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는 반대하지만 너희 사는 모습은 좋아 보이는구나” [열한 가지 결혼 이야기 ①]

나경희 기자 2024. 10. 21. 06:5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부부 열한 쌍이 각자 구청에 혼인신고서를 내고 법원에 불수리 처분에 대한 불복 신청을 했다. 동성결혼 법제화를 위한 이른바 ‘혼인평등소송’이 시작됐다. 소송에 참여하는 열한 쌍 부부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전한다.

‘주여! 동성 커플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지옥을 맛보게 하소서.’ 2013년 9월7일 동성 부부인 김조광수·김승환씨가 결혼식을 올리자 ‘한국기혼자협회’에서 재치 있는 문구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하지만 하늘은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들의 혼인신고서는 수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14년 5월21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 혼인신고 불수리 불복 신청을 했으나 기각됐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24년 10월10일, 혼인신고 불수리증을 받은 동성 부부 열한 쌍, 총 스물두 명이 모여 법원에 불복 신청을 하겠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 소송에서 승소하면, 앞으로 한국에서도 동성 부부의 법적 지위가 인정받게 된다. 2024년 10월 현재, 동성결혼이 가능한 나라는 전 세계 39개국이다.

〈시사IN〉은 혼인평등소송에 참여하는 원고 열한 쌍 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나이도 직업도 사는 모습도 모두 다른 이들의 집안 풍경은 다채로우면서도 비슷했다. 서로를 돌보고, 일상을 나누고, 때로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은 마주 보고 웃고 마는, 지극히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세상의 모든 커플들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어서, 이게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희연(왼쪽)·박여진씨. 두 사람은 2020년 9월19일 결혼식을 올렸다. ⓒ시사IN 신선영

아버지 환갑 기념 여행을 앞두고 숙소 예약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2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고 사무실 옆자리 동료가 여행사에 다니는 친구를 연결해주었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임에도 할인까지 챙겨준 게 고마웠던 박여진씨(35)는 밥이라도 한번 사겠다고 했다. 약속 당일, 황희연씨(35)는 깜짝 놀랐다. 메시지로 대화를 나눴을 때는 작고 귀여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식당에 들어선 여진은 큰 키에 위아래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한눈에’ 여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첫눈에 반한 건데 그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좀 들뜬 거라고 생각했어요.” 희연은 이전까지 여성을 연인으로 만나본 적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고, 잘 보이고 싶더라고요.” 

평소 술도 안 마시는 희연은 그날 새벽 5시까지 여진과 함께 있다가, 여진의 집에서 묵었다. ‘고양이를 좋아한다’던 사람이 고양이 보솜이(9)를 향해 어색하게 “어··· 안녕?”이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여진은 웃음이 터졌다. 사흘 뒤, 희연이 먼저 좋아한다고 말했다. 고백을 받고 고민하던 여진은 자신도 솔직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 레즈비언이야.” 희연은 손뼉을 쳤다. “어머, 잘됐다. 적어도 나를 좋아할 가능성은 있는 거잖아.” 희연의 ‘신선한 반응’에 여진은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만난 지 사흘 만에 연애를 시작했다.

박여진씨는 반지(앞)를 준비해 황희연씨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시사IN 신선영

희연의 커밍아웃을 들은 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내 자식이 행복한 게 중요하다. 세상이 뭐라 하든, 누가 종교적인 잣대를 들이대든 내 딸이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입장이 달랐다. “그래도 여진이와 가족여행도 같이 가고, 명절에 용돈도 주세요. ‘동성애는 여전히 반대하지만 너희가 같이 예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은 좋아 보인다’고요.”

결혼을 결심한 순간은 서로 다르다. 사실 여진은 첫 만남에 느꼈다. ‘결혼은 이런 사람이랑 하는 거겠구나.’ 어떻게 밑도 끝도 없이 불쑥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냐는 질문에 여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마다 짝이 있다고 믿어요. 저는 희연이를 안 만났으면 아마 결혼 안 했을 거예요.” 희연은 만난 지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 ‘계시’를 받았다.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주말 아침에 여진이는 아직 자고 있고 저는 밖에서 조용히 설거지를 하는데 ‘이게 맞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딱 스치더라고요. 그렇지, 이렇게 사는 게 맞지, 이 사람이랑 이렇게 계속 살아야지.”

두 사람이 같은 위치에 새긴 네잎클로버 문신. ⓒ시사IN 신선영

비성소수자 커플이었다면 아마 결혼식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돈으로 차라리 여행을 갔을 거예요. 그런데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표를 해야겠더라고요. 그래야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이 누구에게 먼저 연락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여진이 말했다. 2020년 9월19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고양이 엘리(5)를 입양했다.

두 사람은 기념일마다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문신을 하나씩 늘려가고 있다. 1년 전에는 한 잎만 무지개색으로 물들여진 네잎클로버를 팔꿈치에 새겼다. ‘살아 있어서 행복하고 퀴어라서 행운’이라는 의미다.

황희연씨(왼쪽)와 박여진씨가 고양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읽기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습관 [시사IN 구독]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