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취재+] 마을은 버려진 고깃배들의 무덤이었다

안나혁 2017. 12. 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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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삶의 터전 양보한 사람들.. 아픔의 길 위에서 희망을 꿈꿉니다 / 신고리 원전 건설로 보금자리 떠난 이주민들
울주군 서생면 신리8반 골매마을. 신고리 3·4호기 건설 부지에 한수원이 어업보상으로 주민으로부터 사들인 선박들이 방치돼 있다.
마을은 버려진 고깃배들의 무덤이었다. 들어서는 길 따라 도깨비바늘이 자욱했다. 주민은 모두 떠났고 어선은 바다를 등졌다. 공사장에 편입된 집터는 물가에서 멀지 않았다. 텅 빈 방파제엔 옅은 파도 소리만 남았다. 수평선 따라 시선을 옮기자 원자력발전소 격납고와 건설 현장 타워크레인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한때 사람이 살았던 울주군 서생면 신리8반 골매마을의 초상이다.
신리 어부 김길용(69)씨가 마을 텃밭에 올라 신고리 원전 공사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신고리 5·6호기를 건설 중인 타워크레인
신리 어부 김길용(69)씨가 1년째 항구에 묶여 있는 그의 배 ‘대림호’를 바라보고 있다.
골매는 1970년대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가 고리원전 1호기 부지로 결정되며 터전을 잃은 고리 주민 148가구 중 40가구가 집단 이주해 만든 마을이다. 2000년 9월 한국수력원자력은 골매에 신고리 3·4호기 건설을 고시했다. 새로운 발전소가 들어서니 마을을 떠나란 통보였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났다. 마을 주민 절반이 뿔뿔이 흩어졌고 남은 18가구는 지난해 말 서생면 신암으로 집단 이주했다.
김달원(91)씨가 두 번째 이주지인 신암마을 방파제에서 그의 고향을 가리키고 있다.
김달원(91)씨가 세 번째 이주지인 신암마을 방파제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고향이 계속 사라졌어. 우리는 이제 세 번째 고향에 온 것이지.”

고리 토박이 김달원(91)씨는 마흔여섯 가을에 골매로 옮겨와 아흔 살이 되던 해 겨울 신암에 새 터를 꾸렸다. 김씨는 “이제 정신이 없어서(알츠하이머를 앓아서) 가물가물하지만, 생각해보면 골매가 참 살기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고리와 골매에서 딸 넷, 아들 일곱을 낳아 키웠다. 지금도 몇몇은 함께 같은 동네에 산다. 보행기에 의지해 천천히 방파제로 걸어간 김씨는 고향 이야기를 묻자 바다를 가리켰다. 손끝이 향한 곳은 신고리 원전이었다. 노인은 사십 년 넘게 배를 탔다. 그의 아들도 아버지가 고기를 잡았던 바다로 나갔다.

지난 11월15일 포항 강진이 발생하던 날 울주군 서생면 신리 앞바다에서 해녀들이 바다로 나가고 있다.
울주군 서생면 신리 앞바다에서 해녀들이 일터로 나가고 있다.
김씨의 큰아들 종길(72)씨는 고리를 떠나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쫓겨나다시피 몸만 갖고 골매에 왔다. 군에서 지어준 천막 아래 찬 바닥에 누워 자면서 직접 집을 지었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살았다.” 첫 번째 이주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고생했다” “힘들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골매에는 작지만 빠질 것 없는 항구와 넓은 공동어장이 있었다. 가족이 함께 과수원을 가꾸면서 논농사도 조금씩 지었다. 그렇게 4대가 함께 살았다.” 집터도 살길도 꿋꿋이 개척해온 김씨다. 그런 그가 뱃일에서 손을 놓은 지 일 년이 넘었다. 새로 이주한 마을에는 접안할 항구가 없기 때문이다. 한수원은 지난해 어업보상을 진행하며 골매를 포함한 신리 어민들로부터 어업권과 배를 사들였다. 팔려간 선박들은 골매 마을 어귀에 뉘어있다. “이곳을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몸만 갖고 골매에 왔고 또다시 이주했다. 고생스럽게 살았지만 국가시책이기에 군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는 항구도 뭣도 아무것도 없다.” 김씨는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골매마을 터로 가는 길목에 고깃배가 뉘어 있다.

박모(59)씨가 신리 앞바다에서 조업을 하고 있다. 박씨 뒤로 신고리 원전이 보인다.
박모(59)씨 부부가 신리항에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다.
박모(59)씨 부부가 지난 10월 새벽 3시 신리항에서 임시로 구한 배를 몰고 조업에 나섰다. 그물을 손에 쥔 부부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쓰레기와 물고기와 어망을 구분 지었다. 멀리 신고리 3·4호기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발전소의 빨간 불빛이 주기적으로 점멸했다. 부부는 60m 아래에서 광어, 도다리, 꽃게가 드문드문 걸린 그물을 건져 올렸다. 박씨는 현재 사는 마을이 원전 건설 부지에 포함되면서 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공론화 과정을 거쳐 재개되면서 원전 부지에 편입된 신리마을 주민들의 보상과 이주 문제가 본격화하고 있다. 한수원은 지난해 신리 어민들의 어업보상을 단행했다. 주민들이 언제, 어디로 이주할지, 어떻게 살아갈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어민들에게 배는 일터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나 다름없다.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어업권과 배를 내어준 주민들은 1년째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신리항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박복남(82) 씨. 박씨는 비록 가게에 손님은 없지만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게 서글프다고 말했다.
울산 새울원자력본부 정문에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를 환영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피해 보상금이 지급됐다.” 이 한마디는 지역민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가 돼 왔다. 잃어버린 일상을 온전히 보상할 수 있는 보상금은 있을 수 없다. 이주 이후 이어질 삶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다. 배만 원래대로 돌려준다면 정든 땅에서 가족과 함께 계속 살고 싶다던 신리 어부 김씨의 말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울주(울산)=글·사진·영상 하상윤 기자 jony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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