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21>박노수 '류하(柳下)'] 청량한 쪽빛 아래 홀로 선 사내..기다림은 기대감이다
시선의 끝에서 새어나오는 노란빛 탓에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희망의 기운 담겨
'그림 곧잘 그리던' 한학자집 아이 박노수
18살에 청전 이상범 화숙서 처음 붓 들어
문인화풍 남화와 북화의 색채 절묘히 절충
동양화로 현대미술사 열어젖힌 첫 세대

자연 안에 홀로 선 사내는 먼 곳을 바라본다. 살짝 돌린 옆 얼굴과 아련한 눈빛이 그렇다. 뭔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조금 처진 사내의 어깨가, 거대한 자연에 비해 왜소한 사람의 몸뚱이가 처연한 기운을 풍기기도 하지만 기다리는 그 누군가가 있으니 홀로 서 있어도 아주 외로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기다림은 곧 기대감이다. 푸른색이 주는 특유의 희망적 분위기에다 사내의 시선 닿는 곳쯤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빛이 그런 분위기를 더해준다.
충남 연기군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박노수는 5살부터 할머니께 천자문을 배우고 아버지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동네에서 그림 곧잘 그리는 아이로 알려진 것도 거의 그 무렵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공중폭격이 심했던 동경으로 미술 유학을 떠나지 않기로 한 것은 돌이켜보건대 탁월한 결정이었다. 대신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상경해 서울 누하동에 자리잡은 청전 이상범(1897~1972)의 화숙에서 처음 붓을 들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스승은 약관의 박노수에게 “그림은 여운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1년 이상 그림 공부를 하고서는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1과(동양화과)에 입학했다. 해방 이후 설립된 국내 미술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미술이론과 실기를 배운 첫 세대가 바로 그다. 그러나 졸업장 받기 몇 달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밥을 굶고 시체를 넘어 도착한 부산에서 종군화가단으로 활동했다. 어렵사리 전쟁통에 졸업장을 받기는 했으나 졸업작품전에 출품해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까지 받은 그림은 중간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돌려받지 못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절이었지만 재능은 어디서나 빛났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처음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고 1955년에는 수묵채색의 인물화 ‘선소운(仙簫韻)’으로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신선이 듣는 퉁소 소리라는 뜻의 ‘선소운’이란 운치있는 제목 아래 화가는 검은 한복차림의 여성을 그렸다. 먹이 아닌 아이보리블랙의 검은색으로 붓자국 없이 평평하게 색을 칠한 것이나 하얀색으로 옷주름을 표현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신선의 피리소리가 들릴 듯한 격조와 세련미를 동시에 품은 이 그림은 오늘날 청와대에 해당하는 경무대에 들어갔다가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박노수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겸재의 진경산수 이후 조선 화단을 지배하던 전통 한국화를 현대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제강점기에 드리운 왜색을 극복하는 동시에 고유한 한국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동양화에는 남화(南畵)와 북화(北畵)가 있다. 대체적으로 남화는 묵과 선 중심의 담채가 특징이고 북화는 채색을 많이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풀어 설명한 적도 있는 작가는 격조있는 문인화풍의 남화와 감각적인 색채의 북화를 절충해 절제된 고유의 화풍을 이뤄냈다. 북화적인 스케일과 남화적인 정신세계가 조화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동양화로 현대미술사를 열어젖힌 첫 세대 주요 작가로 그가 손꼽히는 이유다.

사실 박노수는 남정(藍丁)이라는 그의 호(號)에서부터 짙푸른 쪽빛을 자랑한다. 그가 20대 후반이던 시절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이 이름을 지어주며 ‘푸른 빛’과 ‘변치 않는 마음’, ‘가람’(불교 사원)이라는 뜻을 되새겨줬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고사를 의식했던 것인지 손재형이 “청전(박노수의 스승 이상범의 호)이 싫어하겠구만”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화가 자신은 “군청은 한눈에 척 보면 들어오는 색”이라서 좋아하면서도 “푸른색이 좀처럼 주변과 어울리기 어려운 색”이라 더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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