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발! 아름다운 재규어가 남긴 발자국

F-타입 프로젝트 7(좌)과 D-타입(우) (이미지: 재규어)

나는 집에서 한 걸음만 나서도 수십, 수백 대의 차들이 다니는 21세기 도시에 살고 있다. 양식장 물고기나 길바닥 개미 떼만큼 징그럽게 많은 차들 중 재규어는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몇 안 되는 브랜드다.


가까이서 휙 지나가도, 멀리 안갯속에 서있어도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재규어 디자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단순히 재규어가 몸값 비싼 프리미엄 브랜드이기 때문은 아닐 터다. 유명 디자이너 한 명 영입해서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진 아름다움도 아니다.


차완얼? 얼완차? - 톱모델 데이비드 간디(David Gandy)와 E-타입 (이미지: 재규어)

재규어의 시작은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독 아름다운 모델들이 많았던 재규어. 당대의 자동차들을 오징어로 만들어버린 역사적인 모델들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들이 젊었던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재규어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들이 물려준 유산이 켜켜이 쌓여 우러나온 결실이다. 그동안 재규어가 빚어낸 수많은 차들 중 가장 아름다웠던 모델들을 골라봤다. 과연 제일 찬란하게 빛나는 작품은 어떤 모델일까?



SS Jaguar 100_1938


‘SS Jaguar 100’은 재규어가 1938년부터 만든 2인승 스포츠카다. 1935년부터 판매된 세단 ‘SS Jaguar 1.5 litre’, ‘SS Jaguar 2.5 litre’, ‘SS Jaguar 3.5 litre’의 스포츠 버전이었다.


SS Jaguar 100 (이미지:재규어)
SS Jaguar 100 (이미지:재규어)

‘SS’는 재규어의 전신이었던 ‘SS Cars’를 뜻하며, 출시 당시에는 ‘SS’ 뒤에 ‘Jaguar’가 모델명으로 붙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에 이르러 아예 회사명을 ‘Jaguar’로 변경한다.


2.5리터와 3.5리터 두 가지 엔진이 마련됐으며, 고성능 사양인 3.5리터의 경우 최고속도 약 160km/h(100mph)에 0-100km/h 가속을 약 10.5초 만에 해결했다. ‘SS Jaguar 100’의 ‘100’도 최고속도 시속 100마일을 의미한다. 요즘 경차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SS Jaguar 100 (이미지:위키미디어)


XK120_1948


1948년 런던모터쇼에서 등장해 1954년까지 생산된 2인승 스포츠카다. 로드스터와 쿠페, 드롭헤드 쿠페(소프트탑) 세 종류의 지붕을 제공했다.


XK120 (이미지:재규어)
XK120 (이미지:재규어)

처음에는 XK 엔진(1949-1992년까지 생산된 직렬 6기통 DOHC 엔진)을 소개하기 위한 쇼카 형식으로 모터쇼 무대에 올랐지만, 아름다운 디자인이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거의 그대로 양산된다.


3.4리터 6기통 엔진을 얹고 160마력을 발휘했다. 이름에 들어간 ‘120’은 ‘SS Jaguar 100’의 ‘100’처럼 최고속도를 뜻한다. 시속 120마일은 약 193km/h. 1949년, 공기흐름을 조금 손본 XK120는 203.5km/h를 기록하기도 했다.


XK120 (이미지:재규어)


D-타입(D-TYPE)_1954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생산된 레이싱카였다. 공기역학을 고려해 만들어진 차체는 물방울을 떠올린다. 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풍만한 곡면에서 요즘 차와 다른 아름다움이 줄줄 흐른다.


D-타입 (이미지:재규어)
D-타입 (이미지:재규어)
D-타입 (이미지:재규어)

D-타입은 1955년부터 1957년까지 3년간 르망에서 우승을 차지하면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1957년 대회에서는 상위 6대 중 5가 D-타입이었다. 1955년형 D-타입은 작년 소더비(Sotheby’s) 경매에서 1,980만 달러(약 216억 원)에 팔리는 등 천문학적인 몸값을 자랑한다.


