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버려진 재료로 만든 작품, 에르메스와 안 맞는다고?.. 格을 더 높였다

송혜진 기자 2017. 12. 1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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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서 '쁘띠 아쉬 콜렉션' 여는 뮈사르
- 자투리 재료에 눈을 돌리다
'여러 부서 돌며 모아놓을 걸로 뭔가 만들어 보면 어떨까'
증조할머니로부터 영감받아 잠든 재료 깨워 새 작업 시작
- 초기엔 주변서 "재활용" 시큰둥
"괜히 이상한 일을 벌인다"며
몇몇 사람들 뒤에서 수군댔죠
- 고객들은 폭발적으로 반응
다들 처음 보자마자 홀린 듯 사
그제서야 작품으로 다시 봐..
재활용이 아니라 '오트 쿠튀르'
이젠 몇억원에 팔리기도 하죠
- 한국 도자기·누비이불에 반하다
도자기 표면빛깔 대단하고 독특
누비이불은 여러 천 조각 모아
가장 아름다운 추상화로 탄생
포장마차 美感에 두리번거렸죠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하게 됐느냐"고 물을 때였다. 에르메스 가문 6세손이자 현재 에르메스 수장(首長) 악셀 뒤마와 외사촌지간인 파스칼 뮈사르(Pascale Mussard·63)는 뜻밖에도 눈물부터 보였다. 그의 둥글고 큰 초록빛 눈동자가 금세 글썽이는 눈물로 부풀었다. 그는 "어린 시절 추억과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내가 됐다. 그 추억이 지금 나를 울게 했다"고 했다.

뮈사르는 에르메스에서도 오랫동안 특이한 일을 해왔다. 2009년부터 공방에서 쓰고 남아 버리는 자투리 가죽이나 비단천, 크리스털이나 도자기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작품으로 만드는 이른바 '쁘띠 아쉬(Petit h)' 작업을 이끌어 왔다. '재활용'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버려진 재료를 상상할 수 없는 형태로 교직(交織)한다.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건 아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이상한 일을 한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에르메스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을 8년간 지속했다. 2011년부터는 1년 두 번씩 전 세계를 돌며 자신이 만든 쁘띠 아쉬 컬렉션을 전시했다. 올해 3월엔 로마에서 전시했고, 최근엔 서울에서 선보였다. 17일까지 서울 신사동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에서 열린다.

지난달 말 서울 신사동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전시장에 설치된 호랑이 작품 앞에 앉은 파스칼 뮈사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전시인 만큼 한국 호랑이를 전면에 내세웠다. 자투리 가죽을 깁고 비틀고 조각해 220여 시간을 들여 완성했다는 이 호랑이 작품은 약 1억원이다./장련성 객원기자

지난달 말 도산공원 앞에서 만난 파스칼 뮈사르는 자신이 4~5세이었던 1950년대 말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물자가 많이 부족했다. 나의 증조할머니는 청빈하면서도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남들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부족한 무언가를 메워나갈 줄 아셨다. 나는 그런 증조할머니를 보며 자랐고 그 결과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 아래 다시 눈물이 괴었다.

"세상엔 버릴 게 없다"던 증조할머니

파스칼 뮈사르의 증조할머니는 1837년 마구(馬具) 파는 가게를 열며 지금의 에르메스를 시작한 티에리 에르메스(1801~1878) 손자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1871~1951)의 아내였다. 2차대전 직후였다. 물건을 펑펑 쓸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사업에 성공한 에르메스 가문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증조할머니는 특히나 검소했다. 어느 것 하나 예사로 쓰고 버리는 일이 없었다. 우편물이 오면 봉투를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가위로 잘라 그 뒷부분을 메모지로 썼다. 그의 방 창문엔 늘 어디선가 주워온 자투리 천이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누군가는 "새로 유행하는 커튼이냐"고 물었다. 가끔은 새 옷이 필요했다. 증조할머니는 새 옷을 사는 대신 지니고 있던 옷에 어디선가 주워온 긴 가죽조각을 덧대 새로운 옷으로 만들었다. 남들은 "대체 그런 멋진 옷을 어디서 샀느냐"고 했다. 파스칼 뮈사르는 "내겐 그런 증조할머니가 종종 마법사처럼 보였다"고 했다.

