이다. 루는 이날 4쿼터부터 연장전까지 아이버슨을 5득점으로 묶었지만 경기 종료 1분 30여초를 남기고 어처구니없는 돌파에 이은 레이업 실패로 아이버슨에게 3점슛을 얻어맞았고, 결국은 앞서 언급했듯 아이버슨에게 결정적인 득점까지 내주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경기 시작 후 시종일관 난타전을 이어갔던 이날 경기는 종료 10초를 남기고 스노우의 러닝 점퍼가 터지면서 107-101로 필라델피아가 승리, 치열했던 승부는 필라델피아의 신승으로 막을 내렸다.
레이커스의 무패우승을 예상했던 사람들은 언더독, 필라델피아의 반란에 놀라움과 흥분을 금치 못했다. 상대팀이었던 호레이스 그랜트는 “나는 지금까지 두 명의 영웅을 보았다. 한 명은 마이클 조던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이버슨이었다”라는 말을 남겼고 저스틴 팀버레이크도 “단 하루 농구선수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조던이나 오닐보다는 아이버슨이 되어 오늘처럼 위대하게 싸워보고 싶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다만, 아쉽게도 필라델피아와 아이버슨의 여행은 여기까지였다. 1차전 거짓말 같은 승리를 만들어 낸 아이버슨과 필라델피아는 이후 4경기를 내리 패하며 결국은 레이커스에게 우승을 내줬다. 그럼에도 2000-2001시즌 파이널은 승자인 레이커스가 아닌 패자였던 필라델피아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쏠렸던 시리즈로 필라델피아와 아이버슨은 졌지만 아름다운 패자로 NBA의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

▲덴버 너게츠로의 이적, 그리고 슈퍼스타의 몰락!
이렇게 연일 감동스토리를 써내며 한 시즌을 치렀으니 아이버슨과 필라델피아의 위상이 달라진 건 당연지사였다. SLAM 등 美 현지 언론에서도 아이버슨을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한 것은 물론, 급기야 플레이오프 당시 부상 때문에 착용했던 암 슬리브조차 농구 패션의 하나로 정착,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사실상 2000-2001시즌 플레이오프를 기점으로 아이버슨은 슈퍼스타를 넘어 NBA의 또 다른 아이콘이자 문화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필라델피아는 이후 두 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등 더 이상 2000-2001시즌의 기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브라운 감독마저 2003년 디트로이트로 자리를 옮기면서 아이버슨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이버슨은 2001-2002시즌과 2004-2005시즌, 득점왕을 차지하며 본인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자신의 개인기록만을 챙길 뿐, 다른 선수들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감독들과의 불화도 잦았고 전처럼 팀 훈련에도 자주 빠지는 등 팀 분위기까지 흐린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이버슨이 엇나가면서 2003-2004시즌 동부 컨퍼런스 11위로 떨어지는 등 추락을 거듭했다. 계속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이버슨의 마음을 잡기 위해 필라델피아는 2004-2005시즌 크리스 웨버를 데려오는 등 열과 성을 다했지만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2006-2007시즌 도중 아이버슨을 덴버 너게츠로 보내며 결별을 선언한다.(*브라운과 아이버슨은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서 다시 만났고 아이버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이란 말로 브라운과의 재회의 기쁨을 표했다)
필라델피아는 아이버슨을 덴버로 보내고 덴버로부터 안드레 밀러, 조 스미스, 아이반 맥플린과 함께 2007 NBA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두 장을 받아왔다. 특히, 아이버슨의 합류가 많은 주목을 받았던 건 바로 아이버슨과 카멜로 앤써니, 두 선수의 만남 때문이었다. 당시 덴버는 앤써니가 팀에 합류한 이후 꾸준히 플레이오프에는 올랐지만 매번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이 불운에 아이버슨이 해답이 되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아이버슨은 덴버 이적 후 50경기에서 평균 24.8득점(FG 45.4%) 3리바운드 7.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서부 컨퍼런스 6번 시드로 이끌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선 당시, 우승을 차지했던 샌안토니오를 만나 탈락의 쓴 맛을 맛봤다.(*美 현지에선 사실상 필라델피아의 암흑기가 아이버슨과의 이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의견들이 주를 이룬다)
이후에도 계속해 1라운드 탈락의 불운이 이어지는 등 아이버슨도 그 해답이 되지 못했고 한계를 느낀 덴버는 2008-2009시즌 시작과 동시에 아이버슨을 디트로이트로 보냈다. 덴버는 아이버슨을 디트로이트로 보내면서 천시 빌럽스와 안토니오 맥다이스, 그리고 칙 샘을 받아왔다. 아이버슨은 덴버에 있으면서 필라델피아 시절보다 어시스트에 치중하는 등 다른 선수들을 살려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아이버슨과 앤써니, 두 사람의 조합은 시너지효과가 그다지 크지 못했다. 더욱이 덴버는 빌럽스의 합류 이후 2008-2009시즌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플레이오프 1라운드의 벽을 넘어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 아이버슨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덴버에서는 제몫을 다했지만 디트로이트 이적 후 아이버슨은 급격히 추락했다. 이전의 팀들과 달리 조직력을 우선시하는 디트로이트의 농구 시스템은 아이버슨의 플레이 스타일과 전혀 맞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버슨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벤치에서 뛰어달라”는 마이클 커리 감독의 결정에도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은퇴를 하는 것이 낫다”는 말로 반발하는 등 팀과의 불화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디트로이트도 덴버와 같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고 아이버슨이 특별한 부상이 없었음에도 그를 로스터에서 제외, 아이버슨은 허무하게 2008-2009시즌을 마감해야했다. 또, 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취득한 아이버슨과 재계약 협상조차 진행하지 않고 그대로 그와 이별을 고했다.