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의 마르지 않는 샘, 스티븐 킹
‘그것’이 돌아왔다. 누군가에게는 괴기스러운 삐에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나병 환자나 죽은 동생의 모습으로. 《그것(IT)》의 원작은 1986년 출간된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이다. 1990년 TV 시리즈(국내에는 《피의 삐에로》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로 만들어져 선풍적 인기를 끈 바 있으나, 영화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7년 주기로 살인과 실종 사건이 유독 자주 일어나는 마을 데리. 돌아온 주기에 여름방학을 맞이한 열한 살 아이들은 공포를 떨쳐내고 ‘그것’의 존재에 직접 맞서기로 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캐리》(1976)를 시작으로 스티븐 킹의 소설은 이미 여러 차례 영화와 TV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그중 《그것》은 킹의 소설 중에서도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 단연 손꼽히는 고전인 데다, 페니와이즈라는 기념비적 호러 캐릭터를 낳은 작품으로 유명해 영화화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한국 관객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다.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2013)를 시작으로 《블러바드》(2014),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2015) 등 할리우드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정정훈 촬영감독이 촬영을 담당해서다. 뚜껑을 열어보니, 영화는 그 자체로 새로운 고전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호러와 성장 스토리의 탁월한 결합
소설 원작은 주인공 아이들이 결성했던 ‘루저 클럽’ 멤버 중 유일하게 마을에 남아 있던 마이클이 모두에게 건 전화 한 통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열한 살 여름방학, 루저 클럽 친구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그것이 돌아오면 언제든 함께 맞서 싸우기로 약속했다. 27년 주기마다 돌아오는 악몽이 반드시 다시 한 번 재연될 것임을 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가슴속 한구석에 서늘하게 공유해 왔던 건, 공포의 기억과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다.
원작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방식의 서술이라면, 영화 《그것》은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현재가 통째로 사라진 이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시리즈를 염두에 둔 구성일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영화는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이번 작품이 1장(chapter 1)임을 밝힌다. 시대 배경은 원작 속 1950년대에서 1989년으로 바뀌었다. 이는 제작진의 선택이자 스티븐 킹의 제안이기도 했다. 1950년대는 킹이 청소년기를 보낸 시기다. 그가 당대에 성장하는 아이들의 공포심에 밀착해 소설을 집필할 수 있었던 이유다. 같은 의미로 영화 제작진에게는 자신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 종류의 두려움을 펼칠 시대 배경이 필요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안드레아 무시에티 감독은 1973년생이다.
말 더듬기 증세, 뚱뚱한 몸매, 건강 염려증, 억압적인 부모, 인종 차별 등등 다양한 핸디캡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은 같은 이유로 또래들에게 루저 취급을 당하며 멸시 받는다. 이들이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맞닥뜨리는 공간인 하수도, 터널, 낡은 우물 등의 깊은 통로들은 성장기에 헤쳐 나가야 할 심연(深淵)과 막연한 공포를 은유하는 셈이다. 이 공간들마다 숨어 있는 광대 페니와이즈는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공격한다. 일정한 형태가 아니기에 ‘그것’으로 칭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영화는 방대한 양의 원작 소설의 행간까지 꼼꼼히 메워 빚은 공포로 관객을 압박한다. 호러물로도 성장물로도 읽히는 원작의 독특한 결은 수위를 낮추지 않은 채 공포감을 밀어붙인 과감함과, 아이들의 우정과 모험이라는 순수한 주제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감독의 솜씨를 통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몇몇 신은 21세기 호러 영화의 인상적 장면들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며, 동시에 여기에는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인 《스탠 바이 미》(1986)로 대표되는 1980년대 청소년 성장영화의 향수까지 물씬하다. 가깝게는 상당수 관객이 지난해 신드롬을 일으켰던 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나 아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미지의 존재에 대항하는 성장담 《슈퍼 에이트》(2011)를 떠올릴 것이다. 성장기에 느끼는 추상적 공포는 시대를 막론하고 매력적인 소재이기에 대중문화계 전반에 반복해서 등장하곤 한다.

《미저리》 《쇼생크 탈출》 《샤이닝》 등 흥행작 여럿
스티븐 킹의 소설 중 영화와 TV 시리즈로 만들어진 작품의 수는 무려 200편이 넘는다. 드물게 오리지널 각본을 쓰거나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한 그의 이름이 원작자·각색자·감독 등 200편 넘는 작품에 다양한 직함으로 올라가 있다는 얘기다. 최근 개봉했던 《다크타워: 희망의 탑》 역시 킹의 소설이 원작이다. 《캐리》, 케시 베이츠 주연의 《미저리》(1990),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스티븐 킹 3부작’ 《쇼생크 탈출》(1994), 《그린 마일》(1999), 《미스트》(2007) 등 대중적 성공을 거둔 작품도 여럿 나왔다.
이 중 영화 팬들의 뇌리에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이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안착되어 있을 테지만, 정작 킹은 이 영화의 각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던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던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원작이 품었던 연민의 정서들을 전부 제거한 채 몹시 차가운 톤의 영화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그가 야심 차게 직접 각색에 뛰어든 TV 미니시리즈 《샤이닝》은 외면 받았다. 성공한 것보다 망한 작품이 더 많은 것은 다작(多作) 작가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성적표였을지 모른다.
킹의 필모그래피에 유독 저예산 단편 각색 영화가 수두룩한 이유는 그가 오래전부터 진행한 ‘달러 베이비(Dollar Baby· Dollar Deal로도 알려져 있다)’ 프로젝트 덕분이다. 영화 전공 학생이나 젊은 연출가들이 1달러만 지불하면 자신의 단편소설을 각색하고 영화로 연출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다. 상업적 활용 권한은 자신이 갖는다는 조건으로, 판권 계약에 대한 부담 없이 창작자들이 마음껏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역시 이 프로젝트로 킹과 처음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방대한 분량 덕분에 스티븐 킹의 소설은 종종 각색 과정에서 꽤 어려운 작품으로 꼽히지만, 저명한 작가의 왕성한 필력은 영화를 만드는 데 언제나 안정적 재료를 찾는 창작자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조건이다. 스티븐 킹은 현재 미국 문화계의 ‘마르지 않는 샘’ 중 하나인 셈이다.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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