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공동묘지로 소풍 가는 엽기적인 그녀와 교제한 카프카!

[홍성광의 독일 작가 사랑 이야기]
카프카의 세번째 연인 밀레나 예센스카
카프카 단편 '화부' 번역한 여성지식인
편지 교환하며 관계 깊어져...'서간체 소설'
카프카는 결혼 원했지만, 그녀는 유부녀
체코인으로 유대인 숨겨주고 돕다 체포돼

세 번 약혼하고 세 번 파혼한 뒤 독신으로 지낸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두 번 약혼, 두 번 파혼한 펠리체 바우어(Felice Bauer, 1887~1960)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편에 소개했고, 이번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사랑의 결실은 맺지 못한 밀레나 예센스카(Milena Jesenská, 1896~1944)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요양소에서 만난 밀레나 예센스카

1917년 9월 카프카는 결핵으로 진단받은 후 보험공사에 석 달간 병가를 낸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병가 기간을 연장해 여동생 오틀라가 사는 취라우에서 장기간 요양 생활을 했다. 그렇게 해도 다시 몸이 나빠진 카프카는 1920년 4월 초에 휴가를 얻어 티롤 지방의 메란으로 요양을 가서 석 달간 머무른다. 그곳에서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24세의 밀레나 예센스카에게 보내는 첫 편지를 썼다. 그녀도 폐병을 앓았지만 증세가 가벼웠다.

1919년 밀레나는 카프카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단편 「화부」를 체코어로 번역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카프카에게 이 제안은 감동적이면서도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가련한 밀레나에게는 돈을 벌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였다.

카프카가 유대인이었던 반면, 밀레나 예센스카는 유대인이 아니라 체코인이었고 기독교인이었다. 그녀는 카프카의 인생에서 펠리체 바우어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사랑이었다. 밀레나와 만날 무렵 카프카는 율리 보리체크와 약혼한 상태였다. 1919년 11월 초에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려고 집도 구해놓았다. 그러나 결혼 이틀 전 집 문제가 틀어져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밀레나는 음악과 문학에 정통한 은행원 에른스트 폴라크와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빈에서 시작한 둘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아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남편은 저녁이면 카페에서 문우들과 어울렸으며, 밀레나는 혼자 거의 집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형식적으로만 지탱되고 있었는데, 카프카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프라하의 경제 상황에서 남편 수입으로는 두 사람이 살아가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밀레나는 번역 활동으로 가계 수입을 보태야 했다. 그 무렵 그녀의 독일어 실력은 짧은 독일어 텍스트와 독일인이 아닌 작가의 독일어 작품을 체코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밀레나는 번역한 작품을 체코의 신문, 잡지에 보냈고, 이후 카프카의 다른 단편들과 헤르만 블로흐, 프란츠 베르펠 등의 작품도 번역했다.

실존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살아있는 불덩이'..해방된 여성 지식인

카프카는 밀레나와 편지 교환을 하는 내내 이 교류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며 기뻐했다. 그 후 두 사람은 격렬하고 점점 더 열정적인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편지들은 상상할 수 없이 섬세하게, 부드럽고 우호적인 유머로 쓰였다. 그러다가 둘의 서신은 ‘서간체 소설’로 발전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로 인해 밀레나는 후일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체코 명문가 출신의 밀레나는 새롭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옹호하는 해방된 여성 지식인이었다. 카프카의 표현을 빌면 ‘살아있는 불덩이’와 같은 여자인 그녀는 친구들과 괴팍한 행동을 해서 화제를 뿌렸다. 가령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소풍을 가기도 했고, 데이트에 늦지 않기 위해 옷을 입은 채로 몰다우강을 헤엄쳐 건너가기도 했다. 화가, 문인, 가수들과 첫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녀 친구들의 모토였다. 밀레나가 유대인인 에른스트 폴라크를 사랑하게 된 것도 이러한 영향으로 보인다.

만년에 강제수용소에서 만나 친구가 된 마르가레테(Margarete Buber-Neumann)는 이렇게 썼다. “둘 사이에서 사랑을 하는 쪽은 그녀, 밀레나였다. 그녀에게 사랑은 단 하나의 진정한 위대한 삶을 의미했다. [·····] 그녀는 수줍음이 없었고 또 강렬하게 느끼는 것을 수치로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무언가 분명한 것, 자명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열정적인 교제를 시작했다. 카프카의 편지들은 밀레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진지하고 솔직한 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1920년 내내 카프카가 요양 중이던 이탈리아 북부 메란의 온천과 밀레나가 살고 있던 빈으로 두 사람의 편지가 빈번하게 오갔다. 그녀를 2년간 열렬히 사랑한 카프카는 서로 외로운 처지에 있으니 함께 결합하자며 프로포즈까지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밀레나는 법적으로 유부녀였기에 두 사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숙명이었다. 그녀는 카프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성이었지만, 늘 카프카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질상으로 서로 잘 맞지 않았고, 밀레나는 결혼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카프카가 밀레나를 헬레나처럼 이상화한 데 반해, 그녀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이며 이성적으로 '몽상적인 작가'를 바라보았다.

카프카의 세번째 연인 밀레나 예센스카

'세기적 사랑' 가로막은 카프카의 깊은 병

밀레나는 카프카가 메란에서의 요양을 끝내고 프라하로 돌아가는 길에 빈에 들러달라고 부탁했다. 카프카는 갈까말까 여러 번 망설이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저는 빈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신적 긴장을 못 견딜 것 같아서입니다. 저는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습니다. 폐 질환은 단지 정신적인 병이 넘쳐흐른 것에 불과합니다. 이 병은 4, 5년 사이에 두 번의 약혼을 겪으면서 생긴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과 세상에 태어난 것에 탄식한다고 말했다.