―쁘띠 아쉬 작업을 한 건 2009년이죠. 증조할머니를 보며 영감을 얻었다지만, 이 일을 시작한 건 시간이 꽤 흐른 다음인데요.

"뭐든지 무르익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까요. 원래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공방에서 놀며 자랐고, 그곳에서 버려지는 자투리들이 아까워 내 방 가득 모아 놓고 지내긴 했어요. 다들 그런 저를 보고 '병적으로 물건을 모은다'고 놀려댔죠. 에르메스에 입사한 건 1978년쯤입니다. 여러 부서를 거쳤어요. 여성복과 액세서리 자재 담당을 할 때도 있었고 광고 홍보를 할 때도 있었죠. 쇼윈도 디스플레이도 했고요. 여러 곳에서 일하면서 뛰어난 장인을 두루 알게 됐죠. 그 경험이 쌓여 어느 날 '내가 잔뜩 모아 놓은 물건들로 뭔가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고 용기를 내게 된 거고요. 숙성의 시간이었던 거죠."

―'지금 우리가 쓰는 재료가 동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이런 작업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아까 말한 용기를 낸 계기가 그거예요. 회사에서 '에르메스, 향후 20년' 같은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어요. 어떤 여자 장인이 '내일 당장 어떤 재료가 모자라게 되면 지금 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맞는 말이었어요. 지금이야 천연가죽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앞날을 어찌 알겠어요. 비단은 또 어떻고요. 사람이 손으로 짜낸 질 좋은 비단을 구하는 게 이미 쉽지 않거든요. 자투리에 눈을 돌려야 했어요. 남들이 '쓸모없다'고 하는 잠든 재료를 깨워 한시바삐 새로운 작업을 해야 했죠."

초창기엔 "괜히 이상한 일을 벌인다"는 식의 얘기도 자주 들어야 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리기도 했다. "저런 작업이란 게 결국 재활용 아냐?" "저런 게 과연 에르메스에 어울리겠어?" 파스칼 뮈사르는 묵묵히 2009년 1월 쁘띠 아쉬 작업을 발표했고 그해 11월 첫 컬렉션을 파리 세브르 매장에 내놨다. 분홍빛 스타킹을 신은 큼직한 낙타 인형, 쓰고 남은 비단천과 가죽으로 만든 돛단배 장식 같은 것이었다. 몇몇 직원은 "그걸 왜 이곳에 두느냐, 옮겨달라"고도 했다. 고객 반응은 그러나 정반대였다. 다들 보자마자 홀린 듯 샀다. 첫 번째 컬렉션 대부분이 내놓자마자 팔려나갔다. 뮈사르는 "그제서야 사람들이 나와 내 작품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쁘띠 아쉬 컬렉션은 이제 적게는 몇십만원, 많게는 몇억원에 팔려나간다.

―자투리 재료로 만드는 데도 그렇게 비싼 이유가 있을까요.

"많이들 묻는 말이죠(웃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다만 무언가를 상상한 그대로 구현하고 완성하는 데에는 재료뿐 아니라 정말 오랜 시간이 든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건 재활용이 아니에요. 기존 에르메스 장신구나 가방은 완벽하게 그 용도에 맞도록 손질된 가죽을 자르고 기워서 완성하면 되는 거지만 이 작업은 그렇지가 않아요. 원하는 물건을 만들 때까지 갖가지 재료를 써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보죠. 이건 일종의 실험이기도 하고 발명이기도 해요. '업사이클링(Upcycling·재활용이라는 뜻)'보다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re·맞춤 물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거예요. 증조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이런 얘기를 제게 해주신 적이 있어요. '가격은 한번 느끼지만 품질은 평생 느낀다'고요. 좋은 물건을 사들인 그날엔 그 값이 비싸다고 느낄 수 있지만, 평생 쓰면서 만족하다 보면 그 가격을 잊게 된다는 거죠. 저는 쁘띠 아쉬가 바로 그런 물건이라고 믿습니다."

