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철조망에 갇힌 대추리…평화로 잇는 길을 내고 싶었다
전쟁 반대와 평화권 외친 대추리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공권력 저항
2006년 초봄 구속…수원구치소행
“실정법보다 중요한 평화 위한 실천”
아내 탄원서·시민단체 압박에 석방
정부, 3차례 행정대집행…투쟁 압박
들판에 철조망 치고 대추분교도 철거
주민들, 학교잔해 위 ‘평화’ 깃발 꽂아
군경 검문소·철조망에 포위된 마을
사실상 봉쇄에 주민들도 지친 기색
도보 행진단 꾸려 평화 응원의 길로


인권운동가들은 평택 대추리 싸움에서 ‘평화적 생존권’의 깃발을 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반대하고 자신이 살아온 곳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는 보편적인 권리임을 우리는 주장했다. 평화적 생존권을 주장하는 만큼 투쟁의 방식도 평화적이어야 했다. 우리는 시민불복종 운동 방식을 택해서 공권력에 저항했다. 이렇게 평화적 생존권을 주장하며 비폭력 투쟁을 벌이자 대추리 투쟁에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함께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 마을의 평화를 지키는 일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2006년 3월 그런 싸움을 하다가 20년 만에 구속되었다. 나는 수원구치소 평택지소에 수감되었다. 큰 방에 혼자서 지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어온 감옥은 초봄의 날씨여서 춥기만 했다. 그러다가 오래 살지 않고 보름 정도 만에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났다. 전국의 시민단체들이 긴급행동을 구성해서 움직였고, 조영황 국가인권위원장도 성명을 내서 우리의 석방을 요구했다. 유엔에는 인권옹호자가 구속되었다고 알렸다. 무엇보다도 절절한 내 아내의 탄원서가 가장 크게 판사에게 영향을 미쳐서 석방되었다는 게 당시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아내는 탄원서에서 “‘공무집행방해’라는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땅의 평화이고 농민들의 생존권”이라고 짚었다. 또 “이 땅을 전쟁기지로 내어주고, 농민을 내쫓은 일도 부끄러운 역사가 되리라는 것을,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용기 있게 지켜내려 했던 실천이 옳았음을 재판 과정에서 밝힐 것”이라면서, 남편을 석방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20년 만의 구속에서 풀려난 이후
석방된 이후에는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평택범대위)의 공동집행위원장 겸 대변인 역할을 맡아서 대추리, 도두리 싸움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부는 4월7일에도 3차 행정대집행을 단행했다. 이번에는 수로를 파괴하고 거기에 레미콘을 부어서 논에 물을 대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저녁때 경찰과 용역들이 철수하고 난 다음에 주민들이 수로의 레미콘을 모두 걷어냈다. 아직은 레미콘이 굳지 않아서 가능했다. 이렇게 세차례에 걸친 행정대집행이 모두 무산되자 국방부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절차도 어기면서 대추리, 도두리 지역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설정해버렸다. 특히 대추리는 마을까지도 이 구역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상 최후의 통첩 같은 것이었다.
5월3일 최대한 많은 사람이 대추리로 모여 달라고 평택범대위는 다급하게 공지했다. 전국의 경찰들이 대추리, 도두리 지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한밤중에 1만명의 경찰이 마을을 완전히 포위했다. 군인들은 마을 주위에 포진했다. 지금까지의 행정대집행과는 차원이 다른 작전이 진행될 것이 예상되었다.
5월4일 새벽 4시경, 나는 기자들 앞에 섰다. “군이 민간인을 진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평화적인 시위로 막아낼 것입니다” 같은 말을 했다. 어둠도 걷히기 전부터 군인들이 움직였다. 막아서는 활동가들이 군인들에게 포박당하고 있었다. 안성천에는 부교를 띄워서 불도저와 포클레인 등 장비를 싣고 운반했다. 그리고 헬기가 도두리 방향에서 날아왔다. 헬기는 들판 곳곳에 철조망 묶음들을 내렸다. 그러자 군인들이 황새울과 도두리 들판에 거침없이 철조망을 쳐나갔다. 들에는 볍씨가 움터서 벼가 자라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업 속도가 매우 빨랐다.
경찰은 대추분교로 향했다. 노동자들이 경찰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저들이 곤봉과 방패를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데 별수 없이 뚫려서 밀려났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기세가 살벌했다. 대추분교를 지키려던 노동자와 학생들은 마침 대보름 행사 때 썼던 대나무 봉을 들고 경찰을 맞았지만, 대나무는 경찰 방패를 몇번 두드리면 쩍쩍 갈라져 버렸다. 결국 경찰의 폭력과 위세에 몰린 사람들은 대추분교 교실로 들어갔다. 경찰은 곧바로 내부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패고, 욕설하면서 끌어냈다. 5백명 넘는 사람들이 그렇게 끌려 나왔고, 대추분교 곳곳은 핏자국이 낭자했다.
대추분교 옥상에는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이 계셨다. 그분들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내려오자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대추분교를 부수기 시작했다. 마지막 투쟁의 거점이었던 대추분교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학교 주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민들이 땅을 치면서 울었다. 어둠이 깔리기도 전에 학교는 모두 부서져서 잔해들이 거대한 무덤처럼 쌓였다. 누군가 그 잔해 더미 위에 ‘평화’라고 쓰인 깃발을 꽂았다.

