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신’ 나달이 떠난다…남자 테니스의 한 시대도 저문다

김세훈 기자 2024. 10. 1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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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신’ 내달 데이비스컵 끝으로 24년 정든 테니스 코트 떠나
“널 친구라 부를 수 있어 영광” 호날두 등 스타들 아쉬움 토로
라파엘 나달이 지난 7월 31일 파리올림픽 테니스 남자 복식 8강전을 마친 뒤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AP

[주간경향] 클레이(흙)의 왕(King of Clay), 황소(El Toro), 검투사(The Gladiator). 별명을 들어보면 그가 프로 테니스 선수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끈기, 인내, 결단력, 겸손, 열정, 강인함, 지속성, 정직함 등을 겸비한 글로벌 슈퍼스타 라파엘 나달(38·스페인)이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15세부터 이어온 프로선수 경력은 오는 11월 테니스 국가대항전 데이비스컵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나달은 1986년 스페인 마요르카에 있는 작은 마을 마나코르에서 태어났다. 축구를 좋아했지만, 삼촌 권유로 테니스를 시작했다. 나달은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라켓은 왼손으로 잡았다. 테니스에서는 왼손잡이가 서비스 위치 등에서 적잖은 이점을 가진다. 스페인에는 맨땅 코트, 즉 클레이코트가 많다. 클레이코트는 하드코트, 잔디코트보다 공이 느리게 움직인다. 바닥과 신발 간 마찰력도 작아 잘 미끄러진다. 많이 뛰면서 열심히 수비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게 클레이코트다. 나달은 스페인 환경에 맞춰 조련된 선수다.

클레이코트의 지배자로 불려

테니스에서 메이저대회, 즉 그랜드슬램은 매년 네 차례 열린다. 프랑스오픈, 호주오픈, 윔블던, US오픈이다. 나달은 4개 메이저대회에서 모두 한 번 이상 우승했다. 그가 보유한 그랜드슬램 타이틀은 22개. 그중 클레이코트에서 열리는 프랑스오픈 우승컵만 무려 14개다. 클레이의 왕, 흙신 등으로 불린 이유다.

호주오픈과 US오픈은 하드코트에서 열린다. 바운드가 높게 튀며 공의 속도는 빠르다. 윔블던은 잔디코트에서 열린다. 잔디에서는 공이 낮게 깔려 빠르게 미끄러지며 지나간다. 나달은 호주오픈과 윔블던에서 2회씩, US오픈에서 4회 우승했다. 강인한 승리욕으로 고비를 넘긴 경우가 허다했다. 2022년 호주오픈 결승전에서 나달을 응원하는 팬들조차 사실상 포기한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역전극을 썼다. 다닐 메드베데프(러시아)에 2세트를 먼저 내주고도 경기를 뒤집었다. 점수는 2-6, 6-7(5), 6-4, 6-4, 7-5. 해설가는 “메드베데프가 관뚜껑에 못질을 못 한다”고 평가할 정도로 나달이 이기기 힘든 경기였다.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 횟수에서 나달은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24회)에 이은 역대 2위다. 나달은 209주 동안 세계 1위 자리를 지켰다. 나달은 상금으로만 1억3494만6100달러(약 1838억원)를 벌었다. 이 역시 역대 2위다.

2015년 라파엘 나달의 플레이 장면 / AFP

나달은 여동생의 친구이기도 한 마리아 프란시스카 페렐로와 2005년부터 연애를 해 2019년 결혼했다. 첫 아이는 아들로 2022년 태어났다. 글로벌 스포츠 스타 아내들은 패션, 돌출행동 등으로 소위 ‘튀는’ 경우가 많지만, 페렐로는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 내성적이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성격이라 테니스장조차 자주 가지 않는다.

나달은 지금도 가족과 함께 고향에서 산다. 마요르카는 스페인 본토 오른쪽에 있는 섬이다. 나달이 외국으로 나가려면 마요르카에서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간 뒤 국제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나달은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며 “가족과 함께 고향에서 사는 것은 삶에서 가장 올바른 결정”이라고 말했다. 많은 돈을 버는 글로벌 스타들은 세금을 줄이기 위해 모나코, 스위스, 바하마 등 소득세가 없거나 외국인에게 세금 혜택이 있는 곳을 활용한다. 그런데 나달은 그렇지 않다. 나달은 플레이스테이션, 영화감상, 독서 등을 즐긴다. 거의 매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로 가서 뮤지컬을 감상한다. 낚시를 좋아하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요리도 배웠다. 나달은 해산물 식단을 유지하며, 찐생선, 새우만두, 파스타 등을 주로 먹는다.

라파엘 나달이 2005년 프랑스오픈 4강전에서 로저 페더러를 꺾은 뒤 바닥에 드러누워 기뻐하고 있다. AFP

고향 지키는 ‘섬마을 청년’

나달은 올림픽 단식(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복식(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국가 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서도 네 차례 우승했다. 국가대표로 거둔 성적은 라이벌인 조코비치, 로저 페더러를 압도한다. 나달은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평범하면서 든든한 남편, 아빠인 동시에 국가에 세금을 내면서 스페인 사람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정직한 국민이다.

나달은 나이키(의류와 신발), 바볼랏(라켓) 등 많은 세계적 기업에서 후원을 받고 있다. 2006년부터 한국기업 기아의 글로벌 앰배서더로도 활동 중이다. 실제로 기아자동차를 자주 탄다. 나달은 2015년 슈투트가르트 메르세데스컵에서 우승해 스포츠카를 부상으로 받았다. 그는 물론 농담조였지만 “기아만큼은 좋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라파엘 나달이 2018년 프랑스오픈 준결승에서 승리한 뒤 감격스러워하고 있다. AP

나달은 2007년 설립한 라파엘 나달 재단을 통해 어린이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고향에 세운 라파엘 나달 아카데미에서 많은 유망주가 테니스를 배운다. 나달은 많은 자선 활동에 참여해 2011년 아서 애시 인도주의 상을 받았다. 2018년 마요르카 홍수 당시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아카데미를 대피소로 개방했고, 친구들과 함께 복구 작업에 직접 나섰으며 피해 지역 재건을 위해 100만유로(약 14억8000만원)를 기부했다.

나달은 경기 중에 화가 나더라도 라켓을 바닥에 내팽개친 적이 거의 없다. 어린 시절 삼촌에게 들은 “가난한 친구들은 라켓을 사지 못해 테니스를 배우지 못한다”는 말을 어른이 돼서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볼 퍼슨, 식당 직원들에게도 친절하다. 나달은 경기장에서 더없이 전투적이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예의가 바르고 수줍음도 타는 ‘섬마을 청년’에 가깝다.

나달은 다양한 종목의 스타들에게 존경받는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데이비드 베컴(이상 축구), 르브론 제임스(농구), 마르크 마르케스(모터사이클) 등은 나달의 인격과 태도를 높게 평가한다.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호날두는 나달의 은퇴 소식을 듣고 “정말 놀라운 경력을 쌓았다. 너의 헌신, 열정, 놀라운 재능은 전 세계 수백만 명에게 영감을 줬다. 너의 여정을 목격하고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영광”이라고 소셜미디어(SNS)에 적었다.

김세훈 기자 sh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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