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남은 박일 대사 “새벽 4시 교민 철수 조마조마…나도 무섭다”

박국희 기자 2024. 10. 1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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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레바논 대한민국 대사관의 박일(왼쪽) 대사가 지난 4일(현지시각)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인근 공항에서 우리 교민들의 귀국을 돕고 있다. /외교부

지난 5일 외교부와 국방부는 공군 특별수송기를 레바논으로 급파해 이스라엘 폭격이 이뤄지고 있던 현지의 우리 교민 97명을 무사히 국내로 탈출시켰다. 하지만 주레바논 한국 대사관의 박일(56)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의 한국인 직원 10명은 가족들만 고국으로 떠나 보내고 현지에 잔류했다. 개인 의사에 따라 레바논에 남아 있는 선교사 등 우리 교민 38명의 안전을 마지막까지 책임지기 위해서다.

박 대사는 11일 본지 통화에서 “97명의 교민 모두가 단 1분도 지각을 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정부의 작전 지침에 따라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며 “교민 안전을 총괄해야 하는 대사로서 공적 책임은 당연히 감당하고 있지만, 저도 인간인지라 솔직히 전장(戰場)은 무섭다”고 했다. 현지 통신망이 끊겨 인터뷰는 위성 전화를 사용하는 외교 전용망을 통해 이뤄졌다.

그간 오스트리아, 방글라데시, 브루나이, 에티오피아 대사관 등에서 근무한 박 대사에게도 전쟁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대사는 “5일 교민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간 아내와 통화하면 아내가 ‘당신이 교민 안전을 총괄하는 사람이니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고 의연하라’고 한다”며 “공적으로 내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은 당연히 의연하게 감당한다. 그러나 저도 개인이고 인간인지라 솔직히 말하면 심리적인 압박이 대단하다”고 했다. 박 대사는 “이스라엘의 폭격이 시작되면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이 흔들리고 폭격 소리 역시 정말 무시무시하다. 그걸 매일 밤 잠도 못자고 듣고 있어야 하니 고통스럽다”며 “교민들은 철수 직전까지 신경 쇠약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했다. 철수 하루 전인 지난 4일에도 레바논의 무장정파 헤즈볼라 근거지인 베이루트 인근으로 이스라엘 군이 70~80회 폭격을 가했다고 한다.

지난 5일 철수한 교민 97명 중 40%는 아이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사는 “교민 철수 작전 중 아이들의 비중이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안전을 위해 세심히 신경써야 할 부분도 많았다. 이스라엘 군의 폭격이 주로 저녁부터 한밤까지 진행된다는 패턴을 고려해, 철수 작전 시작 시각을 새벽 4시로 정했다. 시리아 인근 북부 지역 교민들의 밀집 지역 등으로 50인승 버스를 보내 중간 집결지로 교민들을 모았다. 박 대사는 “작전 이틀 전부터 교민들과의 단체 채팅방에서 ‘꼭 필요한 짐만 간단하게 챙겨 나오시라’며 주의를 당부드렸다”며 “특히 집결지에서 베이루트 공항까지 가는 길이 헤즈볼라 근거지와 매우 밀접해 혹시라도 폭격 피해가 있지 않을지 조마조마했다”고 했다. 공항까지 가는 동안 우리 교민이 탄 버스 행렬은 레바논 군 당국의 경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를 겨냥해 전방위적인 폭격을 강화하고 있던 지난 4일(현지시각) 레바논 베이루트 공항에서 박일(왼쪽) 레바논 대사가 레바논을 탈출해 귀국하는 어린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국방부

주레바논 한국 대사관은 레바논 남부 헤즈볼라 밀집 지역과 직선거리로 불과 3~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현재 535만명 전체 인구의 약 22%인 120만명이 전쟁 난민이 된 레바논은 최근 들어 이스라엘의 폭격이 격화되면서 외국인 사망자들도 나오는 상황이다. 박 대사는 “헤즈볼라 은닉 시설이 주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이스라엘 정보 당국만 알고 있는 상황이라 미사일이 어느 곳에 떨어질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시중 마트의 식료품도 점점 떨어져 가는 상황이라고 한다. 박 대사는 “이전에 한국에서 받아놓은 라면들이 대사관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현지에서는 향후 3~4주가 이스라엘과 레바논 등 중동 전쟁의 향방을 가를 것으로 보고 있다. 11월 5일 미 대선도 분기점이다. 그때까지는 양측이 양보 없이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는 만큼 충돌도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2021년 12월 레바논 대사로 부임한 박 대사의 3년 임기는 오는 12월 끝난다. 예정대로라면 곧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박 대사는 “베이루트 공항까지 폐쇄되는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를 대비해 남은 교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비상 계획도 세워뒀다”며 “전쟁이 급박하게 돌아가 ‘제2의 철수’를 해야 될 때가 오면 그 부분까지는 제가 끝까지 감당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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