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복에서 작업복, 고급 맞춤복까지.. 사이렌 슈트의 변신 (하)
(상편에 이어서 계속)
[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12]
◆품질 좋고 세련된 사이렌 슈트
위아래 한 벌의 사이렌 슈트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을 통해 유럽에 널리 퍼졌다. 처칠은 여러 벌의 사이렌 슈트를 갖고 입었는데 그중에서도 비로드 재질의 녹색, 세로줄 무늬가 들어간 면 재질의 회색, 화려한 벨벳으로 된 와인색이 그의 시그니처였다. 모두 개인 재단사가 만든 고급 맞춤복으로, 처칠은 세계 각국 정상과 만나거나 집무실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때 이 옷을 입었다.


사이렌 슈트가 공습 대피복으로 유행하면서 이 옷은 다우닝가 10번지를 넘어 영국 전역의 가정으로 들어갔다. 유년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영국인의 회고록에는 자다 말고 사이렌 슈트만을 챙긴 채 집을 나와 방공호로 향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가정용 사이렌 슈트는 처칠의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고급이었다. 가족의 안전에 직결된 것이었으므로 보온성 높은 튼튼한 재질의 천을 골라 꼼꼼히 바느질해서 만들었다.
이렇게 영국 노동자들이 입는 작업복 보일러 슈트는 처칠과 영국 가정을 거치면서 세련된 고급 맞춤복, 품질 좋은 가정복의 이미지를 가진 사이렌 슈트가 됐다.
◆미 공정부대와 점프 슈트
사이렌 슈트와 유사한 복장이 동시대 미국에서도 유행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콘셉트, 외형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이 옷을 사이렌 슈트라고 부르지 않는다. 점프 슈트(jump suit), 커버올(coverall) 혹은 이 둘을 합쳐 커버올 점프 슈트라고 한다. 사실 사이렌 슈트에 대한 당대 미국인들의 반응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처칠이 화려한 벨벳으로 된 와인색 사이렌 슈트를 입고 방송 언론에 나오면 미국인들은 '대용량 와인병(rotund wine)' 같다고 했다.
영국 사이렌 슈트의 시발점이 노동자라면 미국 점프 슈트의 그것은 군인이었다. 점프 슈트는 원래 미 공정부대의 전투복 명칭이었다. 공정부대는 항공기를 통해 공중에서 지상으로 낙하(점프)하여 중요 목표를 신속히 점령하거나 적 후방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한다. 이런 유의 임무수행에 필요한 기능을 갖춘 전투복으로 개발된 것이 점프 슈트였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M1942'(모델명) 점프 슈트다.

그런데 M1942 점프 슈트는 위아래 한 벌이 아니었다. 상·하의가 분리된 전투복이었다. 사이렌 슈트와도 다르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점프 슈트와도 완전히 달랐다. 보온을 위해 상의는 허벅지까지 길게 내려왔고 특수임무 수행에 필요한 다양한 장비, 물자를 휴대할 수 있게 다양한 주머니를 배치했으며 관절이 있는 각 부위에는 여러 개의 조임끈을 달아 낙하와 은밀한 침투 시 옷이 펄럭이거나 걸리지 않게 했다. 하의에도 같은 기능을 추가했다. 그렇다면 '위아래 한 벌에 장식이 적고 사이렌 슈트와 외견상 별 차이 없는' 미국식 점프 슈트는 어디서 온 것일까?


◆개량형 오버올(overall) 점프 슈트
1942~1943년 미군은 전투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여 점프 슈트를 개량했다. 주머니를 입체적으로 디자인하여 수납공간을 늘리고 각도를 조정하여 쉽게 물건을 넣고 뺄 수 있게 했다. 또 여러 판의 원단을 재봉하는 방식을 적용하여 신체 각 부위의 다양한 움직임을 지원할 수 있었다.
개발 과정에서 여러 시안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상·하의를 하나로 붙여 만든 일명 커버올 점프 슈트였다. 공중 강하, 야지 숙영, 생존 및 탈출과 같은 공정부대의 작전 환경을 생각해볼 때 이는 충분히 선택 가능한 옵션이었다. 그러나 현장의 군인들은 커버올 방식의 전투복이 불편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통으로 된 옷이다 보니 급하게 움직일 때 몸이 낀다고 했다. 무엇보다 용변을 보려면 입고 걸쳤던 것을 모두 벗어 놓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이전처럼 상·하의가 구분된 모델이 최종적으로 선택됐다.

비록 공정부대의 최종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커버올 점프 슈트는 그냥 폐기되지 않았다. 전차부대, 정비부대의 전투복, 정비복으로 개선되어 보급됐다. 커버올 점프 슈트의 디자인은 공정부대를 위해 만들었던 점프 슈트와는 달랐다. 작업자들이 입는 보일러 슈트와 가까운 것이 됐다. 물론 점프 슈트 고유의 장점은 그대로 남았다. 이것저것 넣기 좋은 다양한 주머니 배치, 눕고 쭈그려도 불편하지 않은 인체공학적 디자인, 긁히고 걸려도 잘 상하지 않는 튼튼한 재질은 정비병들의 사랑을 받았다.
◆커버올 점프 슈트와 미국 여성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전쟁에 기여했다. 이들에게 작업복으로 보급된 것이 튼튼하고 안전한 커버올 점프 슈트였다. 당시 미국 국내에서는 전시 물자 통제에 의해 여성들의 복장을 통제했는데 비싼 원단이나 화려한 디자인은 금지됐다. 넓은 소매나 나풀거리는 단 처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차라리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했고 일상에서도 커버올 점프 슈트를 입곤 했다. 여성 노동자용 커버올 점프 슈트는 애국, 일하는 여성, 독립적인 여성, 내면의 강인함, 당당함 등의 이미지를 가진 1940년대의 상징이 됐다.

패션 업계는 이를 놓치지 않고 상품화했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복장 통제 지침의 범위 안에서 디자인, 색상 등에 변화를 준 새로운 커버올 점프 슈트를 만들어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세련된 커버올 점프 슈트를 입고 출퇴근하는 여성의 모습이 방송 언론에 자주 등장했고, 유명 디자이너, 배우, 모델들은 커버올 점프 슈트의 유행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했다.

[남보람 육군 군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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