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산업은행이 맞닥뜨린 갈림길에서 부산이 아닌 서울 잔류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해운과 석유화학 같은 국가 기간산업의 구조조정은 물론, 150조원대 정책자금 운용과 글로벌 금융 협력까지 국책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수도 서울에서 임무 수행 시 실(失)보다 득(得)이 크다는 분석에서다. 금융권에서는 서울 내 산업은행 본점이 위치하는 것이 국가 경제의 생존 전략과 직결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실례로 HMM은 산업은행의 공적 관리 아래 들어간 뒤 뚜렷한 회복세를 이어왔다. HMM은 올해 상반기 매출 5조4774억원, 영업이익 8471억원을 기록했다. 앞서 HMM은 2019년까지 줄곧 적자에 시달리며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다. 그러나 산업은행이 2016년 주요 주주로 합류해 구조조정에 나선 결과 2020년부터 상황이 개선됐다. HMM은 2020년 9808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이래 5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산업은행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채무 재조정, 초대형 선박 발주, 지배구조 개편까지 지원했기 때문이다. 현재 HMM은 해운업 호황이 꺾인 2023년 이후로도 계속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산업은행의 개입이 없었다면 HMM의 회생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책은행이 기간산업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기업을 회생시킨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산업은행이 설립된 이래 본연의 업무에 충실했던 것으로, 곧 산업은행 본점이 서울에 남아야 하는 기능적 이유로 해석된다. 특히 구조조정은 정부, 산업, 금융을 동시에 아우르는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정책당국과 긴밀히 움직일 수 있는 서울 본점 체제가 속도를 뒷받침한다는 뜻이다.
이 논의는 자연스럽게 본점 이전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야당은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된 지역 균형 정책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정부는 국제금융 기능이 있는 기관은 서울에 두고, 일부 공공기관만 지방으로 이전하는 투트랙 방식을 택했다.
앞서 노무현 정부는 2003년 '동북아 금융허브 로드맵'을 발표하며 서울을 국제금융 중심지로 육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와 국제금융 기능을 가진 국책은행은 서울에 존치하는 한편 일부 공공기관은 혁신도시 특별법에 따라 이전했다. 산업은행 서울 본점 유지 특정 정권의 특혜가 아니라 국가 금융 전략의 연속성 속에서 이뤄진 조치인 셈이다.

해운업 구조조정에서 성과를 거둔 산업은행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구조조정 과제는 더 복잡하다. 고금리와 고환율, 수요 둔화에 국제유가 변동과 공급과잉이 겹치면서 석유화학 업계의 수익성이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중견 화학사의 차입 부담은 늘어난 가운데 위기가 현실화하면 금융 지원, 사업 재편, 채권단 관리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석유화학 업계는 정유·철강·자동차와도 직결돼 파급력이 해운업보다 작지 않다. 채권단의 주체로서 정부 부처, 산업계, 자본시장을 동시에 조율해야 하는 산업은행의 특성상 정책당국과 근접한 서울 본점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금융 대전환은 산업은행의 또 다른 시험대로, 당국 수장인 이억원 금융위원장도 언급한 점이다. 이 원장은 최근 "금융의 과감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며 생산적 금융, 소비자 중심 금융, 신뢰 금융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위가 내놓은 로드맵에는 국민성장펀드 150조원, 첨단전략산업기금 75조원 등 거대한 자금 조성이 담겼다. 이는 단순한 집행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새로 설계하는 작업이다.
산업은행은 이 자금이 부동산담보대출이나 단기 유동성 지원에 머물지 않고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AI), 녹색금융 같은 전략 산업으로 흘러가도록 방향을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책당국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위치에서 움직여야 하는 이유다.
경제 전문가도 산업은행의 서울 본점 유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서지용 상명대 교수는 "공급실적과 영업자산의 다수가 수도권, 특히 서울에 집중돼 영업과 산업 간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라며 "국내 주요 기업의 70% 이상이 서울 수도권에 위치해 금융 거래 및 협력이 용이한 위치에 본점이 있어야 효율적인 금융 지원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내부 과제가 금융 대전환이라면 외부 과제는 글로벌 협력이다. 서울 잔류의 필요성은 산업은행의 글로벌 전략에서도 확인된다. 기후 금융, 디지털 인프라, 국제 공동 펀드 같은 의제는 해외 투자자와의 협력과 국제기구와의 신속한 소통을 요구한다. 산업은행은 이미 유럽투자은행(EIB), 세계은행과 공동 펀드 조성을 논의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로벌 금융 중심지 서울에 본점을 둔 것은 산업은행의 협상력을 높이는 동시에 해외 파트너에 신뢰를 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제 자본 네트워크와 거리를 두지 않는 것이 산업은행의 경쟁력 유지에 직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산업은행의 본점 위치는 단순히 지역 균형 발전 관점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며 "국책금융기관이라는 산업은행의 본질적 역할만을 고려한다면 서울에 머무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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