한국의 도자기, 누비이불, 포장마차

파스칼 뮈사르는 63세가 되도록 세 아이를 키우면서 일해온 워킹맘이기도 하다. 큰아들 드미트리는 34세 청년이다. 그는 "나 역시 여느 워킹맘과 다를 바 없이 일했다. 회사 일에 쫓겨 아이들이 학교에서 상 받거나 공연을 해도 제때 보러 가지 못했고, 아이들이 시험 끝나고 집에 와도 대개는 내가 없었다. 뒤늦게서야 아이들이 '그땐 사실 힘들었다'고 털어놓더라. 눈물이 났다"고 했다. 뮈사르는 그래서 지난달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난생처음 일을 잊고 큰아들과 며칠간 서울과 부산, 전북 정읍 등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뮈사르는 "아들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내게 '엄마가 그렇게 엄마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고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걸 읽고 '이번엔 일만 하다 가지 않기를 참 잘했구나' 했다"고 했다.

―어디서 무엇을 보셨나요.

"말도 마세요. 엄청 걸어 다녔어요. 서울 곳곳의 미술관은 다 다녔어요. 북촌과 부암동, 삼청동, 방산시장과 광장시장을 쏘 다녔죠. 부산 국제시장도 가봤고요. 한참 걷다가 아들과 주홍빛 포장마차에 들어가서 빈대떡이라는 걸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그 포장마차라는 공간이 아름다워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나왔죠."

―우리나라 도자기와 누비이불에도 반했다면서요.

"유약을 특이하게 쓰는 정유리라는 도자기 작가를 만났어요. 그 표면이나 빛깔이 독특해서 한참을 보고 왔죠. 이슬기라는 작가가 누비이불로 해외에서 종종 전시를 하는 걸 봤고요. 대단히 근사하더라고요. 그래서 그의 밀라노 전시를 후원했고 협업도 했죠. 최지원이라는 한국 학생을 통해선 하회탈에 대해 알게 됐어요. 이 학생과 함께 작업한 캐시미어 소재 탈도 전시에 함께 내놨습니다."

파스칼 뮈사르는 이번 전시 기간에 서울 도산공원 앞 에르메스 매장을 말 그대로 숲으로 바꿔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곳곳에서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저기 휘어진 나뭇가지엔 그가 오랜 기간 장인들과 함께 의논해 만든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자투리 가죽을 이어 완성했다는 덩치 좋은 우리나라 호랑이는 고개를 한껏 빼고 관객을 바라본다. 뮈사르는 "한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작가와 손을 잡고 이 공간을 살아 있는 듯한 느낌으로 완성했는데 그 과정이 힘들고도 즐거웠다"고 했다.

―어떤 점이 힘들고 또 즐거우셨나요.

"마음 같아선 진짜 숨 쉬는 야생의 숲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벌레도 놔두고 싶고 진짜 달팽이도 여기저기 놓아두고 싶었죠. 어떤 건 양보해야 했고 어떤 건 반드시 실현해야 했어요. 호랑이가 그랬죠. 서울에서 하는 전시니 꼭 호랑이를 놓고 싶었는데, 가죽에 단순히 호랑이 줄무늬를 찍어내는 것만으로는 느낌이 살아나질 않았어요. 가죽을 꼬고 겹치고 그걸 마치 조각하듯 움직여봤죠. 189개 가죽 조각을 모아 222시간 동안 작업했는데 그 결과 참으로 근사하고 잘생긴 호랑이가 나와줬지 뭐예요(웃음)."

―숙련된 장인들도 쁘띠 아쉬 작업은 어려워서 고개를 젓는다던데요.

"호랑이 작업할 때 프레데릭이라는 장인은 잠을 한 달간 못 잤어요. 그래서 저는 장인들에게 '나와 오래 일해달라'고 말 못해요. '1년 일해 보고 너무 힘들면 다른 데서 좀 쉬다가 다시 오세요' 하죠. 그런데도 끝까지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도 못 말리지만, 그들도 참 지독하죠(웃음)."

―그토록 지독하게 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파스칼 뮈사르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일이 있으니까요. 전 어쩌면 정원사의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지금 심은 풀이 작고 약하다고 놔둘 순 없죠. 계속 물 주고 돌봐줘야 해요. 그건 결국 아름드리나무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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