군경에 고립된 섬, 대추리
다음날인 5월5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본정리 농협 앞에서 집결한 다음에 도두리 방향으로 넘어 황새울 벌판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곳곳에서 철조망을 끊으면서 제거했다. 그러자 군인들이 달려들어서 시위대를 낚아채고는 논바닥에 엎드리게 해놓고 포박하고,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마구 휘둘렀다. 그렇게 싸우면서 시위대는 대추리로 들어와 주민들과 만나서 얼싸안았다.
저녁 촛불행사를 마치고 해산하는데 경찰들이 마을로 들이닥쳐서 보이는 족족 사람들을 연행해갔다. 마을의 골목마다 사람들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공포의 밤이었다. 1980년 광주가 이랬을까 싶었다. 그 뒤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경찰과 군인 검문소가 세워졌다. 군사시설보호구역의 한가운데 있는 대추리는 완전히 고립된 육지 위의 섬이 되어 버렸다.
마을 주위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주민들은 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경찰에 얘기해서 겨우 겨울에 심은 보리와 감자는 수확할 수 있었다. 철조망 안의 논에서 자라는 벼를 보며 주민들은 철조망 너머에서 한숨만 쉬었다. 수배 중이던 대추리 이장 김지태씨는 자진 출두해서 구속되었고, 문정현 신부님은 청와대 앞에서 보름 동안 단식농성을 하면서 항의를 했다. 몇번의 범국민대회를 해서 길을 뚫으려고 했지만, 대추리로 가는 길은 모두 막혀 있었다. 인권활동가들은 마을로 들어가서 빈집을 수리해서 마을 도서관(솔부엉이 도서관)도 만들고, ‘들소리 방송’도 만들어서 영상에 마을 소식을 담아서 세상에 알렸다. 매일 저녁에 하는 촛불행사도 계속되었지만, 마을은 지쳐 가고 있었다.
그래서 7월5일, 4박5일의 일정으로 ‘285리 평화행진’ “평화야 걷자!”를 시작했다. 첫날은 과천까지 걸어가고, 둘째 날은 수원역까지 가고, 셋째 날은 오산까지, 넷째 날은 평택역까지 걸어가서 촛불문화제를 한 다음에 대추리로 들어가서 다음날 주민들과 대추리 평화공원에서 마무리 집회를 하는 일정을 짰다. 나는 천주교인권위원회 변연식 위원장과 공동 단장을 맡아서 행진단의 맨 앞에 섰다. 평화행진은 말 그대로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흥겨운 행진이 이어졌다.

285리 평화행진 “평화야, 걷자!”
7월8일, 예정대로 평택역에서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집회를 마치고, 행진단은 밤에 대추리로 향했다. 그런데 평택 시내를 벗어나 군문교를 지나자 케이(K)-6 험프리 미군기지 주변 안정리 주민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돌이 날아오고, 각목을 휘둘렀다. 경찰은 이런 상황에서 상인들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은 채 수수방관했다.
우리는 평택역으로 후퇴했다가 평택경찰서에 항의 방문을 가기로 했다. 단장인 나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대오의 뒤에서 겨우겨우 쫓아가고 있었는데, 경찰서 앞에 와서 깜짝 놀랐다. 행진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경찰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서 농성을 하는 것이었다. 새벽 2시에 경찰서 내부로 들어가 농성을 하다니, 자칫 공권력과 정면 충돌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사람들에게 소리를 쳐서 급히 밖으로 나오게 했다. 이후 경찰서 밖 인도에서 평택경찰서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둘러 마친 다음에, 행진단이 평택역으로 출발하도록 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이 몰려와 우리를 마구잡이로 폭행하고 연행해 갔다. 경찰은 “박래군이다. 박래군 잡아!” 하면서 쫓아왔다. 나는 경찰의 다리에 걸려서 인도에 나뒹굴었다. 경찰 버스에 끌려서 올라갔는데, 버스 밖에서는 경찰들이 닥치는 대로 폭행을 일삼고 있었다. 그날 45명이 연행되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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