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34>의재 허백련 '추경산수'] 상록수 틈새로 낯 내민 단풍..가을, 산 깊은 곳까지 찾아들다
붉은단풍 수놓은 '추경산수' 단연 눈길
나뭇잎 하나둘씩 떨어져 앙상한 가지
낙엽인듯 떠다니는 조각배 스산함 더해
허백련 '선비 화풍 남종화' 마지막 화가
다도·예술에 젖어 자신의 그림처럼 살아

지금은 정치인이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더 유명한 시인 도종환의 ‘단풍드는 날’이다. 시 중간의 ‘방하착’은 불교 용어로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비 맞고 바람 맞아가며 지켜온 잎사귀에 새 옷 차려 입혀 한껏 멋내 물들였건만 내려놓고 버리기가 말처럼 그리 쉽겠는가.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은 지천명에 오른 1940년에 작정한 듯 열 폭 짜리 춘하추동 산수화를 완성했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와 들꽃이 만개한 오솔길을 그린 춘경(春景) 2점, 녹음이 무성한 여름을 그린 하경(夏景) 5점, 단풍 든 추경(秋景) 2점, 눈 내린 동경(冬景) 1점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열 폭을 펼쳐놓으니 붉은 단풍 흔드는 추경 두 폭이 단연 눈을 끈다.
가을은 깊은 산 속까지 찾아들었다. 수묵에 담채로 칠했지만, 여전히 푸른 상록수 틈새로 낯 내민 빨갛고 노란 단풍이 잘 익은 사과와 감 만큼이나 탐스럽다. 그러나 가장 높이 치솟은 큰 나무부터 조금씩 그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오른 순간은 동시에 내려갈 시간이기도 하다. 도종환의 시처럼 말이다. 그림 위쪽의 화제(畵題)는 원나라 때 화가 황공망(1269~1354)이 자신의 그림 ‘추산임목도’에 쓴 시를 옮겨왔다. ‘숲 속 누군가의 집은 냇물 돌아가는 곳에 가깝고/ 큰 나무는 바위 사이에 높이 우거졌는데/ 낙엽은 비로 불어난 냇물에 모두 떠내려가고/ 가을빛만 머물러 빈 산에 가득하구나’라는 내용이다. 한시처럼 충만함과 비워냄이 한 화면에 같이 머물고 있다.

중국의 전통그림은 직업 화원의 채색화인 북종화, 선비 화가의 문인화인 남종화로 크게 나뉜다. 특히 조선 중기부터 크게 유행한 남종화는 줄여 남화라 부르는데 허백련은 이 남화 전통의 ‘마지막 화가’로 꼽힌다.
조선에는 그림으로 이름난 집안이 제법 있었는데 허백련의 양천 허씨 가문이 대표적이다. 공재 윤두서의 그림에 매혹됐고 추사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운 소치 허련(1808~1893)에서 그 명성이 최고봉에 오른다. 그의 3남인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 임전 허문으로 이어졌고 방계손인 의재 허백련에 닿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선비 화풍인 남종화의 맥을 이었다.


1974년 3월 어느 봄날,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춘설헌을 방문한 적 있다. 작가가 화가에게 물었다. “난초는 동양인의 마음과 같다는데 대하기 까다롭다는 뜻입니까?” 이에 의재는 “아니오. 조용하고 깊이가 있다는 뜻이어서 흔히들 난을 선비정신이라고 한다”고 답하며 “환경 변화에 예민한 ‘잠수함 속의 토끼’는 난과 상통한다”고 덧붙였다.
의재 허백련은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과 함께 ‘4대 한국화가’로 통한다. 김은호와 박승무를 더해 근대 한국화 ‘6대가’로도 칭하는데 어찌 불리건 그 첫머리에 허백련이 있었다. 춘설헌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의재미술관에도 추색이 짙다 한다. 언제든 의재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이 미술관은 허백련의 손자이자 현대적 화풍의 매화로 유명한 허달재 화백이 관장을 맡고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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