결국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1920년 6월 29일부터 7월 4일까지 나흘간 빈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 첫 만남은 희망으로 가득했고 고통스럽지 않았다. 밀레나는 그를 알았다기보다는 그의 불안을 이해했고, 그럼으로써 그녀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카프카는 "그녀의 편지가 오지 않는 날은 끔찍할 정도로 힘들다"면서 "그럴 때는 삶이라는 보트가 물 속에 잠기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늘 불안에 취약한 상태였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불안에서 벗어났고, 기침도 하지 않는 등 건강이 다시 좋아진 듯 보였다.

나흘간 밀레나와 보낸 카프카는 프라하로 돌아와 율리 보리체크와 파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메란에서의 요양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진단 결과는 좋지 않았다. 밀레나는 그제야 카프카의 병이 자신처럼 가볍지 않고 심각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카프카는 '죽을 사람이 행운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자신은 살아남을 거'라면서 낙관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고 6주 후인 8월 14일 밀레나의 재촉으로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남쪽 국경 마을 그뮌트(Gmünd)에서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이때 서로의 삶의 모습을 확실히 이해했다. 카프카는 자신이 순수한 마음으로 외칠 수 있는 이유는 자기가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라면서, 자신을 지옥에 떨어진 자라고 생각했다. 둘은 그해 가을과 겨울에도 여전히 편지를 교환했고, 밀레나는 매일 카프카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만남은 결과적으로 둘의 관계가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프카는 펠리체와 그랬듯이 밀레나와도 팔레스타인에 갈 계획을 세웠지만, 자신의 침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해 가을이 되자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복잡해졌다. 밀레나는 사랑에 빠졌지만 카프카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는 남편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애가 탔고, 밀레나는 자유가 없는 곳에서 절망적으로 출구를 찾고 있었다. 카프카는 "밀레나가 자신한테서 사라져 버린다면 나쁜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밀레나는 그런 카프카를 고통스럽게 할까 봐 걱정했다. 1920년 12월에 카프카가 타트라 고원의 마틀리아리에서 요양 생활을 하면서, 거의 매일 하던 두 사람의 서신 연락도 갑자기 끊어졌다.

'생각을 보호받아야 할 난민'에게

카프카는 그녀를 떠날 이유를 찾아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정신분석학에서 밝혀낸 여러 가지 병적 현상의 하나로 봤다. 그는 그것을 질병이라고 보지 않고 정신분석학의 임상적 측면에서 드러난 '속수무책의 오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밀레나는 카프카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판이한 것을, 그래서 카프카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병에 대해 "뇌가 자신의 고통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자 폐가 무거운 짐을 자진해서 떠맡았다"고 썼다. 폐는 원래부터 나빠서 더 이상 별로 잃어버릴 것이 없어서 그런다는 것이다. 1920년 12월 18일부터 1921년 8월까지 마틀리아리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자 9월에 카프카는 프라하로 돌아와서 일기 쓰기를 단념했는지 자신의 일기장과 『실종자』 원고를 밀레나에게 넘겼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그녀가 보관하고 있었다. 이때 밀레나는 자신 때문에 카프카의 병이 더 나빠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1922년 5월에 밀레나는 프라하로 카프카를 문병왔는데 이것이 마지막 대면이 되었다. 예전 약혼녀 펠리체가 은연중에 카프카의 소설 「선고」와 「소송」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성』에는 프리다와 아말리아의 모습에서 밀레나의 흔적이 어른거렸다. 이 무렵 밀레나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으며, 두 사람의 관계도 사실상 끝이 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22년과 1923년에 몇 차례 더 편지를 주고받았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겨울에 먹는 것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어서 카프카의 병이 급격하게 악화했다.

밀레나는 카프카가 자신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 그의 병이 그녀의 잘못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결과물인지 알고 싶어했다. 결국 그녀는 카프카에게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카프카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지만 그녀 자신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밀레나는 엄격한 금욕주의적인 삶에 자신을 던져버리기에는 너무 연약했다.

1923년 초 밀레나는 카프카에게 더 이상 편지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밀레나는 카프카의 절친 막스 브로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카프카의 무능력에 대해 ‘생각을 보호받아야 할 난민’이라며 그에게 생필품을 제공해야겠다고 했다. 그런 후 카프카는 1923년 11월 자신이 베를린에서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우회적으로 정중히 알린다.

말레나와 카프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연인

이때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카프카의 작품 중 ‘가장 소설다운 소설’이 됐다. 편지에서 카프카는 “나는 쾌락에 저항하며 삶을 마치겠다는 각오로 인생을 보냈어요.”라고 썼다. 삶이 온통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의 삶은 문학과 일치를 보일 뿐 아니라, 사랑이 싹트고 환희가 생기며 질투가 끼어들다가 점차 사랑이 식는 순서였다. 그중 밀레나는 직관을 가지고 카프카를 제대로 알아본 여인이었다.

밀레나는 카프카에 대해 “그에게는 손바닥 크기의 은신처도 엄호물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보호받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벌거벗은 사람처럼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카프카는 너무도 섬세한 양심을 지닌 예술가였으므로 다른 사람들, 즉 귀 먼 사람들이 안전하게 느끼는 곳에서도 여전히 방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밀레나는 7년간의 결혼 생활 후 에른스트 폴라크와 이혼했다.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후 그녀는 지하 저항운동에 참여하여 많은 유대인 및 정치적 난민들의 이주를 도왔다. 그러나 체코에 남아 있다가 1939년 11월 망명자의 도주를 도왔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처음에는 프라하의 판크라츠에, 나중에는 드레스덴에 수감되었다. 1940년 10월, 그녀는 독일의 라벤스브뤼크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가 1944년 5월 17일 라벤스브뤼크에서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