1956년부터 잠시 팩토리팀으로서 르망 무대를 떠난 재규어는 아직 생산이 끝나지 않았던 25대의 D-타입을 가져다 일반인들에게 팔기로 한다. 일반도로를 달릴 수 있도록 동승석, 옆 창문, 와이퍼, 범퍼 등을 추가하고, ‘XKSS’라는 이름을 붙였다.


재규어가 다시 생산한 XKSS (이미지:재규어)
영화배우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소유했던 XKSS (이미지:재규어)

하지만, 1957년 2월 12일 재규어 브라운스 레인(Browns Lane)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고 25대의 XKSS 중 9대가 타버리고 만다. 살아남은 16대는 대부분 미국으로 팔려나갔다. XKSS가 생산된 지 59주년이었던 2016년, 재규어는 이때 사라진 9대의 XKSS를 당시 모습과 제원 그대로 다시 만들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XKSS (이미지:재규어)
XKSS (이미지:재규어)
XKSS (이미지:재규어)
XKSS (이미지:재규어)


마크 2(Mark 2)_1958


1959년부터 1967년까지 만들어졌으며 6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세단으로 명성이 높았다. 엔진은 120마력을 내는 2.4리터와 210마력을 내는 3.4리터, 220마력을 발휘하는 3.8리터 세 가지 배기량의 XK 엔진이 얹혔다. 이 중 미국 시장에는 3.8리터 엔진을 품은 마크 2가 진출했다.


마크 2 (이미지: 재규어)
마크 2 (이미지: 재규어)
마크 2 (이미지: 재규어)
마크 2 (이미지: 재규어)

3.4리터 엔진과 4단 자동변속기를 얹었던 마크 2는 약 190km/h까지 달릴 수 있었고 시속 100km 가속에는 약 12초가 걸렸다. 보다 강력한 3.8리터 버전은 최고시속 200km에 시속 100km 가속은 약 8.6초 만에 끝냈다.


동글동글하면서도 중후하고 스포티한 느낌을 전해주던 마크 2는 30여년 후 1999년 태어난 S-타입(S-Type)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둥근 라디에이터그릴과 헤드램프, 뒤로 갈수록 아래로 떨어지는 캐릭터라인, 옆 창문과 뒷 유리 형상이 상당히 유사하다.


마크 2 (이미지: 재규어)
마크 2 (이미지: 재규어)
S-타입 (이미지: 재규어)


E-타입(E-Type)_1961


재규어의 아름다움을 논하자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모델이 바로 E-타입이다. 1961년 제네바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됐으며 1975년까지 생산됐다. 2인승 쿠페와 컨버터블 두 가지를 기본으로 1966년에는 휠베이스를 늘이고 뒷자리를 단 2+2 버전도 추가됐다.


E-타입 (이미지: 재규어)
2013 서울모터쇼에 전시된 E-타입

날렵하면서 동글동글한 디자인은 말콤 세이어(Malcolm Sayer)가 빚어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영국 항공기 제작사였던 ‘브리스톨(Bristol)’에서 근무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재규어에 공기역학을 적극 반영했다. 일찍이 C-타입과 D-타입도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페라리 창업자 ‘엔초 페라리’는 E-타입을 두고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라고 언급했으며, 2004년에는 영국 매체 ‘스포츠카 인터내셔널(Sports Car International)’은 E-타입을 ‘1960년대 최고의 스포츠카’ 목록 가장 위에 올렸다. 2008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에서 만든 ‘가장 아름다운 차 100대’ 리스트에서는 1위에 오르기도 했다.


E-타입 (이미지: 재규어)
E-타입 (이미지: 재규어)

E-타입은 14년 동안 만들어지며 총 2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쳤다. 처음 등장한 ‘시리즈 1’은 가장 널리 알려진 E-타입의 형태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3.8리터 XK 엔진을 얹고 태어났지만 1964년 4.2리터로 배기량을 키웠다. 두 엔진 모두 출력과 최고속도, 0-100km/h 가속시간은 265마력, 241km/h, 약 6.5초로 동일했지만 4.2리터 엔진의 토크가 약 10% 높았다.


E-타입 (이미지: 재규어)
E-타입 (이미지: 재규어)

1968년 등장한 ‘시리즈 2’의 가장 큰 특징은 헤드램프를 덮고 있던 투명 커버가 사라진 점이다. 미국 설계 법 때문인데, 다른 곳에 팔리는 모든 E-타입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됐다. 크롬 뒷 범퍼도 뒷면 전체를 감싸도록 바뀌었으며 리어램프가 범퍼 아래로 내려왔다.