(*2008-2009시즌 아이버슨은 디트로이트에서만 54경기를 뛰면서 평균 17.4득점(FG 41.6%) 3.1리바운드 4.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다만, 문제는 FA인 아이버슨을 바라보는 다른 팀들의 시선과 디트로이트의 시선이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기량이 예전 같지 않음에도 여전히 주전 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아이버슨에게 선뜻 거액을 제시하는 팀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감독과의 계속된 불화를 보인 것도 아이버슨의 가치를 떨어뜨린 또 다른 원인. 한때는 브라운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샬럿으로의 이적설이 돌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루머에 그쳤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아이버슨은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1년, 베테랑 미니멈에 계약을 합의, 입단 당시 인터뷰에서 “자존심 회복을 위해, 그리고 팀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버슨의 명예회복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트레이닝캠프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고 입단 당시 각오와 달리 벤치멤버의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해 언론에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는 등 멤피스에서도 3경기 만에 방출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아이버슨은 방출과 함께 은퇴설이 대두되면서 그의 NBA 커리어는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 친정팀, 필라델피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면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다만, 친정팀에서의 마무리도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아이버슨은 딸의 병간호를 이유로 구단에 휴가를 요청, 필라델피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아이버슨은 잔여시즌 일정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곧장 아이버슨의 딸의 병간호를 하지 않고 도박을 빠져 산다는 루머가 돌면서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이에 아이버슨이 직접 나서 루머가 사실이 아님을 일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부인과의 이혼소송 등 또 다른 루머들까지 불거지면서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아이버슨의 명성은 치명상을 입었다.

▲리그 최고의 득점 기계, 이제는 전설 속으로 사라지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2009-2010시즌 종료 후 재기를 노린 아이버슨에게 끝내 어떤 팀도 손을 내밀지 않았고 아이버슨의 선수생활도 끝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터키리그의 베식타스와 2년 계약을 맺고 유럽으로 떠나며 팬들에게 “다시 NBA로 돌아오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지만 은퇴를 고려할 정도로 심각한 발목부상을 당하는 등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남은 도박 빚을 갚기 위해 터키리그로 갔다는 루머까지 돌며 그를 더 힘들게 했다. 이후 아이버슨은 팬들과의 약속대로 다시 한 번 NBA로 돌아오려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NBA 팀들이 아닌 D-리그(現 G-리그의 전선) 팀들의 오퍼였고 이에 더 이상은 NBA에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2013년 10월 30일, 필라델피아의 홈구장인 웰스 파고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 농구선수로서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은퇴 당시, 필라델피아는 아이버슨의 업적을 기려 그의 등번호 3번을 영구결번으로 결정했다. 이에 아이버슨도 “나는 죽을 때까지 76ers의 선수다”는 말로 화답했다. 또, 당시 필라델피아와 경기를 가지며 아이버슨의 은퇴식을 빛냈던 르브론 제임스는 ESPN과 인터뷰를 통해 “아이버슨은 진정한 전사였다. 나는 조던과 아이버슨의 경기를 보면서 농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수많은 팬들도 아이버슨의 농구를 향한 열정에 이견을 표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고 드웨인 웨이드 역시 “아이버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다. 그런 선수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기쁘면서도 은퇴를 한다니 매우 아쉽기도 하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필라델피아의 선수들도 아이버슨이 보는 앞에서 마이애미 히트와의 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레전드의 퇴장을 축하했다.
아이버슨의 기록 앞에는 항상 ‘NBA 역사상 최단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대부분의 스포츠들이 그렇지만 특히, 농구의 경우는 신체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 운동으로 림에 가까운 장신 선수들이 유리한 운동이다. 반대로 아이버슨은 농구선수로선 매우 작은 183cm의 신장으로 핸디캡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버슨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매번 장신 선수들을 농락하며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선물했다. 어쩌면 사람들이 아이버슨의 플레이에 더욱 열광했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그의 모습이 남아있는 건 “무슨 일이든지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면 해내지 못할 일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진-NBA 미디어센트럴, 점프볼 DB, NBA Asia
2017-12-02 양준민(yang12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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