E-타입 시리즈 2 (헤드램프 투명 커버가 사라졌다) (이미지: 위키미디어)

E-타입의 마지막 개량형인 ‘시리즈 3’는 1971년에 나왔다. 시리즈 3는 라디에이터그릴에 들어간 격자무늬와 넓어진 타이어를 통해 가장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시리즈 3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 개발된 272마력짜리 5.3리터 V12 엔진이었다. 파워스티어링을 기본 적용했으며, 선택사양으로 자동변속기와 에어컨을 고를 수 있었다.


E-타입 시리즈 3 (라디에이터그릴에 격자무늬가 추가됐다) (이미지: 위키미디어)
전기차로 다시 태어난 'E-타입 제로' (이미지: 재규어)


XJ 시리즈 1 (XJ Series 1)_1968


재규어를 대표하는 대형 세단으로 태어났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만들어진 ‘XJ 시리즈 1(XJ Series 1)’은 2009년 출시된 현세대 XJ(코드명:X351)이 나오기까지 약 40년 동안 XJ 디자인의 기틀을 이뤘다.


XJ6 시리즈 1 (이미지: 재규어)
XJ6 시리즈 1 (이미지: 재규어)

‘XJ’하면 떠오르는 낮고 넓은 차체와 두개의 원형 헤드램프, 여기에서 이어지는 보닛의 곡선, 기다랗고 납작한 트렁크 같은 특징들이 모두 ‘시리즈 1’에서부터 비롯됐다. 세대를 거듭해도 세련미만 더해갈 뿐, 크게 변치 않는 XJ의 디자인은 ‘타임리스 디자인(timeless design)’의 표본이었다.


2008년형 XJ(코드명: X358) (이미지: 재규어)
확 바뀐 2009년형 XJ(코드명: X351) (이미지: 재규어)


XJ220_1992


1992년 처음 등장했을 당시, 최고속도 340km/h를 기록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 자리에 등극했으며, 페라리 F40, 포르쉐 959, 람보르기니 디아블로(Diablo) 등 당대의 쟁쟁한 슈퍼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재규어 중 가장 빠른 모델이다.


XJ220 (이미지: 재규어)
XJ220 (이미지: 재규어)
XJ220 (이미지: 재규어)
XJ220 (이미지: 재규어)

XJ220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1988년 영국국제모터쇼 무대였다. 좋은 반응을 얻은 XJ200을 재규어는 양산하기로 결정한다. 양산형 XJ220은 컨셉트카에 얹혀있던 V12를 대신해 3.5리터 트윈터보 V6 엔진을 얹었고, 4륜구동은 후륜구동으로 변경됐다.


덕분에 원하는 성능을 확보함과 동시에 휠베이스와 무게를 줄일 수 있었으며, 배출가스 규제에도 대응할 수 있었다. XJ220은 540마력, 65.7kgm를 발휘했고, 5단 수동변속기와 궁합을 맞춰 0-100km/h를 약 3.7초에 마쳤다.


XJ220 (이미지: 재규어)
XJ220 (이미지: 재규어)

XJ220-S는 레이스 참가를 위해 만들었던 XJ220-C의 일반도로용 버전이다. 헤드램프를 고정식 투명 커버로 바꾸었으며, 커다린 리어윙을 달고, 카본으로 만든 차체 속에는 690마력으로 출력을 높인 엔진을 숨겼다.


비록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 타이틀은 2년 만인 1994년 맥라렌 F1에게 내주었고, 경기불황으로 인해 당초 예상 판매량 350대를 다 채우지 못한 체 1994년 275대를 끝으로 단종됐지만, XJ220의 아름다운 디자인은 여전히 유효하다.


XJ220-S (이미지: 재규어)


XK(2세대)_2006


현세대 재규어 디자인을 구축한 이안 칼럼(Ian Callum)이 온전히 실력 발휘를 한 첫 번째 모델이다. 전통을 고수했던 이전 디자인과 확실히 선을 그으며, ‘이안 칼럼 시대’를 열었다. XF(2007년)와 XJ(2009년) 등 뒤이어 등장한 재규어들 모두 파격에 가까운 새로움을 추구했다.


2세대 XK (이미지: 재규어)
좌: XF(2007년) / 가운데: XK(2006년) / 우: XJ(2009년)

2세대 XK(코드명:X150)는 2005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E-타입에서 물려받은 라디에이터그릴만 1세대 XK와 같을 뿐, 훨씬 다부지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엔진은 4.2리터 V8을 기본으로 슈퍼차저가 더해진 고성능 버전 XKR이 있었다. 2009년에는 배기량을 5리터로 키웠으며, 2011년 페이스리프트를 단행했다. 최강 XKR-S는 542마력 69.5kgm를 발휘해, 4초 만에 100km/h까지 가속하고 300km/h까지 달릴 수 있었다. XK는 재규어 스포츠카의 자리를 2013년 등장한 F-타입에 물려주고 2014년 단종됐다.


2011년형 XKR-S (이미지: 재규어)
2011년형 XKR-S 컨버터블 (이미지: 재규어)


C-X75_2010


재규어 설립 75주년을 기념해 지난 2010년 파리모터쇼에서 공개한 컨셉트카다. 각 바퀴에 연결된 4개의 전기모터를 통해 3.4초 만에 시속 100km까지 가속하고, 최고 330km/h로 달린다는 설정.


C-X75 (이미지:재규어)

주행거리 연장을 위한 발전기로 마이크로 가스 터빈이 쓰인 점이 특이하다. 배터리의 힘만으로도 110km를 다릴 수 있고, 가스 터빈 발전기까지 합세하면 최대 900km까지 달릴 수 있다. 높은 효율은 가벼운 알루미늄 차체와 뛰어난 공기역학도 한몫했다.


컨셉트카가 공개된 이듬해, 재규어는 C-X75의 심장을 전기모터와 가솔린 엔진이 합쳐진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로 바꿔 양산하겠다고 발표했다. 페라리 ‘라페라리’와 맥라렌 ‘P1’과 어깨를 견줄 재규어 하이퍼카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2012년 세계 경기불황으로 계획이 무산됐다.


C-X75 (이미지:재규어)

비록 양산은 물거품 됐지만, 재규어는 이때 만들어진 5대의 시제품을 2013년 중반까지 기술 개발용으로 활용했다. 시제품은 1.6리터 4기통 가솔린 엔진과 150kW 짜리 모터 2개를 얹어 합산출력 850마력을 발휘했다.


2015년에는 할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했다. ‘007 스펙터(007 Spectre)’에 등장한 C-X75는 제임스 본드가 모는 애스턴 마틴 DB10을 추격하며 로마의 밤거리를 질주했다. 스크린 속 C-X75의 아름다움은 주인공에게 쏠려야 할 시선을 강탈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007 스펙터'에 출연한 C-X75 (이미지: 재규어)


Future-Type_2040


현행 모델들의 아름다움이야 모두들 직접 봐서 알고 있으리라. 컨셉트카 ‘C-X16’이 ‘F-타입’으로 양산돼 처음 길거리에 직접 만났을 때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F-타입을 닮은 다른 라인업들도 아름답긴 마찬가지. 디자인 수장 이안 칼럼(Ian Callum)이 빚어내는 오늘날의 재규어도 과거의 재규어에 비해 미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F-타입 (이미지: 재규어)
I-페이스 (이미지: 재규어)
재규어 전기차 삼형제 (이미지: 재규어)

한편 재규어는 전기차와 자율주행으로 대변되는 자동차 생태계의 변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브랜드 중 하나다. 포뮬러-E에 일찌감치 뛰어들었고, 내년에는 순수전기차 ‘I-페이스(I-PACE)’ 출시를 앞두고 있다.


재규어가 꿈꾸는 미래는 올해 9월 선보인 컨셉트카 ‘퓨처-타입(Future-Type)’에 고스란히 담겼다. 퓨처-타입이 배경으로 설정한 2040년에는 길거리에서 얼마나 더 아름다운 ‘리핑-켓(Leaping-Cat)’을 구경하게 될지 기대된다.


퓨처-타입 (이미지: 재규어)
퓨처-타입 (이미지: 재규어)
퓨처-타입 (이미지: 재규어)


이미지: 재규어, 위키미디어, 카랩


이광환 carguy@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